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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펀딩] 4화 “일본 정부의 조건부 사과는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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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you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 정신과 친일문제연구에 평생을 바친 故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설립되었습니다.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 슬로건 아래 한국 근현대사 쟁점·과제를 연구하고 과거청산운동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Project story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에 이어 강제동원 문제를 알리기 위한 세 번째 펀딩입니다. 일제시대 한국인들이 어떻게 강제 동원되었고 어떤 노동을 강제 받았는지, 그리고 왜 이 문제가 끝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Funding plan

강제동원 문제를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의 후원금은 ‘기억의 전승, 연대의 허브’를 모토로 하여 민족문제연구소가 준비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중에서 ‘강제동원관’을 설치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Details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와 “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 등 두 차례 스토리펀딩을 진행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실상을 알렸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 싸워온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연대와 투쟁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보내주시고 소중한 마음을 모아주셨습니다. 먼저 정성을 보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지옥섬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번 펀딩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삶에 다가가고자 합니다.

‘지옥섬’이라 불린 군함도로 끌려간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 왜 우리 청년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을까요?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목숨을 건 탈출을 하고, 왜 끝내 차디찬 바다에서 죽어가야만 했을까요? 일본군에 끌려간 청년들도 있습니다. 일본의 패망 이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고 있었던 젊은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간 곳은 조국이 아닌 동토의 땅 시베리아의 한 수용소입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또한 이번 펀딩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당신의 역사적 증언을 통해 진실과 정의를 향한 첫 길을 열어주신 고 김학순 할머니를 만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아울러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그동안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돌아봅니다. 지옥섬의 강제노동을 숨긴 채 일본 정부가 군함도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할 때, 우리가 어떤 반대운동을 했는지를 들려드립니다. 또한 일본 정부에 맞서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리할 것입니다.

“기억을 기록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함께해주세요

스토리펀딩을 통해 여러분들께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하려 하지만, 이번에도 담지 못하는 피해자분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고통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흘렸을 눈물과 한 분, 한 분의 혹독한 삶의 역정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입니다. 저희는 이분들의 삶과 역사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담고자 합니다. 기억을 기록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과 반갑게 뵙기를 바랍니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1화 “너 일본에 간다” 16살 때 받은 징용장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2화 ‘지옥섬’ 군함도의 하루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3화 ‘역사적인 ‘위안부’ 증언 세상에 나오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4화 “일본 정부의 조건부 사과는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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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4화 “일본 정부의 조건부 사과는 모욕”

“일본 정부의
조건부 사과는 모욕”

우리가 김학순 할머니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지난번 연재는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임을 세상에 증언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이번에는 증언 이후, 할머니의 진실을 향한 노력과 투박한 삶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할머니는 혹독한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시고,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감하시는 분들은 공유 부탁드립니다.

글│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1991년 8월 ‘위안부’ 증언과 12월 일본 소송에 다녀온 후, 김학순 할머니는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습니다.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로 인해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폭로가 줄을 이었습니다. 비단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이 점령한 곳에는 여지없이 위안소가 세워졌기에,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네덜란드 피해자 포함) 등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보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용기 있는 행동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또한 할머니의 증언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학계는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뜻있는 시민들은 지원단체를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과 진상규명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하자 일본 정부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1993년 7월 일본 정부는 정부대표파견단을 한국에 보내 5일 동안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 할머니 16명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8월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 일본군이 관여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하며 그 ‘마음을 표현할 방식’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1993년 11월 호소카와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경주에 왔을 때 강제징병·강제징용 피해자·유족들이 경주에 내려가 회담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습니다. 이날 김학순 할머니도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시위에 참석했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우리는 시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사과만 반복할 뿐, 제대로 책임질 생각도 제대로 보상할 생각도 없는 일본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였습니다.

“일본 정부의 조건부 사과는
그 자체로 모욕이었습니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의 사실 인정, 공식 사죄, 국가배상과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법적으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 또 피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라는 민간단체를 통해서 할 것이며, 이 돈을 받는 피해자들에게만 총리 명의의 사과 편지를 보내겠다는 ‘조건부 사과’ 원칙을 밝혔습니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상처를 안긴 일본이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한다면서 국가의 자존심이나 명분 따위를 지키기 위해 이것저것 조건을 다는 모습에 또다시 분노를 느낀 것입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 법정에 소송을 낸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며 “민간인에게 기금을 모아 보상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구걸하니까 마지못해 도와준다는 식이어서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국민기금 측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지만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대부분 이를 또 하나의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기금 수령을 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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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망향의 동산에서, 김학순 할머니와 필자 ⓒ 민족문제연구소

“공식적인 사과를 받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셨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투쟁은 계속되었습니다. 1994년 6월 김학순 할머니는 도쿄지방법원에 출석하여 일본 정부 측과의 대질신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고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학순 할머니는 “부끄러운 것은 ‘위안부’였던 내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도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도 사죄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라고 비판했습니다.

