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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펀딩] 3화 역사적인 ‘위안부’ 증언 세상에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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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you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 정신과 친일문제연구에 평생을 바친 故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설립되었습니다.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슬로건 아래 한국 근현대사 쟁점·과제를 연구하고 과거청산운동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Project story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에 이어 강제동원 문제를 알리기 위한 세 번째 펀딩입니다. 일제시대 한국인들이 어떻게 강제 동원되었고 어떤 노동을 강제 받았는지, 그리고 왜 이 문제가 끝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Funding plan

강제동원 문제를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의 후원금은 ‘기억의 전승, 연대의 허브’를 모토로 하여 민족문제연구소가 준비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중에서 ‘강제동원관’을 설치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Details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와 “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 등 두 차례 스토리펀딩을 진행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실상을 알렸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 싸워온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연대와 투쟁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보내주시고 소중한 마음을 모아주셨습니다. 먼저 정성을 보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지옥섬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번 펀딩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삶에 다가가고자 합니다.

‘지옥섬’이라 불린 군함도로 끌려간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 왜 우리 청년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을까요?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목숨을 건 탈출을 하고, 왜 끝내 차디찬 바다에서 죽어가야만 했을까요? 일본군에 끌려간 청년들도 있습니다. 일본의 패망 이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고 있었던 젊은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간 곳은 조국이 아닌 동토의 땅 시베리아의 한 수용소입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또한 이번 펀딩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당신의 역사적 증언을 통해 진실과 정의를 향한 첫 길을 열어주신 고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아울러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그동안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돌아봅니다. 지옥섬의 강제노동을 숨긴 채 일본 정부가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할 때, 우리가 어떤 반대운동을 했는지를 들려드립니다. 또한 일본 정부에 맞서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리할 것입니다.

“기억을 기록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함께해주세요

스토리펀딩을 통해 여러분들께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하려 하지만, 이번에도 담지 못하는 피해자분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고통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흘렸을 눈물과 한 분, 한 분의 혹독한 삶의 역정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입니다. 저희는 이분들의 삶과 역사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담고자 합니다. 기억을 기록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과 반갑게 뵙기를 바랍니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1화 “너 일본에 간다” 16살 때 받은 징용장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2화 ‘지옥섬’ 군함도의 하루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3화 ‘역사적인 ‘위안부’ 증언 세상에 나오다 – 故김학순 할머니 “내 청춘 돌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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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3화

역사적인 ‘위안부’
증언 세상에 나오다

– 故김학순 할머니 “내 청춘 돌려달라”

글│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나는 위안부였다

김학순 할머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여느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1991년 8월 14일 방송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날 할머니는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증언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과거 일본군의 ‘위안부’였음을 밝힌 것입니다. 국내에 거주하는 ‘위안부’ 중 최초의 실명 증언. 할머니의 증언은 이미 오래전에 잊혀진 듯 보였던 과거를 현실로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방송을 보면서 저는 할머니가 평생 이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 데 직접 그 모든 것을 경험해야 했던 분의 심정은 어땠을까?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세상에 드러내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 했을까?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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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히로시마 증언집회에 선 김학순 할머니 ⓒ 모토야마 가쓰미

“할머니에게
힘이 되고 싶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 고모, 이모와 같은 연배셨습니다. 고모는 ‘정신대’로 끌려갈까 봐 어린 나이에 일찍 시집을 갔다고 하셨습니다. 집안 어른들은 ‘밖에 돌아다니다가 정신대로 잡혀간다’며 어린 처녀들을 집에 꼭꼭 숨겨두어야 했고요. 우리 어머니도, 우리 고모도, 우리 이모도 그때 처녀들은 누구나 다 겪었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연약한 몸으로 세상에 맞서 일어난 할머니에게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습니다.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습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이하 유족회)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준비 중이던 소송(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희생자 보상청구사건)에 할머니가 합류하면서 자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족으로 일제 말 징용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1989년부터 유족회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하던 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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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을 보도한 기사 (한겨레신문 1991년 8월 15일)

