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you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 정신과 친일문제연구에 평생을 바친 故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설립되었습니다.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슬로건 아래 한국 근현대사 쟁점·과제를 연구하고 과거청산운동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Project story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에 이어 강제동원 문제를 알리기 위한 세 번째 펀딩입니다. 일제시대 한국인들이 어떻게 강제 동원되었고 어떤 노동을 강제 받았는지, 그리고 왜 이 문제가 끝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Funding plan
강제동원 문제를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의 후원금은 ‘기억의 전승, 연대의 허브’를 모토로 하여 민족문제연구소가 준비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중에서 ‘강제동원관’을 설치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Details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와 “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 등 두 차례 스토리펀딩을 진행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실상을 알렸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 싸워온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연대와 투쟁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보내주시고 소중한 마음을 모아주셨습니다. 먼저 정성을 보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지옥섬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번 펀딩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삶에 다가가고자 합니다.
‘지옥섬’이라 불린 군함도로 끌려간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 왜 우리 청년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을까요?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목숨을 건 탈출을 하고, 왜 끝내 차디찬 바다에서 죽어가야만 했을까요? 일본군에 끌려간 청년들도 있습니다. 일본의 패망 이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고 있었던 젊은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간 곳은 조국이 아닌 동토의 땅 시베리아의 한 수용소입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또한 이번 펀딩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당신의 역사적 증언을 통해 진실과 정의를 향한 첫 길을 열어주신 고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아울러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그동안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돌아봅니다. 지옥섬의 강제노동을 숨긴 채 일본 정부가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할 때, 우리가 어떤 반대운동을 했는지를 들려드립니다. 또한 일본 정부에 맞서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리할 것입니다.
“기억을 기록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함께해주세요
스토리펀딩을 통해 여러분들께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하려 하지만, 이번에도 담지 못하는 피해자분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고통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흘렸을 눈물과 한 분, 한 분의 혹독한 삶의 역정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입니다. 저희는 이분들의 삶과 역사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담고자 합니다. 기억을 기록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과 반갑게 뵙기를 바랍니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1화 “너 일본에 간다” 16살 때 받은 징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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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30년 후반부터 1945년까지 약 10년 동안 홋카이도의 발전소 공사와 비행장 건설현장에서 노무주임으로 일했던 관계로 조선인 노무자 모집을 위해 때때로 조선에 갔고,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착취 실태도 소상히 보아왔다. (조선인 노무자를) 모집할 때 일본의 각 회사는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할당 지역의 근로동원기관, 경찰서, 면의 노무계를 독려하여 사람들을 모았는데, 한 사람이라도 많이 모집하기 위해 조선인 노무계원에게 돈을 쥐어주거나, 여자를 안겨주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 번에 끌고 오는 조선인은 1백 명 정도로, 대부분은 일본의 혹독한 식민정책 때문에 피나 좁쌀만 먹고 있던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었다.” |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했던 한 일본인 노무주임의 회고입니다.
그의 말에서 당시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일본 각지로 끌려갔는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강제동원 문제는 주로 국외동원을 의미합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이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동원된 조선인은 약 68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부상에서 사망까지 심각한 피해를 유발했습니다.
“일제는 조선 청년들을
왜 끌고 갔을까요?
일제가 조선인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동원한 이유는 장기화되던 중일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전선에 보내야 할 병력이 늘어나면서 일본 내 노동력이 부족해졌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으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일본 기업의 노무계 직원들은 조선에서 직접 대대적인 노동자 모집에 나섰습니다. 1939년부터는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고 공식적인 집단모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복지시설을 찍은 기업 홍보책자와 화려한 포스터를 보여주면서 “일본에 가서 일을 하면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조선인들을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보다 불안감이 더 컸는지, 조선인 취업 응모자는 예상치를 밑돌았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강제 모집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온 회사 측 모집인들은 면서기와 순사를 대동하고 모집에 나섰습니다.
“노무계원 다케오카는
어떻게 조선 노동자를
모집했을까요?
특히 탄광업계가 적극적이었습니다. 조선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모집인을 파견했습니다. 1940년 6월 28일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온 다케오카 다쓰오(武岡達雄)도 그런 모집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홋카이도에 있는 스미토모주식회사 우타시나이 광업부의 노무계원이었고, 회사로부터 조선인 노동자 100명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장을 옵니다.
