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vs 국회 : 두 개의 자유당
1950년 5.30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는 이승만에게도,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에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총선의 결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과 무소속 국회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어 다수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도파의 주요 지도자들이 납북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지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원내단체 신정동지회를 중심으로 70명 정도의 국회의원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확보했지만 1951년 초 세상에 드러난 국민방위군사건, 2월의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계속된 실정(失政)으로 그마저도 지키기 힘들어졌다.
1951년 5월 이시영 부통령이 국민방위군사건의 미흡한 대처를 비판하며 사임하자 국회는 민국당의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민국당 소속 부통령의 출현은 이승만의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승만은 거대 여당의 조직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으로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먼저주력한 것은 거대 여당의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원내 지형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키고 1952년에 있을 정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당은 원내와 원외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다. 원외 신당은 이범석의 족청 계열과 국민회 계열 등이 주도했다.
원외 세력은 이승만이 원하는 대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을 만든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그러나 원내의 신당 추진은 이승만의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원내의 신당 추진은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가 통합해 만든 공화민정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공화민정회에서 신당의 조직을 주도한 세력은 소수의 공화구락부 계열이었다.
신정동지회 계열은 다수이긴 했지만 국민방위군사건에 연루되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공화구락부 계열은 신당을 이승만 지지정당으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고, 대통령 중심제보다는 내각책임제를 선호했다.
원외 신당 세력은 수차례의 협상을 통해 원내 신당 세력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양측의 협상은 결렬되었고 12월 23일 두 개의 신당이 탄생했다. 공교롭게도 당명은 둘 다 자유당이었다. 원래 당명을 자유당으로 정한 것은 원내 신당 측이었고, 원외 신당의 명칭은 원래 통일노농당이었다. 노농을 넣은 이유는 지주 자본가의 정당인 민국당과 달리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겠다는 것이고, 통일을 넣은 이유는 통일 없는 휴전은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막상 통일노농당이라고 하자 세간의 비판이 쏟아졌다. 통일노농당이 스탈린의 당이나 히틀러의 당을 연상시킨다는 비판이었다. 원외 신당은 원내 신당의 명칭을 베끼는 것을 택했다. 원내 측의 정당 등록을 방해하고 자신들이 먼저 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공보처에 정당 등록을 한 것이다. 이것이두 개의 자유당이 탄생한 이유였다.
관제 ‘민의’와 두 개의 개헌안
이승만은 거대 여당의 조직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자 10월 중순부터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개헌안의 핵심은 대통령직선제였다.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 현행 헌법 하에서는 재선이 불가능하니 헌법을 고쳐서라도 재선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개헌안에 양원제를 넣은 것은 국회의원들이 개혁을 반대하고 기득권 유지에만 힘쓴다고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1952년 1월 18일 국회에서 이승만 정부가 제출한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결과는 재적 175명중 163명 참석, 가 19표, 부 143표, 기권 1표. 역사상 전무후무할 압도적인 표차의 부결이었다. 개헌안 표결 결과는 이승만에게 절망적이었다. 당시 원외 자유당에 가입한 국회의원의 수는 20여명으로 알려졌는데 딱 그 정도의 국회의원들만 개헌안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이승만 대통령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재선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이 명확해졌다.
개헌안이 부결된 직후 부산 시내 각지에 국회의원의 소환을 주장하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원외자유당과 국민회는 출처를 알 수 없다고 부인했지만 실상은 원외자유당과 국민회, 대한청년단 등 친이승만세력이 조직적으로 동원한 결과였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애국단체’라는 명의를 내세우며 조직적인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민의’ 발동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민의’라면 관변단체들이 돈과 조직, 강제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만들어낸 관제 ‘민의’에 불과할 터였다.
2월 8일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 “유권자들이 국회의원을 잘 감시해 문제가 있으면 경고할 필요성이 있다며, 그래도 안 될 경우 자기 구역 대표를 소환이라도 해서 나라에 위험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는 대법원장 김병로를 출석시켜 국회의원 소환에 관한 법적 견해를 물었다. 김병로는 국회의원 소환은 절차법을 비롯해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승만은 “민주국가에서는 그 나라도 민중이 만든 것이고 헌법도 민중이 만든 것이니 민중이 원하기만 하면 헌법이나 정부나 국회나 무엇이든지 고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회는 110대 49로 호헌결의안을 채택해 “대통령이 민주법치국가의 기본조건인 현행 헌법과 현행 법률을 부인하는 것”이라며 이는 독재정치로 기울어질 우려가 있으니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고 밝혔다.
