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신사(神社)와 신궁(神宮)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한 때가 있다.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명문 규정은 찾을 수 없으나, 신궁은 대개 메이지시대 이후 ①천황, ②황실의 조선신(祖先神), ③일본평정에 공적이 있는 특정한 신을 제신(祭神)으로 삼는 신사를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개념이라고 알려진다. 그러니까 신궁은 ‘신사 중의 신사’를 가리키는 것이고, 여느 신사와는 격을 훨씬 달리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창립된 신궁은 두 군데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익히 알려진 대로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이 땅을 영구 통치하기 위한 그네들의 수호신이 사는 영역으로 간주되는 곳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백제의 옛 도읍지인 부여 땅에 세우려던 ‘부여신궁(扶餘神宮)’이며, 이곳은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여신궁의 창립과 관련하여 <통보(通報)> 제42호(1939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총독부의 발표문에는 그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때마침 미증유(未曾有)의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반도의 사명은 점점 무거워져 가고, 혼연일체로 대륙전진기지로서의 중대사명달성에 매진할 때를 당하고 있으므로, 총독부로서는 시정(施政)의 전반에 걸쳐 거듭 일단의 비약적 진전을 도모하고자 전력을 경주해 나가겠습니다만, 이럴 경우 서정(庶政) 진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숭고하고도 왕성한 정신력에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바입니다. …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건대 상고시대에 우리나라(일본)와 삼국제국(三國諸國)과의 관계는 대단히 깊었고, 그중에 백제(百濟)와는 서로의 왕래가 빈번하여 정치, 경제 내지는 문화에 있어서 상호의 교섭이 실로 골육(骨肉)보다도 심상치 않았던 점이 있었으니, 그 사이 6대에 걸친 120여 년 간의 왕도(王都)였던 부여 땅은 아름답고도 활짝 핀 내선일체의 구현 결실을 보았던 일대유연(一大由緣)의 땅이었습니다. … 이로써 총독부에서는 기원(紀元) 2,600년을 맞이함에 있어 소화 14년도(1939년도)부터 5개년 계속사업으로 하여, 당시 일본과 백제, 신라, 고려의 관계에 있어 특히 교섭이 깊었던 응신천황(應神天皇), 제명천황(齊明天皇), 천지천황(天智天皇), 신공왕후(神功皇后) 등 4주(柱)의 신들을 권청(勸請)하여 부여 땅에 관폐사(官幣社)의 창립을 앙출(仰出)하여 한편으로는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재장(齋場)으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선일체 강화철저의 정신적 전당으로 삼도록 기약해 나갈 것입니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부소산(扶蘇山) 중턱에 본전 터를 잡아 부여신궁을 창립하는 이외에 부여 전체를 신궁의 위상에 걸맞은 인구 7만 명 규모의 신도(神都)로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1939년 10월 31일에 총독부 고시 제900호로 부여면과 규암면 일대의 1,338만평에 달하는 부여시가지 계획구역을 발표하였다. 애당초 부여는 인구수 1만 4천 명 내외의 면(面) 단위에 불과한 지역으로 이러한 곳에다 대규모 시가지계획을 수립하는 것 자체가 특례 중의 특례였던 셈이다.
이러한 부여신궁의 창립계획은 이른바 ‘근로봉사’라는 미명 하에 무수한 노동력을 동원하고, 심지어 경무국 발파연구소(發破硏究所)를 통한 수차례의 대규모 발파작업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완성을 보지 못한 채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와중에 신도 건설을 위한 시가지조성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새로운 가로망 축조와 택지조성 등은 상당한 진척을 보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지금의 부여 시가지는 부여신궁 조성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부여라는 도시 자체는 속살을 한 꺼풀만 벗겨보더라도 부여신궁의 프레임 속에 여전히 갇혀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부여신궁에 관한 이런저런 자료를 뒤지다 보니, 흥미롭게도 부여신궁과 조선신궁 두 지점을 연결하는 역전경주(驛傳競走, 릴레이마라톤)가 떠들썩하게 벌어진 흔적들도 포착된다. 이름하여 ‘조선신궁‧부여신궁 간 역전경주대회’가 그것으로,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청년단과 조선체육진흥회가 후원한 이 대회는 일제패망기로 접어든 1942년과 1943년 두 해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경주는 한 팀마다 16명의 선수가 참여하여 무려 250킬로미터에 달하는 장거리를 28개 구간으로 나눠 이틀에 걸쳐 주파하는 방식이었으며, 중간기착지인 천안에서는 1박을 하도록 했다.
