민족사랑

서울 남산 꼭대기 국사당 터에 건립된 일제의 국기게양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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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석

▲ 남산 위 한양공원 터가 조선신사 건립지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19년 7월 20일자 기사 ⓒ 민족문제연구소

3·1만세사건이라는 민족적 저항의 여파가 아직 거세게 지속되고 있던 1919년 7월 18일, 일제는 이러한 혼돈상태를 서둘러 봉합하려 함인지 관폐대사 조선신사(官幣大社 朝鮮神社)의 창립을 공표하였다. 여기에는 이른바 ‘식민지 조선의 수호신’으로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죽은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을 제신(祭神)으로 삼는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6월 27일에 개칭)의 건립을 통해 자기들의 영구적인 식민통치가 무탈하게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조선신궁이 들어선 자리는 익히 알려진 대로 서울 남산 중턱이었다. 처음에는 신사의 배치가 남면(南面; 남쪽을 바라보게 배치하는 것)이어야 하고 숲이 우거진 곳이라야 좋다는 조건에 따라 경복궁 신무문 후면의 백악산 중턱과 남산 왜성대 남쪽의 경성신사(京城神社) 인접지가 후보지로 고려되었으나, 결국 경성 시가지가 한 눈에 조망되는 명승지라고 하여 남산 위 한양공원(漢陽公園; 1910년에 개설) 터가 신궁조영 터로 최종 낙점되었다.

이에 따라 남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던 한양도성의 흔적은 말끔히 제거되었고, 신궁 영역에 포함된 이런저런 시설물들도 잇달아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했다. 우선 1913년 정초 이래 한양공원 내에 자리했던 오포대(午砲臺)는 그들만의 신성한 공간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감히 대포소리를 울릴 수 없다는 이유로 1920년 5월에 효창원(孝昌園)과 인접한 선린상업학교의 뒤편 언덕으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남산 꼭대기에 자리한 국사당(國師堂)도 그 대열에 포함되었다. 고종 때의 문헌자료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목멱신사(木覓神祠)’ 항목에 “목멱산 정상에 있으며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행하였으나 지금은 폐지되고 다만 사당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 등장하는데, 이곳이 곧 국사당을 가리킨다. 원래 조선 태조 때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았을 정도로 남산 자체가 신령한 공간으로 대우를 받았으며, 그 정상부에 자리한 국사당의 존재가 이러한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국사당

▲ <동아일보> 1925년 6월 15일자에 수록된 남산 국사당의 모습이다.ⓒ 민족문제연구소

하지만 예로부터 국사당은 무당의 푸닥거리가 벌어지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이것은 식민통치자들에게 고스란히 ‘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빌미가 되었다. 이를 테면 조선신궁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이처럼 풍치를 어지럽히는 요소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국사당은 1925년께 해체되었다가 그 이듬해인 1926년 5월 인왕산 자락에 재건되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6년가량의 세월이 흐른 뒤 <경성일보> 1932년 5월 27일자에 수록된 「남산의 정상에 히노마루가 휘날린다, 오쿠보(大久保) 씨가 국기게양탑을 봉납, 백척의 철주(鐵柱) 위에」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었다. 요컨대 옛 국사당 터에 난데없이 국기게양탑이 건설된다는 소식이었다.

대일본국기선양회(大日本國旗宣揚會) 조선본부장 경성부 황금정 3정목 오쿠보 마사토시(大久保眞敏) 씨는 일찍이 조선신궁 경내 남산 정상에 국기게양탑을 건설 봉납할 생각을 세워 동 신궁 아치와(阿知和) 궁사(宮司) 앞으로 봉납을 원출하였으며, 23일부로 수납통지를 접하여 조속 건설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이 국기게양탑은 재료는 철재를 사용하고 높이 100척(尺)의 탑으로 70척의 지점에는 7척 평방의 노대(露臺)를 설치하며, 그리고 여기에 게양할 국기는 세로 18척, 가로 27척의 대국기(大國旗)인데, 이에 필요한 경비는 1천 5백 원으로 오쿠보 씨는 오는 7월 11일의 대일본제국 국기제정기념일(國旗制定記念日)에는 게양식을 거행토록 지급공사(至急工事)에 착수할 예정이다.

조선신궁 경내 해발 9백 척의 남산정상 국사대(國師臺) 터, 100척의 게양탑 위에 이 대국기가 펄럭이는 것은 바로 일본국민적 감격의 표상으로 경성 명물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국사당

▲ 선신궁 머리맡인 남산 꼭대기 국사당 터에 들어선 국기게양탑(동그라미 표시)의 모습이다. (<문교의 조선> 1932년 10월호) ⓒ 민족문제연구소

이에 따라 총독부 철도국 공무과 기수 우에하라 토시오(上原敏雄)의 설계와 경성 타치바나 카메타로(立花龜太郞)의 시공(공사기간 1932.5.28~7.10)을 거쳐 그해 7월 11일 국기게양대가 준공되었다. 이 날짜로 맞춘 것은 안정 원년(安政 元年) 즉, 1854년에 막부정부 하에서 일본배의 선인(船印, 선박표시)으로 흰 바탕의 히노마루(일장기)가 처음 채택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이날의 준공봉고제에서는 이마이다(今田井) 정무총감을 비롯하여 가와시마(川島) 군사령관, 학무국장 대리 유만겸(兪萬兼) 사회과장, 마츠모토(松本) 경기도지사, 이노우에(井上) 경성부윤, 하루미(春海) 고급부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신궁 아치와 야스히코(阿知和安彦) 궁사의 집전으로 오전 8시부터 식이 거행되었다. 곧이어 남산 정상에 올라 9시 반부터 국기게양식이 거행되어 제20사단 병사의 ‘기미가요’ 취주 속에 대형 일장기가 철탑 위에 게양되었고, 참석자 일동의 만세삼창과 더불어 산회되었다.

