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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미완의 근대혁명 계보…이번엔 기필코 완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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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역사학자 이이화 신간
19C 민란 초점 맞춘 민중사
”지금은 정조 사후 반동 방불”

민란의시대

 

 

민란의 시대-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지음/한겨레출판·1만5000원

1800년 6월,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는 11살짜리 증손자(순조)의 뒤에서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조선 후기 ‘문예부흥’은 채 피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서구의 근대혁명이 무르익어간 19세기를 조선은 그렇게 맞이했다. “노회한 정순대비는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주로 정조의 개혁을 중단시키거나 방해하는 정책을 폈다. 정순대비를 감싸고 도는 원로대신들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는데 바로 노론 벽파 쪽의 정조 반대세력이었다.”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81) 민족문제연구소 시민역사관건립추진위원장은 정조 사후 경상도 인동과 하동, 황해도 장연과 곡산, 함경도 북청과 단천 등지의 잇따른 민란·소요를 거쳐 1811년 말 홍경래난(관서의 난), 삼남의 농민봉기, 동학 농민전쟁, 그리고 1900년대 초 의병전쟁에 이르는 시기까지 민초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했다면 “나라가 망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민초들의 요구와 정조의 생각이 일치한 건 아니지만, 정조는 당시 조선 사회가 봉착했던 전근대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나름의 개혁을 단행했다. 이이화가 ‘민란의 시대’라고 부른 조선의 19세기는 정순대비 김씨 수렴청정 이후의 안동 김씨, 여흥 민씨 등 문벌세력의 ‘반동’이 없었더라면 전혀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 이이화가 19세기 조선사를 민란에 초점을 맞춰 쓴 <민란의 시대>에서 정리한 정조 개혁의 주요 내용은 서얼 등용 등의 신분제도 타파 내지 완화, 도망 노비 추쇄(推刷, 붙잡아서 원위치 시킴) 금지, 토지제도 개혁, 수령들의 부정부패 처벌, 장위영 설치, 실학파 중시 등이다. “조선에서 제대로 된 왕은 세종과 정조뿐”이라는 그는, 정조 사후 본격화된 문벌세력의 ‘반동’으로 정조의 개혁은 ‘관노비 해방’ 정도를 빼고는 거의 모두 무산됐다고 했다. 1801년에 단행된 관노비 3만7천여명의 해방은 “사실상 정조의 업적”이란다. “당시 관노비 문서는 노비들이 온통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빈 문서나 다름없었고, 추쇄 등 단속 인력도 제대로 동원할 수 없었다. 정조는 그런 현실에 맞춰 신분제를 개혁하려 했고, 정순대비 김씨 등도 그것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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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 이이화. 1월 31일 저녁, 파주 탄현면 헤이리 자택에서

하지만 봉건적 신분제도의 완화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17세기 이후 유럽과 미국의 노예해방, 1861년의 러시아 농노해방에도 견줄 수 있는 조선 후기의 (불완전한) 신분해방은 오히려 조선사회의 모순을 더욱 격화시켰다. “노비들은 신분해방이 되더라도 생존을 위한 자산(토지)이 거의 없었고, 과거 등을 통해 벼슬자리에 나갈 통로도 봉쇄돼 있었으며, 사회적 천대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당시 ‘정감록’ 등의 비기도참서들과 미륵신앙이 유행하고 땡추(당취) 등의 비밀결사들, 명화적 같은 도적 떼들이 급증한 가운데 민란이 더욱 빈발한 것은 삼정(전정·군정·환곡) 문란 등 문벌세력 중심의 지배계급 착취 심화 외에 이런 봉건신분질서 해체에 따라 증가한 ‘양민’들을 부양할 장치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핵심은 토지였다. 조선 봉건체제를 떠받친 2대 지주가 신분제와 지주-전호제를 근간으로 한 토지제도였다.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의 전범이요 민중혁명·사회혁명의 선례로 평가받는 것도 봉건적 신분제와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에 따르면 조선은 문벌세력의 반동이 그것을 막았고, 거기에다 동학농민혁명을 좌절시킨 일본 등 외세가 조선 근대혁명 진행에 결정타를 가했다. 우리는 20세기 중반 일본 패전 뒤에야 토지개혁에 손댈 수 있었다. ‘우리’가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고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온전한 나라꼴을 갖추지 못한 책임은 “먼저 ‘우리’가 져야 하고, 다음은 일본, 그 다음은 미국과 소련이 져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에게 “지금의 ‘촛불 시민혁명’은 이루지 못한 그 근대혁명의 계보를 잇는 것”이며,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완수해야 할 혁명”이다. 그렇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뒤이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는 정조 이후 정순대비와 안동 김씨 등 문벌세력의 반동시기에 비견될 수 있다.

19세기 조선사를 민란에 초점을 맞춰 다룬 역사서는 드물다고 이 위원장은 말했다. 연구에 가장 큰 어려움은 사료 부족이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 간략하게 기술된 내용뿐만 아니라 역모 등과 관련한 중죄인들을 신문한 공소기록인 <추안급국안>, 잡범과 중범죄인 1차 조사 기록인 <포도청등록> 외에 황현의 <오하기문> 등 개인문집들 중의 단편적 기록들을 모아 짜집기해야 했다. 그럴 땐 “축적된 당대 배경지식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1970년대 유신독재 때부터 민중사에 관한 글들을 꾸준히 발표해온 이 위원장은 의병전쟁이 가졌던 유림 중심 ‘척사위정’파 중심의 한계를 비판하고 민란들간의 전국적인 연계성에 주목한 논문들을 90년대에 발표해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번 책은 그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2017-02-02> 한겨레

☞기사원문: “‘촛불’은 미완의 근대혁명 계보…이번엔 기필코 완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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