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기고] 민족문제연구소의 품에서 펼쳐 온 보추협 활동 13년을 되돌아보며

2010

0129-45

인터뷰

▲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 민족문제연구소

안녕하세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여러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 대표 이희자입니다. 2017년정유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다 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13년 전을 떠올리며 회원분들께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활동가도 지식인도 아닌 저는 일제의 강제동원에 아버지를 빼앗긴 유족입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하나 찾다보니 그것이 저절로 운동이 되었고, 29년간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활동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 여섯 건을 찾았습니다. 모두 일제가 작성했고, 거기에는 징용 나가실 때 우리 집 주소가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1944년 강화군 송해면을 떠나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전쟁터로 끌려가셨고, 그때 저는 겨우 돌을 갓 지난 나이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해방을 코앞에 둔 1945년 6월 11일 중국 광서성 전현 181 병원에서 전병사(戰病死)하셨습니다. 저는 관련 기록이 2급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있어서 2003년에야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1959년 4월 일본이 아버지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시켰다는 기가 막힌 사실도 2003년 야스쿠니 신사에서 확인했습니다. 아버지의 기록을 하나하나 찾으면서 도대체 왜 일본은 이 사실들을 가족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화가 났습니다. 만약 내가 스스로 나서서 찾지 않았다면 아버지 죽음에 관한 기록은 가족들도 모른 채 역사 속에 묻혀 버렸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고 아직도 분통이 터집니다.

보추협의 설립과 활동

아버지 기록을 찾은 계기로 저는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분들과 유족들과 함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를 설립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사실을 찾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고, 또한 야스쿠니신사에 가족도 모르게 무단 합사된 부모 형제의 이름을 빼내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피해자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서로 연대하고 소통해야 했습니다. 피해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몰랐던 내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2000년 1월 15일 종로 3가 낙원동에 있는 종로오피스텔 505호에 사무실을 얻었습니다. 보추협 사무실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소통의 자리가 되었고 식민지배가 만든 한 맺힌 아픔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전국에서 피해자분들의 사연이 쏟아져 들어와 업무를 처리하기가 벅찰 정도였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겨우 1명의 사무인력으로 하루 종일 바쁘게 업무를 보다 보면 점심 먹는 것도 잊을 때가 허다했습니다. 지방에서 오신 피해자 어르신들의 사연을 듣고 기초 조사서를 작성하는데 반나절이 훌쩍 넘곤 했습니다. 일본기업과 정부를 상대로 한 재판투쟁,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운동, 한일협정 문서공개 100인 소송, 일본 정부기관에 공탁금‧군사우편과 후생연금 확인요청서 보내기 등 할 일이 넘쳐났습니다. 다행히 당시 김은식 사무국장이 순발력 있게 대처해 준 덕분에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운영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이 문제였지요. 원래 재정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워낙 많은 활동을 벌이다 보니 더 이상 사무실 임대료도 내지 못하고 전기, 수도에 이어 전화마저 끊겼습니다. 궂은일을 도맡았던 사무국장마저 더 이상 출근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가 2002년 11월. 달리 대책도 없었지만 저는 보추협을 설립한 책임감과 자존심 때문에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피해자들에게 꼭 필요한 중요한 사업들이었고, 3년간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피해자분들이 가져온 소중한 자료와 서류를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기 때문에 ‘용기’ 하나로 재산을 삼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연구소가 내민 따뜻한 손길

그런 암담한 상황에 빠져있던 2002년 12월 어느 날,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씨가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김은식 사무국장도 사무실에 안 나오는데 혼자 뭘 하고 계세요?” 나는 뜬금없이 “무얼하긴요. 민족문제연구소로 가려고 짐 싸고 있는데요?”라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잠시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기다려 보세요. 다음 주에 회의가 있으니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김민철 씨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날 사무실에는 미쓰이 기업에 징용 가셨다가 한쪽 눈이 실명되신 김윤태 할아버지가 와 계셨습니다. 내가 전화 받는 것을 보시고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다. 열심히 하니까 좋은 일도 생기고 잘 될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웃음짓던 어르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무실에 오셔서 같은 피해자분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시고,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 짜리 한 장을 건네주시던 김윤태 어르신은 지금 다른 피해자분들과 함께 모두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김민철 씨로부터 진짜 전화가 왔습니다. 마침 연구소 송년회가 있던 날 청량리역 근처 다방에서 만났더니 김민철 씨가 “연구소에 책상 두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자료와 컴퓨터만 가지고 오세요. 사무집기는 가져 오셔도 둘 곳이 없어요. 혼자 고생하지 마시고 빨리 오세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삿날이 정해지면 연락하라는 인사를 뒤로 하고 저는 어두운 밤길에 하얀 눈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운명인가, 마음이 통한 것인가, 생각만 품었던 일이 씨앗이 되어 연구소에 오는 인연으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꿈만 같았습니다. 내가 벌여왔던 활동이 이렇게 연결되어 새로운 보금자리를만나는구나 하는 감격을 가슴 깊이 느낀, 잊지 못할 하루였습니다.

