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인터뷰]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과 독립운동에 대한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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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박도선생 ⓒ 민족문제연구소

문 : 본인 소개와 더불어 민족문제연구소와 인연을 맺게 된계기는?
답 : 나는 1945년 해방둥이다. 해방 전 해 나의 아버지는 중학생이었다. 할아버지는 외아들이 대동아전쟁 학병으로 끌려갈까 도쿄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아들을 곧장 결혼시켜 그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출생부터 우리 현대사와 맞물렸다. 나는 중학교까지 고향 구미에서 자랐다. 대학교 졸업 후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전방 소총소대장으로 병역을 마친 뒤 곧장 국어교사가 됐다. 2004년 정년을 5년 남긴 채 조기퇴직한 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시민기자 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의 인연은 연구소 전신인 반민족문제연구소부터 시작된다. 당시 김봉우 선생이 소장이었는데, 연구소 소식을 언론으로 가끔 접하면서 인연을 갖고 싶었다. 2002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된 후 당시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을 인터뷰하게 되면서 인연을 갖게되었다. 좀 쑥스러운 얘기지만, 나는 2004년 6월에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발간하여 눈빛출판사에서 인세를 받은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민족정기 선양을 위해 수고하는 연구소 가족들에게 밥을 한 끼 사고 싶어 이곳을 처음 찾게 되었다. 오늘 10여 년 만에 다시 찾아왔는데 옛 모습 그대로다. 연구소 옆에는 그새 교회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는데. 재벌들은 무슨 단체에는 돈을 수십억씩 퍼붓고, 한 승마 선수에게도 수십억 원짜리 말도 그저 사주면서 우리 민족정기를 지켜나가는 연구소는 마냥 외면한다니 고 권중희 선생이 안두희에게 대침을 찔러 응징했듯이 나도 그들을 혼내주고 싶다.

저기 벽에 걸린 임종국 선생님(사진)의 <친일문학론> 등은 나에게 위편삼절(韋編三絶)과 같은 책이고 임 선생님을 오래 전부터 마음속 깊이 존경해왔다.

문 :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선생님의 저서만 대략 39권이다. 최초의 저서는 무엇이며 어떤 내용의 책인지?
답 : 1988년 펴낸 에세이집 <비어있는 자리>로 나의 교단일기와 같다. 곧 이어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라는 장편소설을 펴냈는데 이는 나의 문단 데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해직기자와 비전향 장기수 딸의 아픈 사랑 이야기다. 러브스토리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담겨 있다.

문 : 지금까지 39권의 책을 썼다. 선생님에게 ‘글쓰기’란?
답 : 나에게 글쓰기는 삶의 구원이요, 구도다. <허형식 장군> 머리글에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언급한 바, 선산 구미는 충절의 고장이라고 나에게 은연중에 그런 선비정신을 깨우쳐 주셨다. 그 가르침이 나에게 평생 소명의식으로 각인된 것 같다.

문 : 초기에는 주로 서정적인 에세이 위주였는데 2004년 <지울 수 없는 이미지>(8·15해방에서 한국전쟁 종전까지)에서 처음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었고, 그 후 이 주제에 깊이 천착해 왔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답 : (웃음) 아이러니하게도 고향 선배인 박정희 대통령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장군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함부로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충고하면서, 당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박정희의 만주군 장교 복무 등 전력을 들려주셨다. 그때 나는 멘붕을 일으킬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청년 박정희 교사가 왜 만주에 갔는지, 그 까닭을 알기 위해 장춘에 가서 만주군관학교 옛터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이 모두가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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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열사기념관ⓒ 민족문제연구소

문 : <허형식 장군>을 펴냈다. 허형식 장군을 주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고, 그는 어떤 사람이며, 독립운동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나?
답 : 어린 시절 나의 할아버지는 금오산언저리 고장에는 충절이 많이 났다고 했는데, 왜 현대사는 애국열사가 없는가 하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런 가운데 1999년 여름방학 중 중국 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두루 답사했다. 그때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을 처음 알게 됐다. 그때 동행한 이항증(현 광복회 경북지부장) 선생님으로부터 허형식 장군은 구미 금오산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황홀감을 맛보았다. 그래서 그 이듬해 나 혼자 만주벌판을 헤매며 그분 발자취를 더듬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전에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말도 몰랐다. 만주에 가서 이 말을 듣고, 독립운동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만주의 무장독립투쟁이 1920년 봉오동전쟁, 청산리전쟁 등 눈부신 전과를 올리다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투쟁이 침체하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를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이 메웠는데, 대표적으로 동북항일연군 등이다. 그런데 만주국이 세워진 뒤 1938년부터 일제 관동군 증강과 함께 ‘만주국 치안숙정계획’에 따른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조선인은 중국공산당 명령에 따라 소련 경내로 후퇴시키는 일까지 발생했다. 어찌 보면 만주독립운동의 공백이 발생했는데 그 빈자리를 메운 사람이 바로 허형식 장군이다. 허 장군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명령을 어겨가면서 굳건히 무장투쟁으로 자기 전구(戰區)와 인민을 지켰다. 그분은 소련으로 넘어갔다면 살아남았을텐데, 자기 정체성 고수와 또 다른 외세에 영합치 않고자 소련으로 월경치 않고 순국한 분이다.

