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추적발굴 – 이준 열사의 안국동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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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시사주간지 <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1907년 8월 22일자에 수록된 ‘헤이그특사(특파위원) 위임장.‘ 1907년 4월 20일 서울 경운궁에서 대한황제 이형(고종)이 친서하고 친압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1907년 6월 25일은 고종황제의 특사인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 세 사람이 제2차 만국평화회의(1907.6.15~10.18)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날이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던 이들의 계획은 서구열강의 외면과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채 수포로 끝났고, 특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준은 울분에 겨워 여러 날에 걸쳐 단식하던 도중에 그해 7월 14일 머나먼 이국의 호텔 방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들의 의거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여파는 가혹했다. 무엇보다도 고종은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윤허한 것을 빌미로 퇴위를 당하였고, 곧이어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과 군대해산이 강요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국권은 회복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또한 세 특사에 대해서는 ‘위칭밀사(僞稱密使, 거짓되이 밀사로 자칭)’하였다는 이유로 궐석재판을 통해 교형(絞刑)과 종신징역(終身懲役)의 판결이 가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헤이그특사사건’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이른바 ‘밀사’의 신분인 탓에 그런지는 몰라도 몇 가지 관련사항들이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은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이들이 지닌 위임장과 황제친서의 전달 경위와 장소 등과 같은 사항들이 그것이다. 이 당시 이상설은 만주에서 활동중이었고 이위종은 러시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밀명을 전달받고 위임장과 친서를 수령하는 일은 오롯이 국내에 남아 있던 이준의 몫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황제의 신임장을 수여받은 곳은 어디였을까? 이 점에 있어서 흔히 경운궁 중명전이 언급되고 있으나 이에 관한 근거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유자후(柳子厚, 이준의 사위)의<이준선생전>(동방문화사,1947)에는그 장소를이준의자택으로지목하는구절이 등장한다.

해아밀사(海牙密使) 특파밀칙(特派密勅)의 하부(下付)인 역사의 날은 드디어 왔다. 때는 4월 20일(음 3월 9일)이었다. 시종 이종호(李鍾浩) 씨와 박상궁(朴尙宮)이 밀조(密詔)를 뫼셔 안국동 이준 선생의 자택으로 나왔다. 잡인을 금지하고 일성 이준 선생은 예복을 정제하고 청결한 상 위에 홍보(紅褓)를 깔고 황은(皇恩)을 감읍하면서 북향재배(北向再拜)하고 삼가 우악하옵신 밀조를 봉대하였다. 그 밀조와 해아밀사의 친임장(親任狀)은 좌(左)와 같은 것이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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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1915년9월25일에수록된덕제병원(德濟病院, 안국동 163번지)의 광고문안. 여기에는 이곳의 지명이 원래 ‘안현(安峴)’이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물론 이 내용조차도 무려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출판된 내용이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 헤이그특사사건의 출발지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이준의 집터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준선생전>의본문가운데“북서 안현(北署 安峴) 11통(統) 16호(戶)”로 그 위치를 적시하고 있으며, “안동별궁(安洞別宮, 안국동 175번지 지금의 풍문여고 자리) 동쪽 담장을 지나 4, 5번째 집”으로 설명한 구절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에 표시된 몇 통 몇 호 방식의 주소지로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정착된 지번주소체계로 곧장 전환하는 것이 어렵다.

다만, <황성신문>1909년9월16일자에수록된‘서상팔(徐相八) 양말제조판매소’의 광고 문안을 보면 이곳의 주소지가 ‘경성 북부 안현 11통 6호’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1912년에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에는 서상팔의 주소지가 ‘안국동 153번지’로 전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용례에 비춰보면 ‘안현 11통 16호’는 바로 이 지번의 인접지인 동시에 안국동 대로변의 어느 한 지점에 해당한다고 대략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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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적도면 위에 이준 집터(안국동 152번지, 장송루 자리)와 주요 인접 공간의 위치 관계를 표시한 자료이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1929)

그런데 이보다 좀 더 구체적인 단서는 이준의 집터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얻어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황성신문>1905년6월16일자에수록된「부인상점(婦人商店)」 제하의 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전 공진회장(前共進會長) 이준씨(李儁氏)의 부실(副室) 모씨(某氏)가 북서 안현(北署 安峴) 기소주가(其所住家)에서 일상점(一商店)을 개설하고 게방왈(揭榜曰) 여인상점(女人商店)이라 하였는데 해(該) 점사(店肆)는 양제(洋制)로 유리창벽(琉璃窓壁)을 정쇄(淨洒)히 장찬(糚撰)하고 내외국 각색잡화(各色雜貨)를 포치(鋪置)하여 매매하는데 아국(我國) 경성 내에 잡화상점을 신사(紳士)의 부인(婦人)이 개설함은 차차(此次)에 창유(刱有)함이라. 내왕사녀간(來往士女間)에 관광도 겸하여 해점(該店)에 폭주하므로 물건발수(物件發售)가 점차 흥왕할 모양이라는데 대한(大韓)도 종금(從今)으로 부녀(婦女)의 상업이 차(此)에 효시(嚆矢)가 되리라 하더라.