“할머니는
어떠한 말도 없으셨습니다

유족회에서 만난 김학순 할머니는 조그마한 몸집에도 강단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왠지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말씀도 별로 없으셨고 아무에게나 곁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심부름을 남에게 부탁하시는 일도 없이 혼자서 알아서 하는 분이었거든요. 차가움과 냉정함. 그것은 아마도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이 만들어낸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1년 12월 5일 저는 김학순 할머니를 모시고 일본에 가게 되었습니다. 유족회는 태평양전쟁 당시 징병·징용·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35명(후에 ‘위안부’ 할머니 6명이 추가로 참여하여 41명이 됨)의 이름으로 소송단을 꾸렸는데 그 일행으로 함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나리타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입국장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어요. 제 평생 그런 플래시 세례를 또 받을 날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입국장은 일본과 한국의 기자들로 빈틈없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우리를 향해 수많은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모든 것은 김학순 할머니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증언이 어느새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의 표정은 시종일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나의 청춘을
돌려 달라

그날 밤 김학순 할머니는 쉽사리 잠을 못 이루시고 밤새 몸을 뒤척이셨습니다. 해수병(천식)으로 쉴 새 없이 터지는 기침 때문이기도 했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를 고발하겠다고 난생 처음 일본에 온 그 날, 모르긴 몰라도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지난날 겪어야 했던 오만 가지 일들이 모두 다 떠오르지 않았을까. 잊고 싶어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치욕스런 고통과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삭이지 못했던 분노가 그녀를 잠 못 들게 하지 않았을까.

다음 날인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장을 제출하기 전 우리는 변호사회관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기자회견장을 꽉 채운 한국과 일본의 기자들은 할머니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로록 흘러내렸습니다. 이윽고 할머니의 입에서 첫마디가 터져 나왔습니다.

l “나의 청춘을 돌려 달라.”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

일본에서 돌아온 후 김학순 할머니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도 저를 친근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제가 강제징용 피해자의 유족이기도 했지만, 4살 때 콜레라로 죽은 할머니의 딸이 살아 있다면 저와 비슷한 나이여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할머니는 가슴속의 말도 가끔 꺼내놓으셨습니다. 특히 할머니는 평양에서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마다 그녀는 철없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어긋나기만 했던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그러나 부모 자식 간이 어떻게 좋기만 할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그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갈등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갈등을 영원히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일본군에게 끌려가면서 그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22년 만주 길림성에서 아버지 김달현과 어머니 안경돈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독립군을 돕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소식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녀가 채 백일도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중국에서 혼자 힘겹게 생계를 꾸리던 어머니는 두 살 난 딸을 데리고 평양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때 처음 호적신고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실제 나이보다 두 살이나 어리게 적힌 호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에서 일을 구해 겨우겨우 두 식구의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어머니가 교회 일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김학순 할머니도 4년 동안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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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때 평양 시가지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어머니와
노란 스웨터

김학순 할머니가 열여섯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재혼을 하셨습니다. 생선 장사를 하시는, 아들과 딸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한창 예민할 나이에 어머니의 재혼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단둘이 살다가 어머니의 사랑을 새로운 가족과 나누는 것도, 갑자기 생긴 아버지와 형제자매를 대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감정이 쌓이고 갈등이 늘다 보니 어머니와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져 갔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그때 집에서 벗어날 궁리만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다 찾아낸 방법이 평양의 기생권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해요. 노래와 춤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숙식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딸이 기생권번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딸의 요구를 끝까지 외면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제대로 먹이고 가르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딸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막기만 할 수는 없었던 겁니다.

결국 김학순 할머니는 기생을 기르는 김태원이라는 분의 양딸이 되어 평양 기생권번에 들어갔습니다. 양아버지의 집에는 김영실이라는 양딸도 있어서 할머니는 영실이 언니와 함께 평양 기생권번에 다니며 3년간 춤과 소리를 열심히 배우고 익혔습니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김학순 할머니는 평양 기생권번을 졸업했습니다. 그곳을 졸업하면 정식으로 기생 허가를 받아 영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가무 심사에는 합격했지만 호적상 나이가 어려 정식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관에서는 열아홉 살이 되어야 기생 허가를 내주었는데 그녀의 호적상 나이는 열일곱 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기생권번을 졸업했는데도 기생 허가를 받지 못해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자 양아버지 김태원은 김학순 할머니와 영실이 언니에게 중국으로 가서 영업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날, 어머니는 평양역까지 배웅을 나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손수 뜬 노란 스웨터를 딸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봄날 개나리꽃처럼 샛노란 스웨터였습니다. 기차에 올라 손을 흔들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인사였음을, 그녀 인생에 허락된 마지막 청춘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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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장구를 잡으신 김학순 할머니 ⓒ 민족문제연구소

