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강만길 명예교수가 말하는 ‘한국사회가 가야 할 길’
“역사는 인류가 꿈꾸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 과거 막연했던 이상도 역사를 되짚어보면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결국 실현되었다. 헤겔이 말한 대로 역사는 한 사람(독재자 왕)만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 만명의 사람이 자유로운 시대로 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좀 더 양심적이고 역사의식이 있는 정권을 창출하는 일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84)는 “1987년 이후 민주화 30주년을 맞는 새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더 전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의 저서를 낸 강 교수는 분단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역사학자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상지대 총장을 지낸 후 10년 전부터 강원도 양양에서 지낸다. 그는 매일 아침 하조대 해변을 거닐며 ‘사유의 바다’를 즐긴다고 했다. 세밑인 12월28일 하조대 부근에서 김희연 문화부장이 강 명예교수를 만나 한국사회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들었다.
– 2016년 촛불로 시민혁명을 이뤘다는 평가도 나온다. 1000만명이 모인 광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강연이 있던 토요일 지인들과 함께 광화문으로 향하다가 급한 일로 현장에는 못 갔지만 굉장하더라. 참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과거 4·19혁명도 있었지만 당시는 일부의 젊고 의식 높은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에는 남녀노소 없이 전 국민이 참여했다. 그만큼 시민의식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문화민족이면서도 근대국가를 우리 힘으로 경영해본 역사가 반세기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근대국가를 경영한 기간이 문화 수준에 비해 짧다. 유신과 군사·문민독재를 겪으며 항쟁하고 그 과정을 통해 점점 발전해왔다. 그러면서도 ‘유신독재정권 장본인의 딸’로서 국사교과서를 다시 국정화려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촛불은 그런 것에 대한 역사적인 큰 반성이며 민주주의의 수준을 높여가는 시민운동의 한 표현이자, 수준 낮은 치자들에 대한 시민들의 교화운동이라고도 본다.”
–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많았다.
“1987년도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세대가 부모가 돼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의 장이고 상당히 정치적인 훈련이 됐을 것이다. 사회에서 정치의식이란 것이 점점 어린 나이일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어간다는 말이다. 민주주의의 층은 폭이 넓어야 하고 세대 위아래로도 깊어야 한다. 앞으로는 상당히 민주주의의 발전도가 달라지리라고 본다.”
– 1987년 이후 민주화 30주년의 의미를 어떻게 살려야 할까.
“문민독재, 군사독재, 유신독재를 겪고도 ‘유신잔재정권’ 같은 부패정권이 성립된 것에는 국민들의 책임이 크다. 민주화 30주년이 되는 2017년은 대통령선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전진시키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 전두환군사독재 시기에 이루어진 현행헌법도 개정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고 의회 권한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 고위 공무원 등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부역자가 많았다.
“정권의 문제다. 정권이 얼마만큼 민주의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른 것이다. 어느 정권이든 어두운 면이 있지만 통치자의 역사의식과 민주의식이 높을수록 정권이 깨끗하게 마련이다. 청산되지 못한 독재 권력 산물(후예들)의 결과가 아닐까. 한편으론 이런 과정을 통해 청산이 되는 것이다.”
– 2017년 한국사회의 과제는.
“반드시 양심적이고 역사 의식이 있는 정권을 창출해야 한다. 그런 다음 정권에 대한 국민의 감시가 있어야 한다. 민주의식을 평화통일의식으로 연결하고 확대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회복하는 정권을 만들고 개성공단을 다시 열고, 백두산 관광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북한은 언제든지 전쟁이 재발될 수 있는 휴전조약 대신 평화조약을 맺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정기적으로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고립시키지 말고 승인해야 하며 그 길만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 세월호 참사와 국정농단을 겪으며 국가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어떻게 복원할 수 있나.
“무엇보다 개개인이 세상사에 휩쓸리지 않는 자의식을 키워야 한다. 그 속에서 ‘우리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교육 문제로 귀결된다. 사회차원의 교육이 중요한데…. 나의 경우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며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여러 케이스가 있고 그 속에서 자기 위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 2018년부터 국정교과서와 검정교과서 혼용방침이 발표되며 불씨를 남겼다.
“박정희 유신정권 때도 국정화가 됐지만 정권과 함께 없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통해 아버지의 업적을 세우고 독재를 은폐하려 하는 것 같은데, ‘정치는 독재를 했지만 경제는 많이 발달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역사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부분에서 민주주의가 골고루 발달해야 한다. 정상적인 국가에서 (국정교과서는) 어림없는 소리다. 제자들에게 박근혜 정권과 함께 끝날 문제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 보수와 진보의 갈등 등 사회구성원 간에 골이 깊다.
“일본만 해도 근대국가를 경영한 지 100년이 훨씬 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도, 중국의 신해혁명 같은 것도 못해봤다. 그러나 시민의식은 상당히 높아졌다. 정치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 역사적 체제를 두고 보면 근대사 이후 우리는 ‘보수(지켜야)’할 만한 체제가 없었다. 대한제국의 전제주의체제나 일제강점체제나 해방 후의 미족분단체제 등 모두가 역사적으로 보수할 만한 체제가 못되었다. 흔히 보수, 진보 하면 바로 좌와 우 이렇게 얘기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좀 불만스럽지만 현 체제를 유지하자는 쪽과 아니다 이건 개혁해야 한다는 쪽, 결국 이 차이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 요긴하다 할 것이다.”
– 트럼프 정권이 들어선다. 세계 정치구도는 어떻게 변화할까.
“미국은 그동안 다른 나라의 군사적 방어를 위한다며 전 세계를 지배하려고 해왔다. 경찰국가 노릇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곧 바뀔 것이다. 19세기는 영국이, 20세기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했다. 21세기는 중국이 지배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아니라고 본다. 유럽, 아세안, 아프리카 등 세계는 이제 지역 공동체가 발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도 하나의 지역공동체로 위치해 갈 것이다. 21세기엔 지역공동체와 평화주의가 정착하리라고 본다. 우리민족사회도 평화통일을 위해 동아시아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야 할 것이다.”
– 앞으로는 어떤 사회가 될까.
“역사는 인류이상을 현실화해 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고대인들의 이상은 중세사회 사람들만큼 사는 일이었고. 중세 사람들의 이상은 근대사회 사람들만큼 사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사회의 일반인이었던 노예들은 농노 정도라도 살기를 바랐고 온갖 노력을 했다. 중세시대의 일반인인 농노들은 근대사회의 자유농민만큼이라도 살기를 원했으며 결국 그렇게 됐다. 이렇게 역사는 인류의 희망과 이상을 현실화시켜 온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은 점점 남녀 차별이 없어지고 빈부 차이가 사라지고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평등한 사회가 되어 갈 것이다. 흙수저·금수저라는 말도 쓰지 말아야 한다. 현실에 대한 풍자일 수는 있겠으나 그 자체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고착화시키면 안된다.”
양양 | 인터뷰 김희연 문화부장·정리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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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2>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