할머니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사실인정과 공식적인 사죄”라고 강조했습니다. 할머니는 법원 출석 후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증언하고, 일본 국회 앞에서 피해자·유족들과 함께 농성을 벌였습니다.

그 후에도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에 대한 소송에 참여하고, 각종 집회에 나가 증언하고, 국내외 언론과 인터뷰하며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1994년 10월 초 일본 오가사와라 마사노스케 선생이 주도한 사이타마 현 일본군 ‘위안부’ 초청 증언대회에서 저는 김학순 할머니와 일본에서 통역을 맡은 재일교포 변기자 씨와의 연락을 담당하면서 할머니와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오가사와라 씨는 김학순 할머니와 동갑이었는데 할머니의 활동에 큰 감명을 받고 할머니가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직접 할머니 댁을 찾아오기도 하셨습니다. 또 재일교포 변기자 씨는 김학순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따르며 존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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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순 할머니와 오가사와라 씨 ⓒ 민족문제연구소

“할머니의 지인들을
소개합니다

할머니는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을 때마다 마다치 않고 참석을 하곤 하셨습니다. 증언을 하고 나면 보통 사례비로 2~30만 원을 받으셨는데, 할머니는 5만 원씩 봉투에 담아 주변의 ‘위안부’ 할머니에게 나눠주기도 하셨습니다. 누가 돈이라도 조금 드리고 가면 혼자 쓰지 않고 할머니들을 불러 함께 식사도 하셨습니다. 특히 김학순 할머니가 자주 만난 할머니는 황금주, 김상희, 강순애 할머니 등이었습니다.

부산에 살고 계신 이귀분 할머니가 서울에 오시면 황금주 할머니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귀분 할머니는 하루는 김학순 할머니와 자고 하루는 황금주 할머니와 자고 내려가셨습니다.

“강덕경 할머니와의
마지막 이별

김학순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분은 나눔의 집에 계셨던 강덕경 할머니였습니다. 강덕경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나눔의 집으로 오시길 바랐는데, 김학순 할머니는 가고 싶어 하시면서도 서울의 지인들이나 동대문교회의 지인들, 신앙 문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눔의 집에 가지 못하신 또 다른 이유는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공동생활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로 인해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상기하게 되는 일도 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강덕경 할머니는 1997년 2월 세상을 뜨셨습니다. 마지막 중환자실에 계실 때 김학순 할머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병문안을 다녀오신 것이 두 분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많이 우셨고, 많이 괴로워하셨습니다. 장례식장까지 다녀오신 후 할머니도 지병이 악화되어 이화여대 부속 동대문 병원과 목동 병원을 오가는 중환자 신세가 되셨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김학순 할머니는 종로구 충신동에 살았습니다. 한옥집 대문간에 부엌도 따로 없는 문간방이었습니다. 방은 두 사람이 앉으면 가득 찰 정도로 작았습니다. 조그만 방에 옷가지와 이불, 부엌살림까지 함께 있었지만, 저는 한 번도 어질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식사 준비도 방에서 해야 했지만 할머니는 휴대용 가스레인지 하나로 큰 불편 없이 해내곤 하셨습니다. 식사는 워낙 소식을 하셔서 밥에 물김치만 있으면 될 정도였습니다.

난방은 부뚜막이 따로 없는 아궁이에 롤러로 연탄을 갈아야 해서 상당히 불편했지만 다행히 한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많이 도와준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거북이 한 쌍을 친구처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북이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신문을 꼭꼭 챙겨 보셨습니다. 시간이 나면 손수 뜸을 뜨시거나 뜨개질도 하셨습니다. 요즘도 어디선가 뜸뜨는 냄새가 나면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영구임대아파트로
옮기셨습니다

