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6월항쟁의 구심점, 국본 탄생
프레시안 : 6월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조직이 국본, 즉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다. 국본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나.
서중석 : 이제 국본 발족 쪽으로 가자. 1987년 5월 18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 범인 은폐·조작을 폭로하면서 정국이 격동하고, 26일에는 대대적인 개각이 이뤄지면서 안기부장이 장세동에서 안무혁으로 바뀌었다. 그다음 날인 27일, 6월항쟁에서 구심점 역할을 한 국본이 탄생했다.
당시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 이후 호헌 철폐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새로운 투쟁 기구를 조직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호헌 철폐, 민주 쟁취를 위한 공동 투쟁 기구는 부산에서 먼저 조직됐다. 5월 20일 ‘호헌 반대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가 결성됐다. 노무현이 상임집행위원장을, 문재인 등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같은 날 밤 서울에서 각 부문을 대표하는 15명 내외의 실무 대표들이 모였다. 이들은 새 단체의 명칭을 ‘호헌 철폐 및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로 정하고 27일에 발기인 대회, 28일에 결성 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발기인 대회 장소로 몇 군데를 물색한 끝에 향린교회에서 대회를 여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곳으로 정한 건 명동성당, 성공회 대성당, 기독교회관 등에는 모두 경찰이 배치돼 있었는데 놀랍게도 향린교회에는 경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발기인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농민, 여성, 문화 예술, 언론 출판, 노동, 교육, 문인, 청년, 도시 빈민 등 각 부문 대표와 각 지역 대표 그리고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 종교계 대표 및 정치인으로 구성됐다.
이날 발기인 대회에 이어 결성 대회까지 바로 열었다. 본래 28일로 예정돼 있던 결성 대회를 앞당긴 건 정권의 방해 때문에 그때 못 열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7일에 향린교회에서 결성 대회까지 연 것이다. 이렇게 해서 27일에 국본이 탄생하게 된다. 함석헌, 문익환, 윤공희, 김대중, 김영삼 등이 고문으로, 박형규 등이 상임 공동 대표로 선출됐다. 아울러 ‘호헌 철폐 및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라고 하면 이름이 너무 길다는 의견이 결성 대회에서 나와, 단체 명칭을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로 새롭게 확정했다.
국본이 출현함에 따라 그 이전에 조직된 충북, 부산, 전북, 전남, 대구·경북의 조직도 명칭을 조정했다. 그리고 5월 27일 이후 국본 충남본부, 국본 경남본부, 국본 강원본부가 결성됐다. 그렇게 해서 경기도, 제주도, 인천,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 직할시, 도에 모두 지역본부가 결성됐다. 각 지역본부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민통련 산하 지운협(지역운동협의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민과 함께 6·10 대회로 나아간 국본, 또 힘으로 틀어막으려 한 전두환 정권
프레시안 : 6·10 국민 대회 준비, 어떻게 이뤄졌나.
서중석 : 국본 조직 움직임이 한창이던 5월 23일, 재야인사 등이 모여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준비위원회는 6월 10일에 전 국민 규탄 대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5월 27일에 결성된 국본은 이 대회 명칭을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 대회’로 바꿔 예정대로 6월 10일에 치르기로 했다. 시간은 오후 6시로 결정됐다. 6월 10일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전당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6월 5일 국본은 6·10 국민 대회 행동 요강을 발표했다. 행동 요강에는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해 전 국민은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전국의 사찰, 성당, 교회에서는 타종을 하고 국민들은 형편에 따라 만세 삼창을 하든지 그 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함으로써 민주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경찰이 폭력으로 대회 진행을 막으면 전 국민은 비폭력으로 저항하며 연행을 거부하고 연행된 경우에는 묵비권을 행사한다’, ‘전 국민은 오후 9시부터 10분간 소등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 전당 대회에 항의하고 민주 쟁취 의지를 표시할 수 있는 기도, 묵상, 독경 등의 행동을 한다’ 등이 들어 있었다.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6·10 국민 대회를 추진하자 전두환 정권은 이번에도 힘으로 누르려 했다. 경찰은 6월 7일부터 검문검색을 강화했고 8일 밤에는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과 110개 대학을 수색했다. 전국 경찰은 6·10 갑호 비상에 들어갔다. 그뿐 아니라 경적을 울리지 못하도록 경찰은 버스 회사와 택시 회사에 차량 경음기를 떼어내고 기사 교대 시간도 바꾸라고 지시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애국가를 제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후 6시에 내보내던 애국가 옥외 방송도 금지했다. 그런 가운데 6월 9일 국본은 전북 정읍, 충남 청양과 논산, 경남 거창 등지에서 새로 참여해 6월 10일에 전국 22개 지역에서 국민 대회를 치른다고 발표했다.
