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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정기 회복을 위한 역사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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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자주 정기회복을 위한 역사 탐색

 

지금 우리는 우리의 민족 역사를 어떻게 기록해왔으며 또한 어떻게 인식하여왔는가 하는 물음을 전제하면서, 항상 역사는 이긴 자의 편에 서서 쓰이고 기득권에 의하여 해석되어 왔다. 그렇게 쓰이고 해석되고, 인식되어진 역사가 한민족 국가의 존엄을 짓밟고 역론(逆論)이 사실과 진실로 왜곡되고 훼손되어진 채 오랜 세월을 수수방관하여 왔다. 실로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다. 필자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어느 부분에서도 석학이 아니다. 다만, 민족주의자로서 자부심과 함께 민족 역사를 관통해보고자 애써왔으며 그런 연유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어떤 사상도, 이론도, 항상 적부와 반합이 교차하고 긍정과 부정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역사인식 또한 이와 같으리라. 그러나 막상 우리가 우리를 모른 채 지난 과거 역사를 적힌 대로 배우고 인식하게 되면 역사를 배워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어진다. 또한 인정과 긍정만으로 인식한 역사는 이미 생물이 아니고 사망선고를 내린 재상 불가능한 불필요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실과 현상에 대하여 현상학적으로 접근하여 탐색하고 고증을 거쳐 나타나고 들어난 현상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 사실들을 들춰내고 찾아내어야 한다. 그것이 한민족국가의 정체성과 정신세계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더 그러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당위성에 근거를 두고 우리 배달민족 역사 속에서 큰 전환점이 된 신라 삼국통일역사로부터 추적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나아가 민족정기를 되살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우선, “나당 연합군에 의한 신라의 삼국통일”, 무언가 석연치 않다. 삼국통일의 주체가 신라인가 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문맥과 표현에서 무언가 뭉뚱그려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당시의 역사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기록을 살펴보면 당()에 앞선 수()나라는 서기 581양견”(수의 문제)에 의해 건국되고 양제”, “공제를 더한 338년 서기 618년에 망한 나라다. 여기에 등장하는 수나라 2대 황제 양제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고구려를 복속시키고자 수없이 대군을 휘몰아 침탈의 전쟁을 일으켰던 인물이며 결국 고구려의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130만 대군을 이끌고 결전을 벌였으나 고구려 군에게 철저히 괴멸되어 그 130만 대군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27,8백 명에 불과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수나라 호족이었던 이연(李淵)이 쇄락한 수의 양제를 폐위시키고 양제의 아들 공제를 황제로 세웠다가 그 다음 해인 서기 618년 양제를 독살하고 공제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아 ()”을 세우니 그가 당() 1고조”(이연,李淵)이다. 그 후 당고조의 둘째 아들 이세민이 서기 626년에 현무문 변란을 일으켜 수많은 정적들을 숙청하고 그 아비 고조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아 황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당() 2대 태종(이세민)이다.