관제 ‘민의’ 동원으로 대통령과 국회의 대결이 본격화하자 원내자유당과 민국당, 일부 무소속의원들은 4월 17일 국회의원 123명의 서명을 받아 개헌안을 제출했다. 국무총리를 행정부 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5월 14일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다시 제출해 맞불을 놓았다. 두 개의 자유당에 이어 두 개의 개헌안이 맞서는 형국이었다.
관제 ‘민의’의 끝은 계엄령
여당의 조직,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의 제출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세 번째로 꺼내든 카드는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였다. 1951년 10월 조봉암 의원 등이 지방자치 실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내놓을 때만 해도 이승만 정부는 전쟁 중이라 불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12월 초 담화를 통해 1952년 3월에 지방자치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에 따라 1952년 4월 25일 시·읍·면의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5월 10일에는 서울·경기·강원을 제외한 지역에서 도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지방자치 선거의 결과는 원외자유당과 국민회, 대한청년단 등 친이승만세력의 압도적 승리였다. 전쟁 중 치러진 지방의회 선거는 경찰과 관권을 앞세운 이승만정부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지방의회가 구성되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국회에 대한 새로운 압박 수단으로 사용했다. 국회 휴회 기간이라 각 지역에 내려가 있는 국회의원들을 환영대회에 초청해놓고, 실제로는 규탄대회를 여는 방식이었다. 결국 많은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환영’이 아니라 ‘소환 결의’를 당하는 수난을 당했다. 대한민국의 첫 번째 지방자치제도는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을 압박하는 독재의 수단이 되었다. 지방의 압박과 함께 중앙의 관제 ‘민의’ 동원도 극에 달했다. 5월 19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 군중 약 2,000명이 모여 ‘반민족행위 국회의원 성토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군중들은 ‘반민족적인 국회의원 14명을 축출 처단하라’,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국회의원을 선출하라’, ‘소환 결의된 의원을 즉시 국회에서 추방하라’고 주장했다. 이날 대회는 원외자유당이 주도했다. 사실 군중이 이렇게 많이 모인 것도 강제 동원의 결과였다. 애국반 반장을 동원해 집집마다 돌면서 집회에 나가지 않으면 쌀 배급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하고,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시민증을 빼앗아 집회 참여를 강제한 것이었다.
관제 ‘민의’ 집회는 21일과 23일에도 계속되었는데 구호는 ‘처단하라, 총살하라, 자결하라’는 식으로 날로 과격해졌다.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침입을 시도해 경찰과 충돌하고, 지나가는 버스와 전차의 유리창을 깨는 등 점차 폭력화하였다. 시내에는 반민족 국회의원을 타도하라는 백골단 명의의 벽보가 나붙었다. 백골단은 족청계의 양우정과 대한청년단의 문봉제 등이 기획한 것이었다. 국회는 이승만 정부에 폭력사태의 책임을 추궁했지만 정부는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정부의 묵인 속에 5월 24일에도 관제 ‘민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범석이 이끌고 있는 족청계가 급조한 ‘민중자결단’이란 괴단체가 ‘민중자결선포대회’로 명명된 이날 시위를 주도하였고, 수천 명의 군중이 동원되었다. 이날 집회는 국회의원들을 특권계급, 탐욕의 위정자, 월권의 대변자, 부패층으로 규정하고 이를 숙청하기 위해 구국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의 결의 내용이 이승만에게 전달되자 이승만은 “이것이 민의라면 이에 의거하여 행동을 취하겠다”고 화답했다. 이승만의 ‘행동’은 계엄령이었다.
계엄령으로 시작된 부산정치파동
이승만은 5월 25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원용덕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 친위쿠데타의 시작이었다. 이날 계엄이 선포된 것은 미국대사무초가 미국을 방문하느라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무초가 자신의 재임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무초는 장면이 차기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실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원인은 장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국회에서는 선우종원 등이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고 1952년 봄 국회의원 146명의 도장을 받은 상태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국회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25일 밤 20명의 청년이 장면과 관련이 있는 가톨릭 계열의 경향신문사에 침입해 폭력을 휘두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계엄 선포 다음날인 5월 26일 새벽 헌병들은 원내 자유당의 장헌주, 이석기, 민국당의 양병일, 민우회의 장홍염 의원을 체포 연행했다. 그리고 그날 아침 국회의원을 태운 버스를 헌병대로 견인해 국회의원 45명을 구금 취조했다. 이들은 대부분 이튿날 풀려났지만 임흥순, 이용설, 서범석, 김의준 의원은 구속 수감되었다. 계엄령 기간에 헌병대의 국회의원 체포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국회 회기 중의 국회의원 체포는 불법이었지만 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5월 27일 공보처는 구속된 의원들이 국제공산당의 비밀정치공작에 관련되었다고 발표했다. 5월 28일 국회는 96 대 3으로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도 계엄령 해제와 국회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계엄은 해제되지 않았고 국회의원도 풀려나지 않았다. 5월 29일 부통령 김성수는 비상계엄과 국회의원의 체포를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쿠데타’는 멈추지 않았다. 5월 30일과 6월 8일 내무부와 치안국은 대한민국 정부혁신위원회사건을 발표했다. 선우종원이 전 남로당원과 함께 이승만과 이범석을 암살하고 장면을 대통령에 추대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승만은 공공연히 국회 해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회 해산은 헌법에도 없는 초헌법적 발상이었다.