예년에 비해 조용한 대학가…그러나 시대는 역동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프레시안 : 이 무렵 대학가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1986년 하반기 건대 사태로 상징되는 전두환 정권의 계속된 공세로 학생 운동은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면서 1987년에 들어와서 학생 시위가 적어졌다. 1987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그런 점은 비슷했다. 새 학기에 들어와 학생 시위가 너무 적다 보니까 신문에서 화제 반, 의아심 반으로 학생들의 동태를 취재한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한 신문사 사회부장은 ‘대학가의 새 바람’이라는 박스 기사에서 대학가에 과격 시위가 없고 총학생회가 활성화되고 있으며 대중성 확보에 최우선을 두고 있다고 썼다. 한마디로 시위가 별로 없다, 이런 얘기였다.
4월이 오자, 건대 사태 등으로 대규모 징계를 한 것을 철회하라는 요구가 강하게 나오면서 여러 대학이 학내 문제로 진통을 겪었다. 서울대, 건국대, 서울시립대 같은 서울 지역 대학은 물론 경북대, 경상대, 울산대, 동의대 등 지방대에서도 그런 요구가 있었다. 이러한 학내 분규는 특히 부산대에서 장기간 크게 발생했다. 그렇지만 4·19혁명 기념일에도 전두환 정권이 걱정할 만큼 규모가 큰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4월 19일 4·19 묘소에서 있었던 시위는 다른 해와 비슷했다.
프레시안 :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자신들과 맞서는 학생 세력을 충분히 짓밟아놓았으니 적어도 당분간은 강하게 저항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서중석 : 시대는 역동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두환 정권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1986년경부터 시민 의식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비록 다수는 아니지만 행동하는 시민들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고 있었다. 6월항쟁의 또 하나의 주역이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은 “학교가 조용하면 우리나라는 다 조용해요”라고 3월 19일에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과거와 달리 대학가가 조용해도 민주화 운동은 쉼 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학생 운동이 민주화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정당다운 정당, 시민다운 시민이 없었을 때에나 그렇다. 이제 시대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1987년 4·19 이후 학생회 지도부는 내부 조직을 정비하고 강화하는 데 힘썼다. 6월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서울 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서대협)인데, 5월 8일 18개 대학 학생 대표를 비롯한 학생 2000여 명이 연세대에 모여 서대협 결성식을 열었다. 의장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이인영이었다.
이 무렵 각 대학에서 5월 투쟁이 전개되는데, 5월 투쟁은 5월 14일부터 커졌다. 가장 큰 시위는 광주항쟁 7주년이 되는 1987년 5월 18일,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 은폐·조작 폭로가 이뤄진 바로 그날 일어났다. 이날 전국에서 62개 대학, 2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광주에서는 그 전날인 5월 17일 4차례에 걸쳐 가두시위가 있었고, 18일에는 추모 시위를 하러 거리에 나간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많은 대학에서 광주 학살을 성토하는 행사와 교내 시위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광주항쟁을 계승해 호헌 철폐라는 과제와 결합하는 투쟁이 아직까지는 광범위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총력을 기울여 다시 거리에 나선 학생들
프레시안 :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 은폐·조작 폭로 후 대학가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서대협 쪽의 학생 운동 세력은, 이건 NL계를 가리키는데, 5월 23일에 와서야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 이후 처음으로 총력을 기울여 가두 투쟁에 나섰다. 그전에는 가두 투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5월 23일 민통련이 탑골공원에서 광주민중항쟁 7주년 범국민 민주 영령 추모 대회를 열려 하자 서대협은 여기에 총력을 기울여 참여했다.
이날 학생 1000여 명이 시위 현장에 뛰어들어 연좌로 저항했다. 전부 잡혀갈 각오를 하고 나온 이 학생들은 구호도 “호헌 철폐”, “민주 쟁취”로 통일했다. 돌, 화염병 같은 무기도 일절 지니지 않기로 하고 비폭력 투쟁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비가 내리는 속에서 쇠사슬처럼 단결해 맞섰다. 전경들은 그런 학생들을 한 명씩 떼어내서 연행하기 위해 방패로 학생들의 팔다리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도로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학생들을 응원하면서 전경들에게 “우우우” 야유를 보내는 동시에 거칠게 항의했다. 이날 약 1만 5000명의 경찰이 동원돼 종로 3가 일대를 원천 봉쇄했고, 1284명을 연행해 6명을 구속했다.
