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선인 최초의 종로경찰서장·황해도경찰부장, 윤종화 “일사순국一死殉國의 뜻을 뼈에 새겨 최선”

5021

0316-42고등관이라는 욕망의 열차

고위 행정공무원의 등용문인 행정고시, 판검사라도 될라치면 약관 20대에도 일약 ‘영감님’ 소리를 듣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사법고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외교관의 관문인 외무고시는 국가공무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출세의 지름길이다. 통상 이 세 개의 고급공무원을 뽑는 시험을 ‘고등고시(高等考試)’라고 부르는데, 그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의 고등고시는 머리 좋고 출세욕에 불타는 식민지 청년에게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입신양명의 사다리였다. 물론 그것은 친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일제로서는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조선인의 힘을 빌어야 했고, 이 식민통치의 하수인에게 “너희도 충성을 다하면 출세할 수 있다”고 던져준 값비싼 고깃덩이의 하나가 고등문관시험 따위였던 것이다

윤종화

▲ 종로경찰서장 재직시 윤종화가 <조광> 1943년11월호에 「결전하의 종로를 말함」을 기고하였다.

 

고등문관시험(지금의 행정고시)에 합격한 조선인의 경우 3년 동안 고등관시보(高等官試補)를 거쳐 주임관(奏任官)이 된다. 요즘으로 치면 5급 사무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임관급 이상을 고등관이라 불렀고, 6급 주사 이하는 판임관(判任官)이라 불렀다. 그런데 5급과 6급의 경계는 ‘명박산성’보다 높고 견고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9급이나 7급으로 시작한 행정관료들의 경우 평생 근무해야 6급 주사로 끝났다.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5급 주임관은 될 수 없었다. 주임관을 시작으로 한 고등관의 세계는 고등고시 합격자들에게만 주어진 황금 사다리였던 것이다.

식민지의 머리 좋은 청년들 가운데 조국의 독립이야 어떻든 이 황금 사다리를 오르고자 몸부림치는 부류들이 있었고,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 군수를 거쳐 마침내 조선인 최초로 ‘공안 1번지’ 경성부(서울) 종로경찰서 서장까지 지낸 인물이 있다. 그가 윤종화(尹鍾華, 창씨명 伊坂和夫, 1908~?)이다.

윤종화는 1908년 3월 1일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났다. 공부에 재주가 있었던지, 그는 1928년 3월 충청남도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하고 그해 4월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佐賀)고등학교에 입학해 1931년 3월 졸업했다. 졸업한 다음달 규슈(九州)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에 입학해 1934년 3월 졸업했다.

규슈 제국대학은 일본 국립대학의 하나였다. 대다수 조선인들이 보통학교(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하던 때, 그는 도쿄제대(東京帝大)와 교토제대(京都帝大), 오사카(大阪)제대, 나고야(名古屋)제대, 도호쿠(東北)제대, 홋카이도(北海道)제대, 그리고 식민지에 설치한 경성제대와 타이페이(台北)제대 등 열 손가락 안의 제국대학 가운데 하나를 다녔으니, 분명 엘리트 중의 엘리트 학생이었다. 거기에 법문학부 법과를 마쳤으니 고등문관시험이나 사법문관시험(지금의 사법고시)을 붙기만 한다면 식민지 관료가 되어 출세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사실 머리가 좋고 시험운만 따른다면 고시처럼 수월한 출세길이 어디 있겠는가. 머리 좋은 이들끼리 경쟁한다는 게 버겁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일체의 정치적 경제적 재생산과정을 조선총독부와 일본인이 장악한 시절, 보통학교를 마친 이들이 면서기만 되어도 우쭐되던 때에 그는 면서기를 넘어 고등관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1934년 윤종화는 규슈제대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산업부 산림과와 창녕군에서 잠시 근무하다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10월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3년 뒤인 1937년 8월 경상남도 창녕군수로 부임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으로서 도장관 또는 도지사를 지낸 이들이 다 합쳐봐야 40명 정도이다. 따라서 조선인 행정관료로서 출세길의 종점은 군수였다. 윤종화는 30세에, 조선총독부 관리 생활 3년 만에 출세의 끝까지 온 것이다. 일제에 충성하도록 미끼로 내던져진 고깃덩이를 문 이상 더 큰 고깃덩이를 좇아 윤종화의 친일행각은 다채롭게 펼쳐졌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1938년 들어서서 전시총동원체제가 수립되었다. 일제의 각종 국방헌납 강요, 지원병제로 시작해 징병제로 이어진 병력 동원, 모집-알선-징용으로 이어지는 노동력 징발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인신 수탈 등 식민지의 지옥도가 펼치지는 가운데,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제국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창녕군농회 회장, 창녕군 미곡통제조합 조합장, 조선방공협회 경상남도연합지부 산하 창녕지부 평의원, 육군특별지원병 창녕후원회 회장 등 그의 직함은 나날이 늘어났다. 창녕군수로 재직할 때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물자 조달 공출, 국방헌금 모금 등의 전시(戰時) 업무도 충실히 수행했다. 충성에는 승급의 대가가 주어졌다. 1939년 3월 경상남도 김해군수로 옮긴 후 9월에는 고등관 6등으로 승급되었고, 11월에는 정7위로 승서(陞敍)되었다. 김해군수로 재직하면서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용물자 조달 공출, 국방헌금 모금, 국채소화(國債消化)와 저축 장려 등의 업무를 수행하여 <지나사변공적조서>에도이름이올랐다. 자신에게는 ‘유방백세(流芳百世)’인지 몰라도, 민족에게는 ‘유취만년(遺臭萬年)’이었다. 곧 “좋은 향기는 백세를 가고 나쁜 냄새는 만년을 간다”는 옛 말 가운데 그는 후자였다.