그 때의 신라는 27대 선덕여왕, 28대 진덕여왕 시절이었다. 이 때 신라에서도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니 이가 바로 김춘추”(훗날 서기 645년에 중망에 의해 29대 신라왕이 되고 후일 태종무열왕이란 시호가 내려진다)란 인물이다. 김춘추는 신라의 귀족으로써 선덕, 진덕 두 여왕을 잘 보필하였고 특히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사신이 되어 당나라를 드나들며 당시 이세민, 즉 당태종과 긴밀한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서기 640년을 전후하여 당태종과 김춘추는 양국 간의 밀약을 맺으니 그 내용은 신라와 당나라가 동맹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쳐서 멸망시키기로 하고 그 대가로 은 고구려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지배하에 영토로 인정한다는 내용 이였다. 그 때 나당의 밀약이 맺어지고 한, 두 해 후인 서기 642년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백제의 30무왕을 찾아가, 백제, 신라, 고구려가 동맹을 맺어 을 치자고 제의하니, 백제의 무왕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연개소문은 신라의 김춘추를 찾아가 백제와의 약속을 말하고 삼국 동맹을 제의하나, 김춘추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왜 거절했을까? 그 거절은 앞에서 논거한 바와 같이 이미 맺어진 나당 동맹 밀약에서 그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김춘추는 이미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오랜 전투로 국력이 극도로 쇄락하여 있었음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또 산술적 계산과 현실 상황의 판단으로도 삼국동맹보다는 신흥대국과 손잡는 것이 훨씬 유리하리라는 인식적 판단이 있었으리라. 그 후 불과 3년 뒤 서기 645년 김춘추는 신라 28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중망에 의해 신라 29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나는 그 때 나당의 밀약을 두고 근대판 테프트카스라밀약(서기 1905년에 체결된 미국, 일본 간의 비밀 협약: 그 주 내용은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데 양국이 적극 협조한다는 것이었다)과 유사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 때 나, 당은 현실 상황이 여의치 못하여 밀약을 뒤로 미루어 오다 서기 661년에 비로써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끄는 대군과 신라장수 김유신이 이끄는 나당 동맹 연합군이 백제를 쳐 멸망시킨다. 그 서기 661년에는 공교롭게도 나당 비밀 동맹의 당사자였던 당태종(이세민)과 신라태종 무열왕(김춘추)이 같은 해 사망하고 다 같이 그 보위를 자식들에게 넘기게 된다. 그리고 7년 뒤, 서기 668년 당3대 고종(이치)의 명을 받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끄는 대군과 신라 30대 문무왕의 동맹군이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우리 민족 역사에 큰 이름이 새겨졌다. 그러나 당고종은 그 아비와 신라와의 밀약을 이행하지 않는다. 즉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돌려주기는커녕 백제의 멸망 후 백제 땅에 공주 도독부 등 아홉 곳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하였고, 백제 땅 전부를 그들의 영토로 지배하였으며, 따라서 고구려 멸망 후에도 안동도독부 등 아홉 곳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이 또한 군정실시와 더불어 고구려 옛 땅을 의 영토로 편입시켰으며 심지어 동맹국 이였던 신라의 서울 계림(지금의 경주)에까지 도독부를 설치하려 들었다. 이에 참고 참았던 신라의 30대 문무왕은 서기 675내소성에서 당군과 일전을 치르게 되었고 이 전투에서 당군은 대패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부황인 당태종 이세민과 신라의 김춘추와 맺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

당시의 그 역사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그 때 그 역사의 현장은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였다. 백제의 멸망 후 백제 땅에서 백제 복국 운동이 일어났고, 또한 고구려 땅에서도 고구려 복국 운동이 일어났으며, 한편으로는 고구려 장수였던 대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백두산 이북에서 발해라는 나를 세워 을 몰아세워 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형국이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약속을 어긴 을 행해 신라의 문무왕은 기왕의 동맹을 깨고 전쟁을 일으켜 당과의 대전을 치르게 되었고 이 전쟁에서 신라는 당군에게 크게 이겨 당군을 패퇴시킴과 동시에 비로소 대동강 이남의 땅을 지배하게 되었다. 밀약의 이행 없이 8년이 지나서야 실력으로 이룬 성과이기에 더욱 값진 역사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약속이란 힘의 균형이 존재할 때 가능한 것이며 그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지켜지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그 후 신라는 흥성기를 맞았고 불교를 숭상하여 수많은 사찰을 지어 불교 중흥에 힘쓰며 불교를 국교로 정하기도 하였다. 이 때 건립한 사찰 중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기리기 위하여 정방사도 짓고 내소사도 짓고 천연기념물에다 정방폭포라 이름 짓고 하였으니 이 또한 오늘날 미국의 맥아더장군을 기리기 위해 맥아더 동상을 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같은 맥락의 인식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쓰고자 하는 내용의 서론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그 때 그 역사적 사실과 상황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리기 위하여 망원경과 현미경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본론의 탐색을 위하여 역사의 고증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 또한 허구와 날조가 될 위험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론은 앞에서 살핀 바 있는 역사적 사실과 현상에 대하여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밖으로 들어나 있지 않는 진실의 여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현상학적으로 탐색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 때 그 역사 신라의 삼국통일로 태동된 민족대통합이라는 긍정적 일면과 함께 또 하나의 민족 역사의 굴절된 사실 앞에서 아연해지고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낀다.