대학가 시위는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가 있은 후 1주일이 되는 5월 25일경부터 커졌다. 25일 전국 24개 대학에서 박종철 사건 조작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26일에는 전국 23개 대학에서 교내 시위를 벌였다. 27일 서울대에서는 5000여 명이 모여 박종철 사건 은폐·조작 규탄 대회를 열었는데, 이 가운데 1000여 명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신림 사거리 차도에 뛰어나가, 연행될 때까지 구호를 외쳤다. 이날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를 연 대학은 27개로 늘어났다.
29일에는 전국 29개 대학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날 서울대를 비롯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은 ‘호헌 철폐와 민주 개헌 쟁취를 위한 서울 지역 학생 협의회’, 이게 서학협인데, 이 단체를 조직하고 고문 추방, 호헌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국본 발족 이틀 후에 서울 지역 대학의 특별위원회 또는 투쟁위원회의 연합체로서 서학협이 뜬 것이다. 서학협은 산하에 6·9/10 총궐기 위원회를 두고 6·10 국민 대회를 준비했다. 이들은 6월항쟁 내내 현장 지도를 맡아 각종 전술을 짜냈고,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며 시위 투쟁을 선두에서 이끌어갔다.
6·10 국민 대회에 학생을 결집하고 민주화 운동 세력과 제휴하기 위한 대학 간 연대 틀로 부산에서는 6월 1일 부산 지역 총학생회 협의회(부총협)가 결성됐다. 그렇게 해서 부산 지역에서도 대학 간 연대 투쟁이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축됐던 학생들은 어떻게 거리의 투사로 부활했나
프레시안 : 건대 사태 등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학생 운동이 6월항쟁을 앞두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서중석 : 조용하던 대학가에서 어떻게 학생들이 다시 투쟁력을 갖춰 6월항쟁의 주력군으로 등장할 수 있었느냐. 전두환 정권의 포악한 공세로 대학가에서는 1986년 한 해 동안 연행, 수배, 구속, 고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 후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여성계, 종교계 등에서 거센 항의가 잇따랐다.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에 대해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했는데, 그건 과거에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또 야당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4·13 호헌 조치에 대한 반응도 놀라웠다. 각계각층에서 호헌 반대 성명을 계속 발표하고 단식 투쟁 등이 연이어 일어난 것도 과거에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5·18 폭로로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이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지 않았나. 그 과정을 지켜본 학생들, 그러면서 국본이 결성되고 6·10 국민 대회가 마련되는 것을 지켜본 학생들이 강렬한 민주화 투쟁 의식과 참여 의지를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박종철에 이어 이한열마저…6월 뒤덮은 함성 “한열이를 살려내라”
프레시안 : 그 과정에서 이한열까지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나.
서중석 : 6·10 국민 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빈사 상태에 빠졌다. 그것도 학생들의 가슴을 무겁게 누르며 가열한 투쟁에 나서게 하는 한 축으로 작용했다.
6·10 국민 대회를 앞두고 대학가는 바쁘게 돌아갔다. 우선 6월 1일부터 ‘호헌 철폐와 독재 종식을 위한 단식 농성’이 각 대학에서 진행됐다. 6·10 국민 대회의 열기를 고조시키고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게 하기 위해 서대협 결의로 서대협 소속 13개 대학 총학생회장과 학생회 간부 20여 명이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단식 농성은 계속 확산돼서 6월 4일에는 17개 대학에서 120명이 동참했다.
6월 3일 전국 24개 대학, 5000여 명이 호헌 철폐를 요구하며 교내 시위를 벌였다. 6월 5일에는 각 대학 총학생회장 15명을 포함해 20여 개 대학 학생 700여 명이 고려대에 모여 6·10 국민 대회 참가 대책을 논의했다.
대회 전날인 9일 서울, 부산 등 대학가 곳곳에서 6·10 국민 대회 참가 결의 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날 열린 결의 대회에서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중태에 빠졌다. 이것은 6월항쟁 기간 내내 투쟁의 불꽃을 계속 지피는 원천으로 작용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한열이 사경을 헤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거리에 나섰다. 시위 대열에서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가 계속 터져 나왔다.
이한열이 입원한 세브란스병원에 찾아온 민중 화가 최병수는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학생들과 함께 판화로 제작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라고 새긴 유명한 판화다. 그리고 가로 7.5미터, 세로 10미터에 이르는 최병수의 대형 걸개그림은 학생들에게 슬픔과 분노를 일으키며 투지를 북돋웠다. 이한열 판화는 그해 6월과 그 이후 시위 투쟁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체 게바라의 사진과 그림처럼 학생들과 민중의 가슴속에 오래오래 살아 있었다. (이한열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수많은 사람이 간절히 기원했다. 안타깝게도 그해 7월 5일 이한열은 끝내 세상을 떠났다. 시민들은 7월 9일에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2017-02-12> 프레시안
☞기사원문: 또 학생 죽인 전두환 정권, 투사로 부활한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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