너무 일찍
끝나 버린 청춘

중국으로 가는 길은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리 지겨운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새로운 곳을 향한 희망에 조금은 들떠 있었던 걸까요. 평양을 떠난 지 일주일 만에 일행은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일행은 북경역 인근의 어느 식당에서 허겁지겁 허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는데 누런 군복을 입은 무리에게 둘러싸이고 말았습니다. 일본 군인들이었습니다.

중위 계급을 단 일본군 한 명이 양아버지 김태원에게 “너희는 조선 사람이 아니냐? 여기는 왜 왔느냐? 스파이가 아니냐?”며 몰아붙였습니다. 그는 양아버지를 어디론가 끌고 갔습니다. 양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김학순 할머니와 영실이 언니를 길가에 세워져 있던 군용트럭에 강제로 태웠습니다.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지만 도저히 군인들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길가에는 트럭 두 대가 있었는데 일본군 40~50여 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트럭은 밤이 새도록 달렸습니다.

트럭이 멈춰선 곳은 어느 붉은 벽돌집이었는데, 군인들은 김학순 할머니와 영실이 언니를 방에 가두고 문을 잠갔습니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문을 흔들어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낮에 봤던 일본군 중위였습니다.

그는 영실이 언니와 붙어있는 그녀를 억지로 떼어 옆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옆방이라고 해봐야 포장으로 가린 게 전부였습니다. 일본군 중위는 “말을 잘 들으면 편해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는 저항하는 그녀를 방구석에 쓰러뜨리고 칼을 꺼내 어머니가 준 노란 스웨터를 찢었습니다. 일본군 중위는 그녀를 강간했습니다.

“그곳은 ‘철벽진’이라는
일본군 위안소였습니다

일본군 중위가 나간 후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영실이 언니를 찾았습니다. 포장을 들춰 보니 언니 곁에도 누런 군복을 입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군인이 떠나고 난 후 그들은 밤새도록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악몽 같은 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악몽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점입니다.

다음 날 아침 문밖에서 조선말 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시즈에라고 불리는 스물두 살의 조선인 여자였습니다.

l “어디서 붙들려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도망칠 수 없어.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아야 해.”

조선말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일본말을 모른다고 했더니 그럼 아예 말을 하지 말고 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가장 나이 많은 시즈에 외에도 열아홉 살 먹은 미야코와 사다코라 불리는 조선인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아이코라는 이름이, 영실이 언니에게는 에미코라는 일본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한참 후에야 이곳이 ‘철벽진’이라 불리는 지역에 세워진 일본군 위안소임을 알았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수시로 전투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이는 전투를 ‘토벌’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본군 위안소의 여성들은 하루에 적게는 5명에서 많게는 10명 이상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전투라도 치르고 온 날이면 몇십 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이긴 날은 이긴 날대로, 전투에서 진 날은 진 날대로 군인들의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것도 ‘위안부’ 여성들의 몫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스스로 콘돔을 가지고 왔고, 일주일에 한 번 군의관이 와서 검사를 했습니다. 때때로 군의는 606호(전쟁 당시 성병 치료제로 사용된 주사약)라 부르는 주사를 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의 손실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밥은 군대에서 쌀과 간단한 부식 거리를 받아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만들어 먹었습니다. 옷은 주로 군인들이 입던 군복 같은 옷을 입고 지내야 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될수록 도망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몇 번이나 담장을 넘어 도망치려 했지만 그때마다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군인들의 무지막지한 구타였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서일까요. 위안소 생활이 4개월째 들어설 무렵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밤 중국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불쑥 그녀의 방에 들어온 것입니다.

“필사의 탈출

김학순 할머니는 놀라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시커먼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습니다.

l “나, 조선 사람이야.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순간 그 사내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군인들이 ‘토벌’을 나가 감시가 허술한 날이었습니다.

