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독립운동 탄압의 대명사, 종로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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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경성종로경찰서 사진첩> 표지. 1915년부터 1929년까지 사용했던 종로경찰서 건물(종로 2가 8번지에 있던 옛 한성전기회사 사옥)이 그려져 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악랄하게 탄압하던 일제 공권력의 상징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건물 외벽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누군가 건물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건물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게시판과 벽 일부가 파손되었다. 또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원 5명이 병원에 실려 가고 지나가던 민간인 2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피해도 피해지만 총독부의 대표적 통치기구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경찰서가 폭탄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제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경성 시내에는 비상이 걸려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고 삼엄한 검문검색이 실시되었다.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 한 총독부는 사건을 취재하거나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범인 색출에 돌입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제일’의 고등계 주임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경부를 선봉에 내세웠다. 그는 추적 끝에 폭탄투척을 했거나 적어도 그 배후에서 조종했을 것으로 보이는 자를 김상옥(金相玉)으로 지목하고 은신처를 알아내는데 주력하였다.

매부의 집에서 은신하던 김상옥은 주변인의 밀고로 미와에게 탐지되자 총격전을 벌이면서 도주를 시도했다. 이 와중에도 경찰 몇 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포위망을 여러 차례씩 뚫으면서 일본경찰에 많은 피해를 주게 되자 일본은 군대까지 동원하였다. 1923년 1월 22일 김상옥은 수백 명의 경찰에게 포위당해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총을 꽉 쥔 채 저항하다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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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가슴에 수많은 훈장을 매달고 사진을 찍은 고등계 주임 미와 경부(오른쪽 아래). 그는 고문과 탄압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쳤으며 ‘염라대왕’이라 불렸다. ❷ 김상옥이 고봉근의 집에 숨어 있다는 것을 탐지하고 체포하려다 김상옥이 쏜 총에 맞고 즉사한 다무라 순사부장(왼쪽 위)과 1920년 보합단普合團 조직원 김도원金道源에게 죽은 순사부장 곤도近藤茂禮(오른쪽 위)와 이정선李廷善(가운데). 보합단은 친일파 처단, 은행 습격과 부호를 통한 대대적인 군자금 모집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종로구 운니동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이때 사살된 2명의 일경이 바로 곤도와 이정선이다.

<경성종로경찰서 사진첩>은 최근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암살〉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종로경찰서의 활동상과 소속 경찰의 모습을 담고 있는 희귀 자료이다. 총 55면으로 구성된 이 사진첩은 당시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정무총감, 경무국장의사진과 함께 건축 중인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사진의 첫 페이지로 하여 역대 서장과 복무중인 경찰관의 사진을 직위순으로 배치하였다. 의열단원 김상옥을 검거하는 데 앞장선 고등계 주임 미와 경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순직자의 늠름한 모습(殉職者ノ英姿)」에는 김상옥의 총에 맞아 즉사한 순사부장 다무라 죠시치(田村長七)의 사진도 실려 있다. 특이한 점은 현직 경찰서장 소개보다 앞서 「순직자의 늠름한 모습」이 나오는데 후배들에게 큰 교훈이 되는 ‘활약상’을 보인순직한 선배 경찰을 용사라 칭하며 소개하고 있다. 다음으로 종로경찰서 청사와 검도·유도 및 제식 훈련 모습, 경찰관 262명의 출신지와 성명이 기재된 증명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첩에 실린 종로경찰서 직원 262명 중 일본인은 157명, 조선인은 105명인데 조선인 직원은 마지막 순서에 배치하였다.

폭탄 피습을 당한 종로경찰서는 조선 민중에게 독립운동 사찰과 사상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한번 끌려가면 성한 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특히 종로경찰서 내 ‘특별수사대’의 고등계 주임 미와는 범인 탐지뿐만 아니라 온갖 잔인한 고문 수법으로 자백을 받아내고 배후를 실토하게 하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의 고문이 얼마나 잔인했던지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 공판에서 권오설, 강달영, 홍덕유 등이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이들은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피의자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았는데 갖은 폭행과 살인적인 고문을 당해 중상을 입어, 미와 경부를 비롯하여 경부보 요시노 도조(吉野藤藏), 김면규, 순사부장 오모리 히데오(大森秀雄) 등 4명을 폭행능학독직죄(暴行陵虐瀆職罪)로 고소한 것이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최고 공안기관인 종로경찰서의 주요 경찰간부를 고문죄로 고소한 사건이어서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검사국은 어쩔 수 없이 수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건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고문귀들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에 그친 데 반해, 고소인 권오설은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했고, 강달영 역시 고문후유증으로 정신병이 발병해 6년 만기 출옥 후 역시 순국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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