우리 배달민족의 상고사 어느 곳에서도 사대의존(事大依存)의 역사기록은 없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대전환점부터 태동한 사대의존 사상은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국가 우리 민족 모두의 심장에 독혈(毒血)이 되어 장장 1348여년을 우리를 지배하며 흐르고 있다. 슬프다. 일찍부터 동북아의 맹주로써 용맹하고 웅위했던 민족정기는 사라지고 말았으니 그 애석함과 슬픔을 어찌 말로다 형언할 수 있으랴. 이것이 중국대륙(중국이라는 국호는 일찍이 어떤 기록에도 없다. 중국이라는 국가의 등장은 서기 1920년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중화민국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정부 중화인민공화국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공합작을 하게 된다. 이 때 비로소 중화, 중국이라는 현대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다)을 향한 사대주의 이존주의 모화사상의 뿌리를 내리는 기초가 되고 만다. 이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우리 민족에겐 우리 스스로를 내팽개치는 자주민족으로서 비탄의 졸곡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날 이후로 신라에 이어 고려”, “조선” 3대 왕조가 이 땅에 존재하였지만 저 넓은 대륙에는 으로부터 “510”, “대송”, “북송”, “남송”, “요금”, “서하”, “몽고제국”, “”, “”, “남명”, “후금”, “등 수많은 황조가 등장하였고 그 나라의 국호가 무엇이든 그 지배세력이 누구였든 우리나라 우리민족은 변방으로 밀려난 채로 큰 것을 섬기고 따르는 의존의 역사가 계속되었고 우리는 제후의 나라, 신민의 나라, 봉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따라서 민족의 자주도 자존도 포기 또는 망각한 채 부끄러운 나라, 부끄러운 민족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서기 1894, 1895년 양년에 우리나라 내부의 동학혁명나라와 일본제국이 서로 진압의 주도권을 잡고자 다투다 ”,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그 전쟁은 일본이 승리하는 모양새로 화의하였고 청국은 그 동안 조선의 지배국으로써의 역할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그 때 비로소 조선은 대륙으로부터 독립하였다하여 그 기념으로 서기 1898독립문을 세웠으나 청일전쟁의 진정한 의미는 조선의 종주권 다툼 이였으니 그 때 세워진 독립문의 진정한 의미 또한 되새김해야하며, 우리 모두는 독립문이 세워진 뒷켠에서 침략주의자 대일본제국의 부추김과 비웃음과 비아냥과 함께 흐뭇하게 만족의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들의 속내를 간과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청일전쟁 그 자체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 쟁탈전이었고 그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때부터이며, 우리 조선의 종주로써 행세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이어 일본식민지 36년 미군정 3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만 68년이 지난 지금 과연 대한민국은 자주독립 국가인가에 대하여 반문하고 있으며, 나의 이성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고 지금도 우리는 섬기는 대상은 바뀌었지만, 사대의존 세력에 매달린 신 식민시대에 살고 있다고 통절히 외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남북문제 6자회담의 본질 하나만 살피더라도 명확히 들어난다. 저 패악한 3대 세습왕조 김 씨네 파시스트 집단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험한 저들만을 바라보고 상대하고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자유는 물론 고혈을 빨려 뼈마디가 앙상한 8할의 민중 2천만 민족 동포는 외면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까지 북한 스스로 붕괴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또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의 남북문제를 우리가 아닌 6자회담 4대 강국이 해결해주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왜 우리는 우리의 민족문제를 우리 스스로 풀어내고 해결하기 위하여 당사자끼리 만나고 해결을 위한 고민과 노력을 하지 않는가? 한 걸음 한 발짝 다가가서 그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하여 그 결과물을 주변의 4대 강국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물론 남북이 각기 추구하는 바도 다르고 이념적으로도 판이하기에 그 결과를 가시적으로 얻어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문제를 스스로의 노력도 없이 세월만 흘러 보낸다면 주변의 4대 강국이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하여 그들이 그들의 보루를 스스로 우리에게 내어줄 것인가.