여기에 이준의 부실로 표시된 인물은 18세 연하의 후처(後妻) 이일정(李一貞)이다. <이준선생전>에서술된내용으로는“1905년2월에돈의동(敦義洞)집을팔고길가집인안현동11통16호로 이사한 후 청년 김진극(金眞極)을 고용하여 가게를 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당시로서는 이러한 여인상점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획기적인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별건곤>제16‧17호(1928년12월)에 수록된 관상자(觀相者)의 「각계 각면 제일 먼저 한 사람」이라는 글에는 이 가게의 의미를 이렇게 부연 설명하고 있다. 이준의 부인 이일정은 이밖에도 여러 분야의 사회계몽활동에도 종사하였고, 1935년 5월 13일 누하동 114-2번지에 있는 사위의 집에서 심장병으로 숨졌다. 참고로, 이준의 첫 부인이던 신안 주씨(新安 朱氏)는 이보다 몇 년 앞서 1931년 9월 19일 함경남도 북청군 평산면 용전리에 살다가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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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명세도

▲ <동아일보>1935년5월15일자에 수록된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李一貞)의 사망관련기사이다.

 

[부인으로 상점을 먼저 낸 사람] 부인이 자기의 영업으로 상점을 내든지 남자가 부인의 이름을 팔기 위하여 여점원 몇 사람을 두고서도 염치 좋게 부인상점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영업을 하든지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근래에 와서는 소위 무슨 부인상회, 무슨 부인상점, 심지어 부인이발소, 부인다점까지 생겨서 골목마다 부인 무엇이라는 간판을 흔히 볼 수가 있지마는 과거 수십 년 전에 부인이 아직 문밖 출입도 하기를 싫어할 때에 부인으로서 당당하게 상점을 내고 남자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영업을 한 이가 있었다면 그 얼마나 선각한 부인이라 하랴.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바로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던 그해 봄 2월경에 서울 북촌의 한 요지인 안국동 가로변(安國洞街路邊, 현 지나요리점 장송루 자리)에는 일정상회(一貞商會)라는 한 부인상회가 생기었으니 그것은 정미년에 해아사건(海牙事件)으로 내외의 이목을 경동케 하던 고 이준(李儁) 씨의 부인 이일정(李一貞) 씨의 경영한 바이다. 그 상회의 규모는 그리 크지 못한 한 잡화점으로 불과 2년 만에 폐점(廢店)을 하였지마는 조선에서 부인상점으로는 한 원조(元祖)이다. (하략).

이 글에는 다행스럽게도 여인상점이 있던 터를 “지금의 중국요리점 장송루(長松樓) 자리”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를 근거로 장송루의 지번에 표시된 자료가 있는지를 확인해 보았더니, 몇몇 군데에 장송루라는 이름과 소재지를 ‘안국동’이라고 적은 내용은 등장하지만 더 이상의 세부적인 내용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매일신보>1934년2월23일자에게재된「표면은요리점,내용은아편마굴」제하의 기사를 보면 안국동 152번지에서 중국요리점을 운영하는 마진림(馬振林, 51세)이라는 중국인이 아편을 밀매하다가 체포된 사실을 알리고 있는데, 이곳이 장송루라는 명시적인 표기는 없으나 안국동 대로변에 존재하는 유일한 청요리집인 것은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이준의 집터는 마진림이 운영했던 중국요리집이 있던 자리이며, 지번주소로는 안국동 152번지에 해당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경성

▲ <매일신보>1916년12월19일자에수록된‘일석서장(一石書莊)’서점광고문안. 이곳의 지번주소가 ‘안국동 152번지’로 표시되어 있는데, 중화요리점 장송루가 들어서기 이전에 사용되던 가게의 흔적인 셈이다.

 

해당 지번에 대한 토지대장(종로구청 소관자료)을 살펴보면, 토지소유자의 변동내역은 1912년 이후의 것만 존재하므로 1907년 당시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중국인 마진림은 1920년 3월 이후 1936년 12월까지 이곳의 주인이었던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64년 8월에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이곳을 매입하였고, 다시 1975년 8월에 인접지인 ‘안국동 148번지’로 통합 말소된 이후 현재 이 자리에는 ‘해영회관(海影會館)’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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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 열사의 집터이자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던 안국동 152번지 구역의 현재 모습(하나은행 심벌마크가 부착된 지점)이다. 지금은 옛 지번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해영회관’이라는 대형빌딩이 들어서 있다

이 건물의 1층에는 하나은행 안국동지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준 열사의 집터인 ‘안국동 152번지 구역’은 빌딩의 서단부(西端部)에 해당한다. 헤이그특사의 출발점이자 최초의 여인상점이 있던 역사공간은 결국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고층빌딩에 짓눌린 채 오랜 세월 망각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셈이다.

올해가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난 지 110주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을 구태여 강조하지 않더라도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안국동’의 이준 열사 집터에 문화유적표석 하나 정도는 세우는 성의 표시가 마땅히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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