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유관순 열사의 스승 박인덕, 항일·친일·친미를 넘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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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 교육부 국정역사교과서 홍보영상 캡쳐화면 ⓒ 민족문제연구소

 

2016년 12월 28일 교육부는 국민들의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을 내놓았다. 앞서 자신들이 검정 통과시켰던 기존 한국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라 매도하고,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며 수십 억의 홍보비를 들여 대대적인 홍보도 진행했다.

7편의 홍보 영상 중 두 편의 영상 주인공은 유관순 열사이다. 그 첫 영상에서는 기존 교과서에 유관순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초・중등 교과서에는 모두 있다는 비판을 받자,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없다는 내용으로 바꿔 두 번째 영상을 발표했다. 이 영상의 도입부는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다”라고 어느 역사학자가 주장했다는 글로 시작한다. 즉 유관순을 친일파가 영웅으로 만들었기에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집필자들이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초・중등학교에서 이미 다 배운 유관순에 대해 고등학교에서는 세세히 다루지 않고 오히려 3・1운동에 대해 심화학습을 진행하는 것이 교육과정상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위 홍보영상에서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란 주장만은 사실이다. 해방 직후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관순을 대중적으로 알린 데에는 친일파이자 유관순의 스승인 박인덕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친일파 중 유일하게 체포와 투옥

박인덕(朴仁德 1897~1980, 창씨명 永河仁德)은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다닐 때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5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투옥 당시 유관순을 감옥에서 만났고, 해방 직후 이 사실을 이화여자중학교 교장인 신봉조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1978년 미국의 한 라디오 방송 대담에서 박인덕과 신봉조가 나눈 이야기에서 그 자초지종을 확인할 수 있다.

“네…하루는 들으니까 유관순이가 죽었대요. 어떻게 죽었냐니까 만세 날마다 부르다가 저놈들이 때려 죽었대요…목숨을 바쳤다는 거야. 그래 내가 그 후에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내가 선생으로 한국여성의 애국자로 유관순을 나타내겠다 하는 차에 신교장을 그때 만나서 그랬지. (중략) 유관순이는 친히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놈 손에 매맞아 죽었어. 하나밖에 없어. 대단해요 정말, 코리아의 잔다르크구나 생각했어요. 생명을 내놨으니까요. 어린애가. “

열전 친일파

▲ 박인덕은 3.1운동 때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검거된 후 예심에서 면소되어 석방되었다. <매일신보> 1919년 8월 6일, 3면 ⓒ 민족문제연구소

 

이화여중을 중심으로 유관순이 ‘조선의 잔다르크’로 대중에 널리 알려지자, 1947년 9월 사회 저명인사들이 회장과 고문으로 참여한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창립되기에 이른다. 박인덕뿐만 아니라 신봉조 역시 일제강점기에 황도학회회장 등을 역임한 친일파였지만, 이들은 ‘이화인’인 열사 유관순을 발굴하고 알림으로써 자신들의 친일 전력을 감추고 면죄부를 받는 데 활용했으며, 나아가 열사를 현창하는 한 주체로서 새로운 도덕적 권위까지 가지게 되었다. 친일파로 훼절한 스승이 자신을 세상에 알린 사실을 저승에서 지켜봤다면 유관순 열사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신여성

박인덕은 이화학당 재학 시절 이미 유명했다. ‘노래 잘하는 인덕, 말 잘하는 인덕, 잘생긴 인덕’ 이라는 평을 받으며 그 어떤 여성보다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갑작스런 결혼으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대한독립애국부인회 조직에 관여해 두 번째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의 일이었다. 당시 여성 인재들 대부분은 ‘신여성’이라 지칭되며 독신 또는 자유연애를 표방하였고, 기독교계의 이화학당 출신들은 상당수 독신으로 남았다. 그런데 박인덕은 미국 유학의 기회까지 포기하며 결혼했으나 곧 경제적 어려움을 맞았다. 배화여고에 재직하면서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윤덕영의 자택 가정교사까지 하며 가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평소 영어에 대한 관심이 컸던 그는 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결혼과 함께 포기했던 미국 유학의 꿈도 다시 키워나갔다. 1926년 혼자의 몸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다. 유학 중 김마리아・황애시덕 등의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근화회를 조직하며 민족운동을 지속했고, 미국 선교단체의 주선으로 북미대륙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당시 조선의 사정과 조선기독교의 상황 등을 알리는 순회강연을 열성적으로 진행했다. 학업을 모두 마친 1931년에는 영국의 대학, 단체 등의 초청을 받아 순회강연을 했다.