4대 강국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6자 회담을 하고 있으며, 4대 강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의 통일이야말로 결단코 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바로 4대 강국의 최전방 전쟁보루 즉 전쟁기지를 잃는 것이요, 그 최전방 기지가 사라진다 함은 그들 국경이 최전방 기지로 벼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 북한이 통일되어 화합하게 되면 그들에겐 또 하나의 강력한 적(?)을 만드는 것이 되고 매서운 경쟁상대를 키우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 4대 강국은 무슨 꼬투리를 잡던 우리의 통일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고 또한 그들은 우리민족이 자주가 없는 의존의 울타리 안에서 천수백년을 살아온 생태적 리듬을 우리들 보다 객관적으로 더욱더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론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신라삼국통일 역사는 민족통일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민족자주정신의 상실과 함께 모화사상(慕華思想), 사대주의의 의존적 생태를 생성(生成)시킨 모태가 되었다는 크나큰 민족역사의 오류를 저질렀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선택해야할 명제는 수없이 많겠지만 오직 큰 하나, 우리 스스로 반성과 함께 민족자주정신회복이며, 함께 자주주권국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재론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들 역사는 그 날로부터 줄 곧 사대의존 세력들의 탐욕의 쟁탈 속에서 날 새는 줄 몰랐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제도를 만들어서 신분의 세습 속에 지식 집권층은 국가, 민족, 백성을 오로지 그들의 탐욕의 도구로만 부려왔었다. 집권세력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는 지식층은 신분만이라도 지키려고 인의(仁義)조차 외면하였고 7할이 넘는 배운 바 없는 피지배계급들은 오직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지쳐있었다. 또한 수구, 사대의존 세력들은 그들의 아성을 지키기 위하여 억압과 협박과 세뇌(洗腦)와 사육(飼育)을 통하여 백성을 길들여 왔으니 온전한 민족정신이 살아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할까. 해방이라고 하는 역사적 현실 이후 새로운 국민주권시대가 도래하면서 민초들이 그 동안 전해보지 못한 지식과 학문을 통하여 정사(正邪)를 구분하는 지성을 갖추기 시작했고 여기에 계속되는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정당하지 않는 것에 항거할 줄 아는 용기를 배웠으니 이 변화된 국민의 성숙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걸아가야 할 미래지향적 동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실존하고 있는 하늘 높이 쳐놓은 이념의 그물망과 편가르기 또, 오래된 폐습, 정상모리배(政商謀利輩)들의 할거가 오늘날의 정경유착으로 국가경제는 물론 국민 모두에게 위화감을 부추기고 있는 등, 세계가 본 부패공화국 1위에다가 빈부격차 1위국으로 치부되고 있음을 보면서 낭패감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또한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권력은 국민을 외면한 채 국민의 소리는 듣지 않고 패거리 중심의 길을 가고 있으며 스스로 강해지고자 하는 의식도 노력도 없이 강국들의 눈치보기와 의존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에 통분을 금할 길 없다.

이제 이 현실 속에서 앞에서 언급한 당면한 명제 민주자주정신의 회복위에서 세상을 볼 때 그간 우리가 보아왔던 가치관과 인식이 많이 달라보이리라.

이렇게 현시적(顯示的)이고 현상적으로 보이는 것에 머물지 않고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사실 진면목을 접할 때 우리 스스로의 나아갈 길, 희망의 길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역사는 보는 이에 따라 과거의 그림자가 아닌 살아 숨쉬는 현실로 조명되어 우리들에게 다가와서 우리들에게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촉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제 큰 것을 섬기고 따르는 습성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지키고 새로운 기획과 도전을 통하여 자강을 향해 나아간다면 비록 국토는 좁으나 강소국(强小國)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며 그렇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국방, 복지 등 모든 분야에서 강국이 된다면 세계 어느 세력이든 4대 강국도 함부로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강소국이 된 후에라야 비로소 나라도 겨레도 희망찬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모두는 한 점 미심쩍은 것 없이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는 물론 우리 후손들에게도 밝은 미래를 고스란히 넘겨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민족자주정신의 회복강소국으로 가는 길은 오직 우리 주권자 국민 모두의 선택으로만 가능한 것이라고 감히 단언하며 우리 민족국가 구성원인 국민 모두에게 옳은 선택, 바른 선택, 그리고 옳치 않은 것에 항거하는 용기를 빌고 바라며 엎드려 간곡히 탄원을 올린다.

 

단기 4349103일 개천절 날

겨울풀 최 영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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