최초의 조선인 종로경찰서장

윤종화

▲ 윤종화 종로경찰서장의 부임사

 

1940년 7월 윤종화는 경찰 고등관으로 옮겼다. 조선인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직인 경시(警視)가 되어 함경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일제강점기 경찰 직제에서 고등관에 포함되는 첫 계급인 경시는 지금의 총경에 해당한다. 그런데 일제하 35년간 조선인으로서 경시에 임명된 자는 스무 명이 채 안되었다. 숫자로 보자면 도지사보다 희귀한 ‘친일문화재급’이 경시였다. 그리고 다시 몇 자리를 거쳐 1943년 9월 조선인 최초로 경성부 종로경찰서 서장에 임명되었다.

종로경찰서! 일찍이 의열단원이 폭탄을 투척했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끌려가 고문당했던 식민지판 공안 1번지가 종로경찰서였다. 세칭 ‘염라대왕’이라 불린 고등계 악귀 미와 와사부로 경부가 근무하면서 악명을 떨친 곳이다. 이곳에 윤종화가 최초의 조선인 경찰서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공안의 1번지이기에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하물며 조선인이. 윤종화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임사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밝혔다.

“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고 반도인 중상층 계급이 많은 곳으로 반도 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활동가로 필승체제가 서 있지 않으면 병참기지 반도의 사명을 다하기 어려울 줄 안다. 경찰관은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계몽과 지도를 하여야 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우선 결전하 긴급 문제인 방공태세와 근로체제 정비 또는 생산력 확충 등 필승의 온갖 시책의 추진력이 되어 책임을 다하여 나가려 한다.(<매일신보>1943.10.1)”

경찰 간부 외의 직함도 두루 맡았다. 1944년 2월 경성부 종로 관내 유력가인 윤치호(尹致昊)·한상룡(韓相龍)·이광수(李光洙)·한규복(韓圭復) 등 60여 명이 중심이 되어 황민화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한 ‘황민화운동추진위원회’의 고문이 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국민총력 경성부연맹 이사에 선출되었다.

▲ 윤종화 황해도경찰부장 취임인사. “한 길 성(誠)을 다하고 일사순국(一死殉國)의 뜻을 뼈에 새겨 최선을 다하겠다.” <매일신보>1944.11.14.

그리고 마침내 1944년 11월 고등관 4등의 사무관으로 승진해 황해도경찰부 경찰부장으로 옮겨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앞서 조선인 최초의 종로경찰서장에 이어 조선인 최초의 도경찰부장에 임명되어 2관왕을 달성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44년 11월 조선총독부 도경부 및 도경부보 고시위원, 12월 해주예방구금위원회 위원, 1945년 2월 전시손해보험 조사위원 등을 지냈다. 조선인 친일경찰로서도 쉽게 도달하기 힘든 극상의 직위까지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그의 관운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친일과 독재로 이어지는 윤씨 가계의 부역사

1945년 9월 윤종화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체포되어 평양 삼합리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6년 2월 중국의 훈춘(琿春)과 러시아의 그로데코보로 이송되었다가 같은 해 9월 하바로프스크로 다시 이송되었다. 그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남한에서도 1949년 8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는 윤종화를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했다. 이렇게만 끝났다면 어느 열성 친일파의 승승장구와 몰락이라는 개인사로 끝나겠는데, 이 집안은 다시 대한민국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먼저 칠원윤씨(漆原尹氏)인 윤종화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자. 윤종화의 아들인 윤석순(尹碩淳, 1937년생)은 5‧16쿠데타 후 김종필이 만든 악명 높은 정치공작기구인 중앙정보부에서 1961년 창립 때부터 1981년까지 20년 동안 근무했다. 1981년에는 전두환의 기반인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해 사무차장을 하고 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도 되었다.

윤종화의 형은 윤종옥(尹鍾玉)이다. 윤종화가 전국구 수준의 권력을 누렸다면 윤종옥은 1935년에 청양군 청장면 면협의회원을 지낸 면 차원의 유지였다. 일제강점기 농촌의 중심지는 읍이나 면이었으니, 여기서 행세깨나 한 것이다. 해방 후 윤종옥은 청남의용소방대장, 청남면장, 청남우체국장 등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나 해방 후에나 ‘면 차원’에서의 권세와 관복은 여전히 이어졌다.

‘면 유지’ 윤종옥의 아들 윤광순(尹珖淳, 1934년생)은 공군 대령으로 예편한 후 한국투자신탁 부사장, 사장을 역임했으니, ‘면 유지’인 아버지를 훨씬 넘어섰다. 그런데 그 아들 곧 윤종옥의 손자는 친박 중의 친박을 자처하며 한때 우리나라 정계를 좌지우지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를 지냈고 당 사무총장을 맡아 2015년 7·30재보선 공천을 총괄한 국회의원 윤상현(尹相現)이다. 친일과 독재로 이어질수록 출세가 보장되는 이 나라, 정말 자괴감이 들 뿐이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