허형식 장군은 어떤 이념 때문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중국공산당에 들어갔다. 왜냐하면1930년대 이래 만주지역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 일제의 만주침략에 맞서 중국공산당과 연합해 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후일 만주성위원회에서는 허 장군에게 소련으로 넘어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그분은 고집스럽게 자기의 전구와 인민을 지키고자 북만주에 남아 있다가 1942년 8월 3일 이른 새벽에 장렬히 전사했다. 허 장군은 비밀문건을 적에게 넘기지 않고자 동지를 먼저 피신시키고, 그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며 끝내 자신을 희생했다. 그때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나는 허형식 장군의 마지막 희생에 깊이 감동했다. 그분의 생가 앞마을 출신인 만주군 장교 박정희가 후일 자기 동지를 밀고하고 혼자살아남는데 견주어, 그는 동지를 살리고 자기는 희생하는 길을 택했다. 얼마나 멋있는 인물인가.

문 : 허형식 장군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 한 마디로 중국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 부제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에서 ‘파르티잔’이란 말에 거부감을 갖는 이도 있다고 듣고 있다. 그런 탓인지 주위에서는 2쇄부터는 ‘항일 파르티잔’ 대신에 ‘항일 명장’이라고 바꿔 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고수할 것이다. 책 몇 권 더 팔겠다고 작품의 본질이나 정체성을 바꾸지는 않겠다. 앞으로 허형식 장군은 반드시 새롭게 평가될 것이다. 구미 금오산 기슭에 그분 동상이 우뚝 세워질 날이 그 언젠가 오리라고 나는 믿는다. 아마도 내 생전에는 힘들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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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여름 허형식 장군 희생지 기념비 옆에서 선 박도 선생 ⓒ 민족문제연구소

문 : 실록소설이라고 하지만 사실(팩트)과 사실 사이의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메워야 한다. 더군다나 허형식의 경우 자료가 그리 많지 않아 상상으로 메워야 하는 공간이 더욱 많을 수도 있다. 여담을 들려 달라.
답 : 이 작품 원고를 탈고하고 나서 몇 유명출판사와 접촉했는데, 다들 거절했다. 그 이유는 소설은 팔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소설 대신 차라리 평전을 쓰라고 권했다. 그런데 평전은 ‘사실’에 입각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면 작가가 할 말을 다 못할 것 같았다. 사실 소설이라는 것은 저자가 주인공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매의 성공 여부를 떠나 실록소설로 출판케 되었다. 다행히 사진전문 출판사인 ‘눈빛’에서 내 뜻을 받아줘서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문 :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들꽃>과 비교해 <허형식장군>은 구성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들꽃>이 ‘전기(傳記)’의 성격이 강하다면, <허형식장군>은 대중적 역사서에 가까운 것 같다. 이런 구성의 변화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관련이 있는가?
답 : 실록소설이나 역사소설은 대체로 자료 부족으로 인해 ‘문학적 상상력’으로 빈 공간을 메울 수 밖에 없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많이 고민했다. 자료가 엄청 부족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허은 여사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도 허형식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나온다. 허은 여사의 아드님 이항증 선생의 양해 아래 거기 일부 기록을 가져오고, 다른 자료를 다 합해도 전체 분량은 1/3 정도였다. 이 책이 1,000매인데 나머지 600여 매는 어떻게 썼느냐 하면 내가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허형식 장군과의 러브스토리를 엮었다. 그래서 허형식 집안이 구미 임은동에서 살 때 종을 두었다고 해서, 종의 딸 ‘삼옥’이라는 여인을 창조하여 작품의 흥미와 함께 필연성 등 복선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문 : 요즘 논란이 크게 일고 있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생각은?
답 : 역사는 있는 그대로 가르쳐야 한다. 중고등학교 때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면 그들이 대학에 가서 세상을 접한 후, 어른들에게 속았다고 하며 오히려 더 큰 반발을 산다. 지금도 박정희의 우상화가 지나치다. 솔직히 우리 백성들이 바른 역사관을 가졌다면 박정희 부녀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 없지 않는가?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역사의 진실을 가르치지 않았기때문이다. 역사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은 착각하고 산다. 그 착각은 나중에 더 큰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최근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그 단적인 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하고, 역사적 진실은 숨김없이 다양한 측면에서 가르쳐야 한다.

문 :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혹 집필하고 있거나 기획하고 있다면 들려 달라.
답 : 현재 <용서>라는 장편소설이 마무리단계에 있다. 이 작품은 현재 남북의 지도자 및 백성들은 먼저 자신을 참회하고 상대를 용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야만 통일조국을 이룰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올 상반기에 ‘사진으로 보고 이야기로 듣는 한국전쟁(가제)’을 눈빛출판사에서 펴낼 예정이다. 곧 원고 집필에 들어갈 예정이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한다면 ‘인간 박정희’를 그려보고 싶다. 사실 <허형식 장군>이 잘 써지지 않아 그 작품부터 먼저 쓰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극구 반대했다.

여담이지만 2000년대 초 구미에서 박정희기념관을 세울 때 나는 당시 김관용 구미시장(현 경북지사)에게 편지를 썼다. ‘13도 창의군’ 군사장을 지낸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생가는 폐허가 되어있는데, 이런 분들을 그대로 두고 어찌 박정희기념관을 먼저 세우느냐고. 김 시장은 내 제의를 받아들였는지 다행히 구미에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을 먼저 세웠다.

해방둥이인 나에게 남북분단 극복과 조국통일 문제를 작품화하는 일은 숙명으로 여겨진다. 〈민족사랑〉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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