그는 이곳 부대 이름과 인원수 등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 이름은 알지도 못했고 인원수는 대강 1소대 300여 명 정도라고 추측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이곳이 ‘철벽진’이라 불린다는 것만 알 뿐, 그것이 정확한 지명인지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그가 조선인이라는 말에 너무나 기뻐 그를 붙잡고 자신을 데리고 나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순간 그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서렸습니다. 그는 안 된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그를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날 데리고 가지 않으면 여기서 소리를 지르겠다”며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결국 그는 김학순 할머니를 데리고 보초병의 감시를 피해 위안소를 탈출했습니다. 추격해 올까 봐 한동안은 뒤돌아볼 새도 없이 내내 도망가기만 했습니다. 안전한 곳에 이른 후에야 그들은 서로 통성명을 했습니다. 40대로 보였던 그 남자는 조원찬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은전 장수로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닌다고 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탈출하게 해준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평생 같이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남자도 싫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었지만 남자가 원치 않아 끝내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임시 수용소에서
딸을 잃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스물한 살 되던 해 가을에 첫 딸을 낳고 해방되던 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듬해인 1946년 네 식구는 귀국선을 탔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일이었습니다.

배는 인천에 닿았습니다. 하지만 미군들은 콜레라가 발생했다며 26일 동안이나 배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미군이 뿌리는 DDT를 맞고 어렵사리 고국 땅에 내려선 그들은 장춘단에 마련된 임시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어설프게 급조된 방에서 몇 달간 네 식구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녀는 네 살 먹은 딸을 잃었습니다. 콜레라였습니다.

딸을 잃었지만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아픔을 가슴에 묻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조원찬은 광성고보 출신이어서 아는 것도 많고 주변에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그는 부대에 부식을 납품하는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술을 마시고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며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는 그녀가 일본놈들에게 몸을 주었다고 비난하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일까. 김학순 할머니는 남편에 대해 얘기하면서 한 번도 그를 남편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나 ‘그 남자’였습니다.

“남편도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도 비가 많았던 해, 그는 납품을 하러 갔다가 창고가 무너져 콘크리트 더미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곧바로 적십자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는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김학순 할머니는 두고두고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만약 그 남자가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텐데..만약 그랬다면 그 남자는 나보다 더 나은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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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순 할머니는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임진각을 찾았습니다. 1996년 임진각에서. ⓒ 민족문제연구소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어서인지 그들의 삶은 언제나 무언가 결핍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소를 탈출한 후 차라리 그를 떠나 평양의 어머니를 찾아가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습니다.

“아들마저도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불행에 절망했지만 김학순 할머니는 아들을 위해 겨우겨우 몸과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그녀는 보따리장사로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삶을 이어갔습니다.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 국민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들이 열 살 되던 해 여름, 그녀는 아들에게 바다를 보여줄 생각으로 큰맘 먹고 속초로 가족여행을 떠났습니다. 속초의 바다는 따뜻하게 모자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행복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일까. 속초의 바다에서 그녀는 마지막 피붙이였던 아들을 잃었습니다. 바다에 들어가 놀던 아들은 물에 빠져 영원히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서울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다 전라남도 해남에 닿았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서 그녀는 장사도 하고 농사일도 하면서 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1980년 아는 이의 소개로 남의 집 가정부를 하게 되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아이들 셋을 돌보며 그 집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가정부 생활도 힘에 부쳐 더 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가정부를 그만두고 충신동에 문간방을 얻어 나왔습니다.

“1991년,
역사적인 증언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동사무소에서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는 쌀과 지원금 3만 원, 취로사업에서 번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동대문교회에서 우연히 원폭 피해자인 이맹희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이맹희 할머니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게 되었는데, 이맹희 할머니는 여성단체에 얘기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습니다.

90년대 초부터 일본 정부 관료들은 ‘위안부’ 같은 것은 없었다며 여러 차례 망언을 해댔습니다. 뉴스에서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김학순 할머니는 엄연히 ‘위안부’였던 자신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싶어 분노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여성단체에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로 결심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아마 자신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런 결심은 평생 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인 ‘위안부’ 증언은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 다음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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