이즈음 국무총리 장택상이 타협안을 꺼냈다. 두 개의 개헌안을 절충한 발췌개헌안을 마련해 정국을 타개하자는 것이었다. 말이 절충이지 정부안인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주요 내용으로하는 대통령중심제에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권 등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곁들이는 방식이었다. 애초에 미국은 이승만 정부로부터 권력을 회수하고 새로운 과도정부를 세우는 계획을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발췌개헌안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다. 사실상 이승만의 ‘쿠데타’를 용인하는 것이었다.
6월에도 관제 ‘민의’ 동원은 계속되었다. 지방의회 의원, 청년단 등 각종 동원단체로 구성된 민의대가 수차례 몰려와 국회를 협박했다. 사복경관대도 관제 ‘민의’ 대열에 합류하여 국회를 포위했다. 일부 의원들은 6월 내내 피신하기 바빴는데, 이갑성 외 60여 명의 원외 자유당 의원들은 국회를 해산하자는 결의안을 내놓고 국회 협박에 동참했다. 한때 20명 정도로 쪼그라들었던 이승만 지지 국회의원은 어느새 6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승만의 압박은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이에 대한 저항도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6월 20일부산 시내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가 열렸다. 민국당 간부들과 이시영, 김창숙 등 독립운동 원로들, 원내자유당, 조선민주당, 대한노총 관계자 등이 참여한 대회였다. 그런데 서상일이 선언서를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괴한들이 난입해 대회장에서 난동을 부렸다. 김창숙과 이동하는 타박상을 입었는데 불법 집회라는 이유로 김창숙 등은 불구속 입건되고 유진산 등은 구속되었다.
6월 21일 발췌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개헌안은 국회에 상정되기 전 30일간 공고해야 했지만 그런 법적 절차는 가볍게 무시되었다. 개헌안이 상정되자 이때부터 발췌개헌안 통과를 위한 총력전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민중 대표’들이 강청하므로 더 이상 국회 해산을 미룰 수 없다며 대놓고 국회를 협박했다. 민국당은 국회가 자유로운 분위기를 확보 할 때까지 개헌안 심의에 응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그러나 민국당의 저항은 6월 25일 의열단 출신의 유시태가 이승만암살미수사건을 일으키면서 사실상 끝났다. 유시태에게 이승만 암살을 교사한 사람은 역시 의열단 출신의 전 민국당 국회의원 김시현이었는데, 경찰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사건 발생 2시간 만에 김시현을 검거하고 다음날 공범으로 서상일, 백남훈 등 민국당 간부들을 지목하여 체포했다.
7월에 들어서면서 발췌개헌안에 대한 국회 심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곧바로 표결로 넘어갔다. 그런데 정작 발췌개헌안을 표결에 붙이자니 의원정족수가 모자랐다. 이제 경찰들은 피신 의원들을 붙잡아 강제로 등원시켜야 했다. 그래도 정족수가 부족하자 7월 3일에는 국제공산당 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의원들을 석방하여 국회로 끌고 와야 했다.
국회는 경찰의 삼엄한 포위 속에 7월 4일 아침을 맞았다. 국회의원들은 화장실에 가는 것도 통제당하는 속에서 발췌개헌안을 표결해야 했다. 재적의원 183명 중 166명이 참석, 그 중 163명의 찬성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협박과 공포 속에 이루어진 표결이었지만 끝까지 이를 거부한 3명의 의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뜻을 거스른 그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우리의 헌법은 폭력과 불법이 난무하는 속에서 처음으로 개정되는 불행한 역사를 갖게 되었다. 이승만은 경찰과 군대, 관변단체와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폭력으로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정권을 연장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과정에서 이승만이 동원한 것이 대통령직선제와 지방자치제도와 같은 민주주의제도였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이러한 제도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개헌 논란이 일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아야 할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