“황군전첩(皇軍戰捷)을 축복하며 반도청년 체력검사 실시(半島靑年體力檢査實施)를 기념하여 반도청년에게 숭고한 조국정신(肇國精神)을 앙양하고 미영격멸(米英擊滅)의 굳은 신념을 진기약여(振起躍如)케 함으로써 장기전에 대처할 의기와 강인한 체력을 연성함에 이바지하고자 함.”
여기에서 말하는 ‘반도청년 체력검사’는 장차 징병제를 공표할 것에 대비하여 조선총독부가 1942년 3월 1일을 기하여 만 18~19세에 해당하는 조선청년들에 대해 전면적인 신체검사를 실시한 것을 말한다. 요컨대 조선신궁‧부여신궁 간 대역전경주는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수행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었다.
1942년 4월 28일 부여에서 출발한 경기대회는 그 이튿날 조선신궁 참도(參道) 앞에 설치된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경기의 결과 북선지구대(北鮮地區隊: 함남‧함북‧평남‧평북 연합선수단)가 15시간 7분 10초의 기록으로 우승하였다. <매일신보> 1942년 4월 30일자에는 때마침 천장절(天長節)에 맞춰 진행된 이날의 행사 결과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삼천리 산하의 힘과 뜻이 뭉치어 전첩 4월의 양춘을 장식한 본사 주최 미영격멸 및 전첩기원의 부여‧조선신궁 간 대역전경주는 연 이틀 동안에 걸쳐 유서 깊은 성역으로부터 신역까지 250킬로의 성스러운 가도를 철각(鐵脚)과 철각으로 연결하여 총후 남아의 씩씩한 기상 과 늠름한 기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29일 대동아전쟁 하에 처음 맞이하는 뜻 깊은 천장가절의 날씨도 좋은 날을 맞이하여 반도 2천 4백만 민중의 우뢰 같은 환호 속에 대단원을 지었다. … 이리하여 조국의 정신을 높이고 성전완수의 결의를 더욱 굳세게 한 ‘철각의 제전’은 전 국민이 한 마음 한뜻으로 경축하여 마지않는 이날 최후의 결승점인 신역 조선신궁에서 다시금 성은기(聖恩旗)를 우러러보며 전첩기원과 역전경주 종료봉고제를 집행한 다음 폐회식으로써 역사적인 막을 내리었다.”
그리고 이 행사는 그 이듬해에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매일신보사에서는 이 행사가 나름의 반향이 있었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신년호’에 수록된 ‘본사신년도사업계획’을 통해 ‘부여신궁 조선신궁 간 제2회 역전경주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진즉에 공지 한 바 있었다. 실제로 1943년 4월 28일에는 ‘미영격멸과 필승기원’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다시 부여신궁에서 출발하는 역전경주가 개시되었고, 다음날인 4월 29일(천장절)에 조선신궁에 당도하는 일정으로 릴레이마라톤이 이어졌다. 그 결과 16시간 2분 19초의 기록을 세운 황강대(黃江隊: 황해도와 강원도의 연합선수단)가 우승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때의 행사를 마지막으로 역전경주대회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943년 8월에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실시가 확정되자 구태여 이러한 번거로운 행사를 지속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대신에 매일신보사는 1944년 이후에는 입영기일 이전에 각 도청 단위로 ‘입영축하장행회(入營祝賀壯行會)’를 개최하는 일정을 신설하여 연간사업목표의 하나로 포함시켰다. 부여신궁과 조선신궁을 잇는 장거리를 미영격멸을 외치며 달린 역전경주대회. 이 또한 일제가 전쟁수행을 위해 벌인, 참으로 별스러운 소행 가운데 하나였음을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