6월 29일 경성에 도착한 다케오카는 7월 2일 조선총독부 사회과를 방문하여 노동자 모집 문제를 협의합니다. 그런데 모집 대상 지역이 이미 모두 할당되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만큼 조선인 노동자 모집을 두고 경쟁이 치열했던 겁니다.
다케오카는 8월 6일에야 비로소 경상북도로부터 모집 허가증을 발행받습니다. 그는 다음날 곧바로 고령경찰서와 군청을 방문해 4개 면을 지정받고 관내 경찰과 면사무소 직원의 협조를 받아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나섭니다.
그가 조선인 노동자 100명을 모두 모집한 것은 10일 만인 8월 17일이었습니다. 그는 8월 21일 모집한 조선인들을 데리고 부산항을 출발해서 26일 홋카이도 우타시나이 탄광으로 귀환했습니다.
“경찰도 나서서
강제동원에 협력했습니다
모집을 통한 강제동원의 방식은 1942년부터 더욱 강제성을 띠는 관 알선 방식으로 바뀝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조선직업소개소령’ ‘노동자 알선요강’을 공포하여 동원 방식의 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또한 내무국 안에 ‘조선노무협회’를 설치하여 노동자의 공급을 직접 조절하기도 했습니다.
관 알선은 사업주가 노동자 사용계획서를 관할 도에 제출하면 도가 총독부에 보고하고, 총독부가 각 도의 노무조정계획서를 받아 조정하여 다시 각도에 계획을 하달하면, 도에서 이를 군과 사업주에게 내려 보내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노동력 동원 종사자는 ‘알선노동자 공출종사자 증표’라는 증서를 교부받아 관계기관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노동자 동원에는 각 행정단위의 경찰관서가 적극 협력했습니다. 관 알선 방식의 동원이 실제로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강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다음의 증언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1942년 10월, 거리에서 두 사람의 낯선 남자가 불러 세웠다. 한 사람은 일본인이고, 또 한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좀 할 말이 있으니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본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들에게 끌려갔다. 숙소로 가서 2층으로 올라가니 벌써 30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북해도 모집’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으나 탄광이라고 써놓지는 않았다. 그렇게 써 놓으면 사람들이 안 오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임금은 하루에 7원을 준다. 일은 공장이나 토목장이나 원하는 대로 한다”고 했다. 가기 싫다고 했지만, 변소에 가도 몽둥이를 든 감시원이 따라다니는 판이라 도망칠 수가 없었다.” 최수천 할아버지의 증언 |
“16세의 아이들도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는 1944년 2월부터 조선에도 ‘국민징용령’을 적용했습니다. 박완서의 자전소설 ‘그 많은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에는 와타나베 철공소가 군수공장으로 지정됨에 따라 오빠가 특수기능을 보유한 기술자로 등록되어 징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오빠가 근무하는 직장에 그대로 징용되는 조치인 현원징용자가 되어 일반징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조선총독부는 16세부터 40세에 이르는 징용 대상자 중에서 현원징용을 제외한 20세 이상 30세 미만 청년들을 우선 ‘일반징용’ 대상으로 삼아 강제동원했습니다. 징용 대상 연령의 청년들은 꼼짝없이 사지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졸지에 죽음의 탄광으로 끌려가야 하는 징용 대상자가 된 조선 청년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전남 장흥에 사는 유생 김주현이 쓴 ‘정강일기’에서 그 전말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43년 6월 26일 자 일기에서 김주현은 면서기들이 아침저녁으로 마을을 수색하여 공장에서 일할 만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사람을 “마치 죄인 다루듯이 잡아가기 시작했다”고 썼습니다.
“가기 싫어서
제비뽑기까지 했습니다
매월 평균 1회로 모집이 강제되자 동네 주민들은 ‘제비뽑기’로 대상자를 선정했는데 선정된 청년이 도망가기 일쑤여서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선정자가 도망가면 면서기들은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징용 대상 연령대의 청년이면 아무나 잡아갔습니다.
1944년에는 모집의 횟수가 월 2~3회로 늘어났고, 이에 따라 도망자도 더욱 많아졌습니다. 결국 군이나 면리 직원들은 모집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무리를 지어 출장을 다녔습니다.
