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 속에 귀국한 여류 혁명가
이역만리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투사로서 장군 칭호를 받은 이들이 드물지는 않다. 그런데 그중 이채롭게도 ‘여장군’ 칭호를 얻은 이가 있으니 바로 해방 당시 38세 한창 나이였던 여장부 김명시(金命時)이다. 김명시는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 혐의로 7년간 복역한 뒤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 직전까지 무정 장군 직속하의 조선의용군에 소속되어 최전방에서 여성 부대원을 이끌고 선전선동과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2월 중순 서울에 개선한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현황을 설명하고 “조선사람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하여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며 자주독립을 위한 좌우 협력을 강조하였다. 이 기자회견 내용은 <중앙신문><독립신보><동아일보>와샌프란시스코에서간행되던 <국민보>에까지 실려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여장군 김명시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우익신문이던 <동아일보>가 김명시를 조선의‘잔다르크’로까지 치켜세운것은 당시 그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가늠케 한다.
<독립신보>1946년11월21일자에는「여류혁명가를찾아서⑦ 20년간투쟁생활,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 김명시 여사편」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다. 유영준(劉英俊), 정칠성(丁七星), 박진홍(朴鎭洪), 유금봉(劉金鳳), 허하백(許河伯), 조원숙(趙元淑)에 이어서 여류혁명가로서 7번째로 인터뷰한 것이다. 약간 길지만 김명시의 항일 이력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모두 옮겨 싣는다.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투쟁하신 이야기를 좀 들을까요”하고 물으니
“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억뿐입니다.”
이런 겸사의 말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민주과업이 착란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있는 오늘의 남조선을 통분히 여겨 마지않는 여사로서는 앞만 바라보는 타는 듯한 정열이 오히려 지난 일을 이렇게 과소평가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1925년에 공산대학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7년도에 파견되어 상해로 와보니 장개석 씨의 쿠데타가 벌어져서 거리마다 공산주의자 시체가 누었더군요. 거기서 대만, 중국, 일본, 비율빈(필리핀), 몽고, 안남(베트남), 인도 등지 각국 사람들이 모여서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反帝者)동맹을 조직하고 또 그 이면에서는 중공 한인특별지부 일도 보게 되었습니다. 28년에 무정(武丁) 장군을 강서(江西)로 떠나보내고 그 다음해 홍남표(洪南杓) 씨와 만주에 들어가자 반제자동맹을 조직했습니다. 그때 마침 동만폭동(東滿폭동: 1930년 5월부터 수개월간 지속된 간도지역 반일폭동을 말함)이 일어나서 우리는 하얼빈(哈爾濱) 일본영사관을 치러 갔습니다. 그 다음 걸어서 흑룡강을 넘어 치치하얼(齊齊哈爾)을 거쳐 천진, 상해로 가던 때의 고생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합니다. 상해에 가서 김단야(金丹冶) ‧ 박헌영(朴憲永) 제씨가 와계시더군요. 그 다음 나는 인천으로 와서 동무들과 <콤뮤니스트><태평양노조>등비밀기관지를 발행하다가 메이데이날(5월 1일 노동절) 동지들이 체포당하는 판에 도보로 신의주까지 도망을 갔었는데 동지 중에 배신자가 생겨서 체포되어 7년 징역을 살았습니다. 스물다섯 살에서 서른두 살까지 나의 젊음이란 완전히 옥중에서 보낸 셈이죠.”
▲ 김명시 인터뷰기사. 신천지 1946.3.
그 다음 연안독립동맹(화북조선독립동맹)에 들어가서 천진, 북경 등 적지구(敵地區)에서 싸우던 눈물겨운 이야기, 그 중에 임신중에 체포되어 배를 맞아 유산하던 이야기, 밤에 수심도 넓이도 모르는 강물을 허덕이며 건너가던 이야기 등은 소설이기엔 너무도 심각하다.
싸움이란, 혁명에 앞장서 싸우는 것이란 진실로 저렇게 비참하고도 신명나는 일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일어나서 나왔다.
또한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하던 잡지 <신천지>1946년 3월호는 3‧1운동과 독립동맹 즉 화북조선독립동맹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활약상을 살피고 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 선생과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장군과 김명시의 항일투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팔로군에 종군했던 김명시 여장군의 반생기」를 쓴 이는 당시 서울신문사 기자였던 노천명이다. 일제 치하 친일단체 조선문인협회와 임전보국단 부인대 간사를 지냈고 「싱가폴 함락」 「진혼가」 「승전의 날」 「부인근로대」 등 친일 작품과 강연으로 일제 전시체제에 적극 협력했던 그가 해방된 지 1년도 안 지난 시점에서 뻔뻔하게도 조선의용군 여장군을 칭송하는 글을 썼던 것이다.
반제 항일에 바친 청춘
김명시는 190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마산 사회주의운동의 맹주인 오빠 김형선(金炯善. 1904~1950), 남동생 김형윤(金炯潤, 1909~?, 마산 적색노조운동가), 여동생 김복수(金福壽)와 함께 자랐다. 1924년 3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오빠의 권유로 서울로 유학하여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중퇴하였다.