이사를 준비하며

다음날 바로 피해자분들과 유족분들, 보추협 임원들에게 연락하여 사무실에 모였습니다. 저는 연구소로 이사 가게 되었다는 기쁜 사실을 알리고, 함께 이삿날을 의논했습니다. 음력 정월을 지나서 손 없는 날을 골랐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2003년 2월 9일, 음력 1월10일로 정했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연구소 상근자들이 출근하지 않아 좋겠다고 결정했죠. 이사하면 반드시 좋은 날 좋은 시에 고사를 지낸다는 원칙도 세웠습니다. 우리는 사무실을 얻어 좋지만 행여나 새로 드는 우리 때문에 연구소에 나쁜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절박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우리가 싸 들고 가는 것은 식민지 역사 속에 한 맺힌 원한의 보따리였고, 꼭 풀어나가야 할 일보따리들이었습니다. 기쁜 만큼 걱정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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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일본제철에 대한 소송에서 대법원의 원고 승소 판결이 내린 직후 열린 향후 계획 발표 기자회견(2012.6.4.) ⓒ 민족문제연구소

2월 9일 이삿날 당일, 보추협 임원들이 오셔서 이삿짐을 날라주었습니다. 금은빌딩 3층에 짐을 올리고 보니 자리는 좁은데 이삿짐이 너무 많아 약간의 틈새라도 있으면 그곳에 억지로 집어넣어 숨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연구소에서 누가 눈치 주는 사람도 없는데 처음에는 매사에 조심스러웠습니다. 어르신들하고 통화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데, 그때마다 전화를 끊고는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당시 연구소도 3층 일부만 쓰고 있을 때라 당연히 보추협 살림살이를 제대로 풀어놓을 공간도 없었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만 찾아서 보추협이 해오던 활동을 차질 없이 이어나갔습니다. 연구소는 민연수 씨도 보추협 간사로 지원해 주었고, 이사 온지 몇 개월 후 김은식 사무국장도 다시 출근해 보추협은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피해자를 위한 운동을 이어가며

연구소로 이사 온 후 꾸준히 진행된 보추협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운동을 벌인 결과, 2004년 2월 13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고, 같은 날 한일협정 외교문서 100인 소송도 일부 승소했습니다. 2000년부터 미쓰비시와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매번 패소했으나,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에서 끝내 원고 승소 판결이라는 기적을 일구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기록 없는 유족들과 함께 기록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고, 가족 품에 돌아오지 않은 유골 조사와 피해자에게 당연히 지급되어야 할 군사우편 저금 조사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야스쿠니 합사 철폐를 위한 재판투쟁과 도쿄 촛불행동도 쉬지 않고 벌여왔습니다.

인터뷰

▲ 2003년 1월 연구소로 이전한 뒤 발전을 기원하며 고사를 드리는 보추협 회원들 ⓒ 민족문제연구소

제가 민족문제연구소에 와서 활동해왔던 모든 사업을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이 모든 활동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뒤에서 힘있게 받쳐 주고 끌어주며 진행해 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회원 여러분들께도 이 자리를 빌어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이사를 왔다고 처음 인사를 올렸던 고사 날이 떠오릅니다. 그때 돌아가신 조문기 이사장님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끼워 주시면서 우리 피해자들을 너무도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진심으로 대해주시는 모습이 너무 고마웠고, 좋았습니다. 고사 지낼 때 썼던 명태와 실은 아직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명태와 실은 그 때 우리가 빌었던 간절한 소망, 절박한 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겁니다. 연구소 덕분으로 우리 보추협은 13년간 꾸준히 활동해오고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이제 우리 유족들도 나이가 들어 많은 활동을 하지는 못하지만 마지막으로 연구소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은 그간의 활동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희망의 손길을

40대 중반에 시작한 활동이 어느덧 70대 중반을 넘었습니다. 길다면 긴 세월 동안 일본을 오고가며 많은 사람과 단체를 만나 왔습니다. 아울러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 전국 각지에 살고 계신 강제동원 피해자분들과 희생자 유족분들을 참으로 많이 만났습니다. 우리 피해자들은 일본에 의해 식민지 역사 속에서 맺어진 부모 형제 자매라는 생각으로 정을 나눠왔습니다. 그러한 관계이기에 부모 없이 살아온 긴 세월 동안 겪은 고달프고 슬펐던 이야기들을 거리낌 없이 서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을 나눴던 분들이 지금은 한 분 한 분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분들이 남긴 진술서나 사진, 유품들만 남았습니다. 그 흔적들은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소중히 간직했던 것이고 그분들의 혼이 담긴 유품입니다. 그분들이 남긴 문서 한 장 한 장은 당사자가 아니면 어디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기록입니다.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으로 까딱하면 얻어지는 그런 자료들이 아닙니다. 부모 형제의 흔적을 찾겠다고 애써 모아온 기록들이 세월이 지난 후 버려지거나 훼손되지 않을까 늘 걱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70년 인생 자체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남긴 잘못된 유산과 상처를 안고 살아 온 역사입니다. 그렇게 살아 온 우리 피해자들이 지금까지 싸우며 활동한 흔적들을 역사 기록으로 남겨서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일본 시민단체의 초청을 받아 일본 각지를 130번 넘게 방문했지만, 여전히 냉정함이 느껴지는 일본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교류했던 수많은 일본 시민들은 저에게 따뜻한 마음과 끈끈한 정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저에게는 희망이자 진실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어 온 인연의 기록을 모아 한일 시민들과 공감하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자료를 보관하고 연구와 전 시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역사를 배우고 피해자들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하고, 한일 시민들이 함께 걸어온 활동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박물관이 만들어진다면 이곳은 또 다른 역사의 새로운 출발지가 될 것입니다.

배움은 짧지만 긴 세월 보추협 활동을 하면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고 일본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느라 노력했습니다. 큰 의미로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였습니다. 슬프고 힘들 때마다 참혹한 현장에서 구사일생 살아오신 생존자 어르신들이 ‘가던 길 멈추지 말고 끝까지 가거라, 그게 너의 숙명이다’라고 하시던 말씀을 되새기며 오늘도 이 길을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정유년 올해 회원분들 가정에 행복과 웃음이 가득하시고,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날개를 활짝 피는 희망의 손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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