집집마다 수색하여 모집 여부를 불문하고 보이는 대로 두들겨 잡아갔습니다. 모집된 자가 도망가면 그 부모와 처자 중 한 명을 대신 잡아갔다고 합니다. 1945년에는 면서기가 17살 밖에 안 된 아이를 징용으로 끌고 가 주민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그 아이는 부산에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김주현은 일제의 강제동원 메커니즘을 비교적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1945년 1월 19일 자 일기에서 “17~55세의 조선 인민을 모두 저들의 모집 징용 장부에 기재하였다. 그 명목은 군인이나 군속, 역부라 하고, 연령징용, 일반징용, 특별징용의 구별이 있다. 여자 역시 14~25세로 미혼인 자, 과부인 자,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는 자를 방직공장과 군속의 조수로 징용한다.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 역시 끌어가니, 이는 오랑캐요 짐승이다”라고 썼습니다.
“도망과 저항,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최근 일반징용의 실시가 발표되자 일부 지식계급과 유산계급 중에서는 재빨리 중국 또는 만주국 방면으로 도피하거나 주거를 전전하여 당국의 조사를 교란하고, 급히 징용에서 제외되는 직장에 취직을 시도하고 있다. 일반계층에서도 의사를 속여 거짓병으로 입원하거나 일부러 화류병에 걸려 질병을 핑계로 면하려 하고, 심지어 노무동원이 읍면 직원 또는 경찰관의 자의에 따른 것이라 오해해서 폭행·협박하는 일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이런 일은 특히 최근의 보고만으로도 20건을 헤아리는 상황이다. 충남에서는 송출 독려에 나선 경찰관을 살해하기도 했다. 경북 경산에서는 징용을 기피하기 위해 장정 27명이 결심대(決心隊)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죽창과 낫 등을 가지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농성하기도 했다. 첨예화하는 노동계층의 동향을 엿볼 수 있다.” |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치안관계문서입니다. 여기에는 조선인들이 강제동원을 피해 도망가거나 일제 당국에 저항하는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생 김주현은 1944년 2월 29일자 일기에서 “저들이 북선(北鮮) 역부모집으로 붉은 색 소환장(저들 법으로는 병사용지)을 보냈는데, 우리 마을에서 소환된 자 10명이 모두 도망쳤다. 저들이 그 가족을 잡아 가두어 도망한 자들이 출두하도록 하고, 소환된 자 이외에도 노동을 할 수 있는 자는 노소를 불문하고 그 수를 충당하려 하니, 가족 전부가 도망간 경우도 많다”고 쓰고 있습니다.
김주현의 큰아들 김동린도 징용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김동린은 1943년 11월 황실불경죄로 체포되어 이듬해인 44년 2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그해 7월 ‘전과자 징용령’으로 소환되어 강제동원을 당할 지경에 이르자 도망쳤습니다. 김동린의 경우는 주재소에서 직접 동원 책임을 맡아 주재소 순사가 하루에도 수차례 동생을 불러 형의 행적을 캐물었다고 합니다. 결국 김동린은 도피 도중 간간이 집에 들러 식량을 가져가며 연말까지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열여섯 살 서정우는
군함도까지
어떻게 끌려갔을까요?
“할머니와 함께 농사일을 하고 있을 때 200미터쯤 떨어진 집에서 누군가가 손짓을 하며 불렀다. 집에 돌아가자 얼굴을 아는 면서기와 순사 2명이 있었다. “너 일본에 간다”라며 엽서만 한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나는 그것을 웅덩이에다 버렸다. 화난 순사가 내 팔을 잡자 할머니가 울며 순사 손을 물었다. 순사는 할머니를 뿌리치고 가까운 도로변에 세웠던 트럭에 나를 태웠다. 같은 마을의 남기석도 잡혀갔다. 16살 때였다.” 서정우의 증언 |
1943년 봄, 경남 의령에서 할머니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던 열여섯 살의 서정우.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면서기와 순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징용장이었습니다.