1925년 7월 김형선이 가입해 있던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가 마산 제1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뽑혀 소련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다가 1년 반 만인 1927년에 중퇴하고 상해로 파견되었다. 당시 상해 시내는 장개석의 반공 쿠데타로 인해 학살당한 젊은이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이런 살풍경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책임자인 홍남표 ‧ 조봉암과 함께 김명시는 중국공산당 상해 한인특별지부를 결성하고,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 식민지 동양 각국의 운동가를 조직해 ‘동방피압박민족 반제자동맹’을 조직하였다. 1929년 겨울부터 홍남표와 함께 만주로 가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지침에 따라 조선인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고 현지 중공 한인지부를 건설하는데 힘쓴다. 또 현해구에서는 ‘재만조선인 반일제국주의대동맹’을 조직하고 기관지인 <반일전선>을제작하였고, 아성현에서는 아성현위원회 간부로 활약한다. 특히 1930년 5월 이립삼(李立三)의 좌경주의 노선에 따라 대규모 폭동을 준비하여, 5월 30일 자정 300여 명의 조선인 무장대가 하얼빈 시내의 기차역과 경찰서, 일본영사관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적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간신히 상해에 도착한 김명시와 홍남표는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과 함께 기관지 <꼼무니스트>제작 등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착수한다.
1932년 3월 귀국한 김명시는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상해에서 보내온 <꼼무니스트>와지하신문 <태평양노조>등을등사하여비밀리에배포하고인천지역공장의여성노동자들을교육하였다. 이때 오빠 김형선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총책을 맡아 <꼼무니스트>배포선을매개로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만에 재건조직이 발각되어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피하려 했으나 1932년 5월 동지의 배신으로 신의주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조봉암, 홍남표 등 주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도 같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은 김명시에게 징역 6년을 언도하였다.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한 뒤 앞서 언급한 대로 만주로 건너가 화북조선연맹의 천진 책임자, 조선의용군 여자부대 지휘관으로서 적후(敵後)공작을 전개했던 것이다. 국내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총책이었던 김형선은 1933년 7월 영등포에서 체포되었고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아 8‧15 해방이 되어서야 출감할 수 있었다.
투쟁의 끝 – 자살?
해방 후 조선독립동맹 주요 간부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여 평양에서 활동했다.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과 박일우 허정숙 등은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고, 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과 부주석 최창익, 한빈 등은 1946년 2월 기존 조직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했다. 조선신민당 당수가 된 김두봉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는 등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들과는 달리 김명시는 오빠 김형선과 박헌영, 홍남표 등 화요계가 활동하고 있는 서울로 왔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김명시는 ‘백마 탄 여장군’으로 언론의 칭송과 주목을 받는 동시에 항일 여전사의 긍지를 갖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전국부녀총동맹결성대회에서 김명시는 「연안 기타 해외 해내의 여성운동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강연하였고, 조선부녀총동맹의 선전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 조선국군준비대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1946년 3월 8일 국제부인일을 기념하여 조선부녀총동맹 주최로 축하식을 거행하였는데 이에 참석하여 국제부인일의 의미에 대해 강연하였으며,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 기념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1947년 6월에는 전라도에서 발생한 우익테러사건에 관련해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조사단원으로 참여했고, 그달 28일에는 민전 산하단체에서 군정청을 방문, 하지 중장에게 반탁시위 항의서를 제출하였는데 이때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13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좌익의 ‘8‧15폭동음모사건’ 진상을 발표하고 좌익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였다. 이에 대해 서울지검은 관련자 28명에 대해 불기소 ‧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는데 김명시가 기소중지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1948년 8월 한국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은 좌익 숙청작업에 온힘을 쏟았고, 이에 반발해 좌익은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등으로 대응하였다. 남한 사회 곳곳에서 이데올로기로 인해 유혈사태가 벌어지던 야만과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이 무렵 지하로 잠적한 김명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가 1949년 10월 11일 도하 일간지 2면 한 귀퉁이에서 실린 작은 기사로 그의 마지막 소식을 전하게 된다. <자유신문><동아일보><경향신문>등은 「북로당 간부 김명시, 부평서 유치장서 목매 자살」이란 제목으로 그의 최후를 간략히 전하고 있다. <경향신문>10월14일자에는김효석(金孝錫)내무장관이“지난10일오전5시40분경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에 있는 약 3척 높이 되는 수도관에 목을 매고 죽었다”고 발표해 그의 자살을 재차 확인해 주고 있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물론 경찰에 의한 고문치사인지 자살인지 사인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자료가 없으나, 그 당시 분위기를 미루어볼 때 자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9살의 나이에 민족해방운동에 뛰어들어 24년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의연하게 견디어 냈던 그를 자살로 몰아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문에 의한 자백이나 기밀 누설의 두려움 때문이었을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동족 간에 자행되는 비인간적인 행위들로 인한 자괴감이 더 컸을런지도 모른다.
한편 해방 후 출옥한 그의 오빠 김형선은 건국준비위원회 교통부 위원, 민전 중앙위원, 남로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1950년 9월 북으로 올라가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