이어 유럽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중동 및 아시아 지역까지 두루 살피고 그해 가을 귀국했다. 박인덕은 귀국과 함께 또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인정되지 않았던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면서까지 이혼을 했다. 이혼 후 그는 다방면으로 사회적 활동을 벌여 나갔다. 최활란・황애시덕과 함께 조선직업부인협회를 결성했고, 농촌여성에 대한 교육 및 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의복개선・생활개선 등을 강조한 강연뿐만 아니라, 당시로는 드물게 요리강습회, 부인운동회 등도 개최했다. 특히 1934년 경성에서 한국최초의 패션쇼를 주도적으로 준비해 개최하기도 했다. 1935년 말 세계기독교대회 참석 초청을 받고 두 번째로 미국에 갔다. 대회 참석 후 미국 각지를 비롯해 멕시코와 캐나다 등지를 돌며 2년여 동안 강연과 여행을 했다. 1937년 귀국한 박인덕은 강연 과정에서 모은 자금으로 김포에 초가 두 채를 구입하고 강습소를 열어 상시적인 농촌부녀교육을 진행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운영이 어려워졌고 1941년에 전면 중단했다.

귀국 후 변화된 상황, 친일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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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덕 작, (New York, Haper & Brothers, 1954). 인덕대학에서 2007년에 <구월 원숭이>(2007)로 번역 발간했으며, 속편 격인 <호랑이 시>(The Hour of the Tiger)도 함께 번역 발간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강습소를 운영하던 시기 박인덕의 활동은 교회 강연을 제외하고는 언론이나 잡지 등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귀국 당시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였고, 곧이어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며 조선에서 전시총동원체제를 구축해 가던 시기였다. 한편으로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황국신민화정책을 펴면서, 조선의 모든 것을 전쟁에 동원했다. 이런 때에 한글교육・생활개선・의복개선 등을 가르치는 교육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기존의 농촌운동 대부분은 이미 총독부가 진행했던 농촌진흥운동에 흡수되거나 중단된 상황이었다. 비록 도미 이전에 여성운동과 농촌운동 분야에서 이화학당 2회 후배인 김활란과 쌍벽을 이룰 정도였다고 하지만, 귀국 후 변화된 조선의 상황은 그의 활동을 크게 제약하며 사회적 입지도 약화시켰다. 특히 조선어 사용이 금지된 사회 상황은 당장의 강연 활동을 제약했다. 그는 일본어 독본 책 한 권을 구입해 일본글을 익히고, 일본인 쓰에(須江愛子)에게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서 그의 활동이 일반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는 시기도 대체로 이즈음인 1938~1939년이었다. 그리고 그의 친일로의 변절도 바로 이즈음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박인덕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쓰에는 녹기연맹(綠旗聯盟) 부설 세이와여숙(淸和女塾)의 강사였다. 녹기연맹은 ‘천황’ 중심의 ‘황도주의(皇道主義)’를 표방한 재조선일본인들의 단체였으나, 중일전쟁 이후 ‘조선어 전폐’를 주장한 현영섭과 같은 극단적인 조선인 내선일체론자들도 대거 입회했다. 세이와여숙은 녹기연맹의 각종 활동 중 하나로 일본인 여성을 ‘황국여성’으로 단련시킬 목적으로 설립한 1년제 학교였다. 쓰에의 권유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박인덕은 1939년 12월 녹기연맹에 가입했다. 2년 여 동안 대외적으로 공식적인 직함이 드러나지 않았던 그가 1940년에는 경성기독교여자청년회(경성YWCA) 부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박인덕의 친일행위가 가시화된 것은 1941년부터이다. 4월에 자신의 사재 10만원을 들여 경성사직정(社稷町)에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하고 숙장(교장)에 취임했다. 결혼하기 직전의 고등보통학교 출신 여성들을 ‘교양있는 주부’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요리・육아・재봉・가사일반을 교과목으로 한 1년제 학교였다. 덕화여숙은 외형적으로 세이와여숙과 거의 유사할 뿐만 아니라 강사도 세이와여숙의 강사가 일부 겸직하고 있어 여러 부분에서 녹기연맹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에서 김포의 강습소를 폐쇄하고 덕화여숙을 설립하게 된 상황을 “일본인들에게 불온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을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고 하여 당시에 마치 일제의 탄압을 받은 듯이 표현하고 있다. 폐교되는 상황 또한 “1944년 12월, 일본의 음모와 단속망이 너무 강하게 압박해와 다른 많은 학교와 함께 나의 학교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이 “동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를 잃어버린 것”이라 하였다.

훌륭한 군국의 여성을 만드는 데 심혼을!