서정우는 그 길로 순사들에게 잡혀 면사무소로 끌려갔습니다. 면사무소에는 이미 많은 청년들이 잡혀와 있었는데, 대개 20세 전후의 청년들이었지만 서정우처럼 열다섯, 열여섯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소년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최장섭도 강제징용 당시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는 1943년 학교에서 붙잡혀 군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군수는 최장섭을 보고 “왜 이런 아이까지 끌고 왔냐?”며 직원을 꾸짖었지만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데려왔다”는 말에 그대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기차역에 나왔지만 아들의 강제징용을 막을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손이 묶인 채
부산으로 향합니다
서정우는 트럭과 기차에 태워져 부산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부산수상경찰서 앞에는 각지에서 붙잡혀 온 징용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순사들은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굴비 엮듯 손을 묶은 후 관부연락선에 태웠습니다. 관부연락선의 뱃바닥 화물칸이 징용자들에게 주어진 자리였습니다. 대소변은 누에치는 선반 옆 물통에 보아야 했기에 화물칸은 이내 징용자들의 땀과 분뇨 냄새로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1941년 면사무소에서 징용장을 받고 강제징용된 김선옥은 부산에서 40명 정도의 조선인이 함께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갔다고 증언했습니다. 부산에 미쓰비시 직원 3명이 나와서 자신들을 인솔했다고 합니다. 최장섭도 하라다라는 일본인 인솔자를 기억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말해주지 않고 무조건 좋은 곳으로 간다며 도망을 막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조선인들 가운데 몇몇은 부산이나 시모노세키에서 감시의 눈길을 피해 도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극히 운 좋은 사람들에 해당하는 얘기였습니다.
당시 인솔자로 참여했던 한 일본인은 조선인들 중에 관부연락선 부두에서 군중 속으로 숨어들 거나 열차에서 뛰어내린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솔자가 3명뿐이어서 다른 조선인들이 도망 갈까봐 직접 잡으러 갈 수는 없었지만, 자신들이 조선인들의 일본 도항증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나 헌병대에 연락하면 대개 나중에 붙잡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도착한 곳은 ‘지옥섬’ 군함도
조선인들은 그런 우여곡절 끝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시모노세키에서 다시 기차로 나가사키까지 이동했습니다. 나가사키 항에서는 미쓰비시의 배를 타고 군함도로 향했습니다.
서정우도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후 몽둥이를 든 사내들의 감시 속에 어디론가 이동했다고 기억합니다. 그는 어딘가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나가사키 역에 도착했고, 나가사키항에서 미쓰비시의 배를 탔습니다.
누군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몽둥이를 든 인솔자에게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솔자는 “너희들은 가만히 따라오면 된다. 나라를 위해 석탄을 캐는 거다!”라고 했습니다. 서정우는 석탄을 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에게 닥친 앞날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배는 온통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시커먼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것은 조선인들이 지옥섬이라 불렀던 하시마, 일명 군함도라는 섬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사할린으로, 사할린에서 일본 각지로 끌려간 사람들
3,000여 이중징용자의 비극
조선인 강제징용자 중에는 사할린 북서부 탄광지역에 강제징용 되었다가 일본 내 다른 지역으로 전환 배치된 ‘이중징용’자들이 있습니다. 일제는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할린산 석탄의 수송이 어려워지자 이 지역의 탄광을 휴·폐광하고 1944년 8월 각의를 통해 인력 재배치를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할린에 강제징용 되었던 조선인 3,000여 명이 1944년 8월 25일부터 9월 16일 사이에 규슈, 이바라키현 등 일본 본토 각지의 탄광으로 재배치되었습니다. 인력의 재배치는 대개 동일 회사의 탄광 간에 이루어졌는데, 미쓰비시의 경우 사할린에 있던 약 1,000명의 조선인을 다카시마, 하시마 등지에 있는 자사 탄광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중 지옥섬 군함도에 전환 배치된 조선인은 약 200명이었습니다.
이중징용자들은 사할린에서도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 있었지만, 일본 본토에 배치된 후 더 끔찍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가장 큰 고통은 가족과의 이산이었습니다. 일제 당국은 조선인들을 사할린에 강제징용한 후 생활 안정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징용자의 가족들까지 사할린으로 이주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런데 징용자들을 일본 본토로 전환 배치하면서 가족은 그 대상에서 빼놓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일제는 가족을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문서상에도 가족수송계획은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중징용자들은 사방팔방으로 가족을 찾았지만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가족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이별은 어떤 이들에겐 수십 년의 이별이 되었고 어떤 이들에겐 평생의 이별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중 삼중의 비극이었습니다.
스토리펀딩을 통해 여러분들께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하려 하지만, 이번에도 담지 못하는 피해자 분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지배로 고통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흘렸을 눈물과 한 분, 한 분의 혹독한 삶의 역정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입니다. 저희들은 이 분들의 삶과 역사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담고자 합니다. 기억을 기록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과 반갑게 뵙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