<경성일보> 1932년 7월 30일자에 수록된 관련기사에 따르면, 이렇게 건설된 국기게양탑에는 연간 22일에 달하는 중요한 축일 및 제일을 선별하여 정례적으로 국기를 게양하기로 하고, 이 일의 실무는 경성부연합청년단이 맡아서 처리하기로 정하였다. 다만, 명치천황제일(明治天皇祭日, 7월 30일)의 경우 때마침 특별히 20주기에 해당하는 까닭에 이날 하루만은 예외적으로 국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했다.

0128-100그런데 실제로는 이들 목록에 포함된 날짜 이외에도 일장기가 게양된 사례들이 훨씬 더 많았는데, 예를 들어 1933년 9월 18일은 이른바 ‘만주사변기념일’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장기 게양이 없자 경성부 측에서 조선신궁에 이를 엄중 항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실제로 정례 게양일 이외에 황태자 또는 내친왕(內親王) 탄생과 같은 황실 경축일, 남경함락(南京陷落)과 같은 전승일에도 예외 없이 일장기가 게양된 사례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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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32년 12월 29일자에 게재된 남산 국기게양탑의 모습으로, 여기에는 일장기의 정신을 강조하는 보도내용도 함께 곁들여져 있다.(왼쪽) 『경성일보』 1933년 2월 19일자에 수록된 국기게양탑 설치안내 광고문안이다.(가운데) 천안신사 구내에 설치된 국기게양탑의 모습이다. (『대륙신사대관』, 1941)(오른쪽) ⓒ 민족문제연구소

그렇다면 국기게양에 관한 문제가 유달리 이 시기에 이르러 강조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에서 있어서는 1932년 1월 22일자로 이뤄진 정무총감의 통첩 「국기게양방 여행(國旗揭揚方 勵行)에 관한 건」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 시기는 바로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노골화하던 때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에 있어서는 종래 왕왕 국기의 게양을 게을리 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필시 국기게양의 취지를 십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지적하고 우선 관공리들이 솔선수범하여 국기게양의 취지를 널리 보급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일선지방 행정조직에서는 국기게양에 관한 관념을 크게 독려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방안들이 강요되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2년 2월 3일자 관련보도를 보면, 경성부와 같은 경우에는 국기게양 관련 정동총대(町洞總代) 대표자 간담회를 열어 다음과 같은 실천요강을 확정하기도 했다.

1. 미증유(未曾有)의 국가적 중대한 시국에 감(鑑)하여 국민정신의 작흥 및 존황애국(尊皇愛國)의 관념을 환기하기 위하여 2월 11일 기원절을 기하여 국기게양의 철저적 여행(勵行)을 실현할 일.

2. 정동 총대는 먼저 이첩한 국기게양에 관한 정무총감의 통첩의 취지를 매호(每戶)에 철저하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아직 국기를 소유치 아니한 자를 조사하여 차제 그 구입을 설득할 것.

3. 정동총대는 그 정동에 재(在)한 국기구입희망자를 모아 공동구입의 편익을 주도록 특히 주선할 일.

4. 부(府)는 부내 황금정 3정목 오쿠보 기점(大久保旗店)에 교섭하여 아래 표와 같이 특가로 다시 특별 할인케 할 것.

5. 국기게양의 권설독려(勸說督勵)에 대하여 최기(最寄)의 경찰관파출소의 원조 협력을 구할 일.

6. 국기게양의 대운동을 전부(全府)에 일으켜 각 단체의 협력응원을 구하고 일제히 활동을 개시할 일.
1) 부 관계 각 학교를 통하여 생도(아동)의 가정에 격려 권유할 것.
2) 정동총대(町洞總代), 방면위원(方面委員)을 통하여 격려할 것.
3) 경찰관을 통하여 독려할 것.
4) 동민회(同民會), 청년단, 재향군인회(在鄕軍人會), 기타 교화단체를 통하여 장려할 일.

7. 국기게양에 제(諸) 주의를 철저케 할 것. (하략).
이를 계기로 서울 시내 각처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걸쳐 관공서, 학교, 마을 단위로 국기게양탑이 잇달아 만들어지는 등 그야말로 일장기의 광풍이 휘몰아치게 되었다. 어찌 보면 남산 위의 국기게양탑은 그 자체가 침략전쟁의 표상이자 결과적으로 끝 모를 고통을 가져다준 강제동원의 역사를 예고하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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