그의 친일 언설을 보면 자서전의 내용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은 금방 드러난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주최한 임전대책대연설회에서 “지금 이때는 반도의 전 여성이 궐기하여 일사보국(一死報國)을 할 정신과 맘을 가지고 길을 찾어 실행하여야만 할, 이미 과거역사에서 차저보지 못한 전무후무한 가장 중한 때입니다.”라고 연설하고 채권가두유격대에 참여해 전시채권을 팔았다. 같은 달,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조직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해 10월에 평의원을, 12월에 부인대 지도위원을 맡았다.

1942년에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성교구 대의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을 맡았다. 각종 강연회, 연설회, 좌담회 등에 참석해 여성의 전쟁협력과 학병 지원 등을 촉구하는 선전・홍보활동에 적극 나섰고, 각종 신문과 잡지에 그 같은 주장을 담은 글 수십 편을 발표했다. 덕화여숙 숙장으로서는 “‘훌륭한 군국(軍國)의 여성’을 만들어내는 것에 심혼(心魂)을 불어넣겠다고 다짐”(<동양지광> 1943년 4월호)했으며, “지난 11월 20일로 특별지원병 지원도 끝막게 되어 우리의 아들과 동생들을 나라에 바치고 나서는, 인제야말로 우리도 정말 황민된 의무를 완전히 다할 수 있어 감격”(<방송지우> 1943년 12월호)이라고 했다.

그런데 박인덕은 그의 자서전에서 “일본 당국은 한국인에게도 천황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영예와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라 우겼다.”라고 하며, 바로 자신이 그 주장을 한국인들에게 강연과 글로 적극 설파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숨기며 오로지 일제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식민지 조선의 여성 지식인 박인덕이 친일행위를 하게 된 요인을 꼽자면, 우선 기독교적 배경하에서 민족주의를 지향했던 그의 활동이 기본적으로 일제에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며 합법적 공간에서의 운동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미국, 유럽 등의 서구문화를 큰 비판 없이 수용했던 그의 태도와도 연결되어, 식민지 조선의 처지와 조선인의 비참한 생활은 더 나은 문명으로 발전하기 위한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여성운동의 차원에서도 열악한 여성의 사회적 상황과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접근 없이 생활개선・정신수양 등을 강조하는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행한 민족운동, 여성운동은 일제가 허용하는 테두리 안, 여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활동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국내에서 주로 활동했던 여성 친일파들이 이미 일정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과 다르게 세계를 돌아다니며 상대적으로 부평초같이 살았던 박인덕에게, 친일행위는 국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일제가 ‘대동아공영’을 말하는 시점에서 자신의 최대 장점인 서구권과의 교류, 또 그 경험에 기반한 활동들은 오히려 자신의 입지를 위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선택’했던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국행, 친일행적은 온데간데없어

열전 친일파

▲ 박인덕 동상(인덕대학교) ⓒ 민족문제연구소

 

해방 직후 많은 친일인사가 그랬듯 박인덕도 우익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반탁과 반공 연사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는 남한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 유학파 출신 인사가 여러 방면에서 중용되는 것과 궤를 같이 했다. 박인덕은 미군정청의 제안으로 1946년 미국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부인대회 한국대표로 참석했고, 1947년에는 미군정청 문화사절로 다시 미국에 갔다. 바로 이 시기 이화여중교장 신봉조에게 제자 유관순과의 옥중 만남을 전한 것이다. 친일파로 단죄받아 마땅한 시점에, 열사 유관순과 같은 옥사에 있었던 독립운동가이자 그를 발굴해 알린스승이 되었다. 미군정청 문화사절 이후 박인덕은 대체로 미국에 체류했다. 반민특위가 활동했던 시기에도 청산해야 할 친일파로 그의 이름이 크게 오르내리지 않았던 이유일 것이다.

1961년 잠시 귀국했을 당시 한 신문에 ‘미국에 건너가 한국 소개에 힘써온’ 유명인사로 소개된 박인덕은 다음해 본인의 이름을 딴 인덕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약 10여 년 후에 현 인덕대학교의 전신인 인덕예술공과전문학교를 세우고 자신의 장녀를 초대 교장에 취임시켰다.

박인덕은 해방 후 친일행위에 대한 아무런 반성 없이 기회주의적 처신을 계속 하다 유명 사립 여자대학교의 설립자, 한국의 대표적 여성 문인, 예술가 등으로 각종 훈포상까지 받으며 우리 사회문화 발전의 주역으로 행세해왔다. 유명 친일인사들이 자신의 공(功)은 선택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과(過)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논리를 강조했던 것과 달리, 박인덕은 반성과 사과는 물론 어떠한 변명조차 하지 않았던 점이 약간 달랐다고나 할까. 그는 친일했던 과거를 철저히 숨김으로써 저명한 여성 교육자의 이미지를 유지한 채 1980년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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