충신동 집이 매매되면서 김학순 할머니는 2개월간 임시 거처로 옮기셨다가 1995년 6월 노원구 월계4동 사슴아파트 101동 102호로 이사했습니다. 영구임대아파트였어요. 사슴아파트는 주방도 있고 방도 2개여서 공간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할머니는 충신동에서 가져온 대추나무를 아파트 정원에 옮겨 심고 집도 꾸미시며 즐겁게 지내시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생활을 불편해하셨습니다. 공간이 넓어져 생활하기는 편해졌는데 아파트가 자기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조용한 단독주택으로 이사갔으면 하고 바라셨지만 경제적인 여력이 되지 않아 옮기시진 못하셨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이들이 할머니의 삶에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고자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는 그들의 관심에 고마워하셨지만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 사슴아파트로 이사한 후 공간이 넓어지자 찾아오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는데 오가는 사람이 많아 경비실에 부탁해 통제해달라고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할머니는 동대문교회에서 생활지원금으로 매달 5만 원씩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1993년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생활안정지원금으로 매달 15만 원씩을 지원하자 할머니는 동대문교회의 지원금을 자신보다 어려운 분에게 주라고 마다하셨습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병마와 싸우셨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폐 한쪽이 거의 기능하지 못할 정도로 만성 폐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조금 걸으면 숨이 차 힘들어하셨고 오르막길은 거의 오르지 못했습니다. 1993년 말 무렵부터 할머니는 환절기마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평소에는 충신동 시장 안에 있는 조그만 내과에 다니시다 입원을 하게 되면 이화여대 부속 동대문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병원에 입원할 때나 퇴원할 때 수속을 밟아드리거나 병문안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가족이 없으시니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였지만, 전 언제나 충분히 도와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4년 6월 일본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고 오신 후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지셨습니다. 그해에는 대상포진까지 걸려 고생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때만 해도 흔치 않은 병이라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아 한참을 힘들어하셨습니다. 못 견디게 아프셨을 텐데 진통제도 없이 부스럼약만 바르고 억지로 견디셨습니다. ‘내 속의 화가 모두 등을 뚫고 나오는 것 같다’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사슴아파트에 사실 때 할머니는 더 몸이 안 좋아지셔서 전직 간호사였던 지인을 통해 3~4개월에 한 번씩 영양제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즈음부터 할머니는 부쩍 온몸이 메마르는 것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건강의 악화로 바깥 활동이 뜸해지자 저는 할머니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사진을 액자에 넣어 작은 방 한 면을 장식해드렸습니다. 할머니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사진들을 바라보며 지난날을 되돌아보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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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방 한 면을 장식한 김학순 할머니의 국내외 활동 사진 ⓒ 민족문제연구소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1997년 동대문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실 때, 동대문병원 간호사들이 입원비에 보태라며 십시일반으로 50만 원이나 모아주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치의 선생님이 집에 산소호흡기를 설치하지 않으면 퇴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산소호흡기를 구입하려면 꽤 큰돈이 든다는 점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찾다가 지인 중에 롯데복지재단에 연이 닿는 분이 있어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여기엔 주치의 선생님의 소견서가 큰 몫을 했습니다. 다행히 재단에도 김학순 할머니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어 어렵지 않게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산소호흡기를 설치하고 나자 이번에는 소음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낮에는 참을 만했지만 밤에는 잠을 방해할 정도로 소음이 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방에 산소호흡기를 설치하고 줄을 길게 늘어뜨려 안방까지 연결해 소음을 최소화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소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꽤 불편해했지만 우리는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는 하루종일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어야 했는데 혹시 주무시다 잠결에 손으로 쳐서 산소호흡기가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부터 되도록 할머니와 같이 자려고 노력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제 잠자리가 불편할까 봐 할머니 옆에 꼭 맞게 새 이부자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아프신 몸에도 배려해주시는 마음이 너무 고마워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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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는 김학순 할머니 ⓒ 민족문제연구소

“그러나 할머니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그해 겨울, 김학순 할머니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1997년 12월 14일 오후 면회시간에 맞춰 중환자실에 갔더니 할머니는 산소호흡기를 끼고 두 손이 묶인 채 눈만 껌뻑이고 계셨습니다. 제가 “할머니” 하고 부르니까 그제야 쳐다보시고 눈짓을 하셨습니다.

뭔가 하고픈 말씀이 있는 것 같아 간호사를 불러 산소호흡기를 잠시 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간호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산소호흡기를 빼면 큰일 난다고 했습니다. 대신 손을 풀어드릴 테니 손으로 쓰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손을 풀면 할머니가 산소호흡기를 빼버릴 것 같아 저는 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쾌차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할머니 앞에선 꾹 참았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결국 제대로 울지도 못했습니다.

중환자실의 면회는 시간도 제한되어 있고 면회인 숫자도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를 뵙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고 시간과 인원은 한정되어 있어 우리는 할머니 면회도 순번을 나눠 해야 했습니다. 결국 전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1997년 12월 16일 새벽 1시 김학순 할머니는 영원히 우리들 곁을 떠나셨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

김학순 할머니의 장례식은 동대문교회와 정대협, 유족회의 공동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저는 하얀 소복을 입고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딸이 된 마음으로 3일 동안 빈소를 지켰습니다. 동대문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저도 가족을 대신하여 염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할머니의 모습이 마치 잠을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편안해 보여 마음이 놓였습니다. 12월 18일은 제15대 대통령선거가 있는 날이었지만 난 투표도 못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해주었습니다. 일본의 뜻있는 시민들도 조문을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아침 일찍 영결식을 치르고 벽제에 있는 화장터로 가기 전 우리는 할머니가 수요집회를 하던 일본대사관 앞에 운구차를 세우고 추모 노제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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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대사관 앞 추모 노제 ⓒ 민족문제연구소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을 마친 후 동대문교회 목사님은 나에게 유골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평소 딸처럼 할머니 옆을 지켰던 나를 배려해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난 ‘위안부’를 소재로 한 연극 ‘노을에 가서 노을에 지다’를 공연했던 허길자 씨에게 양보했습니다. 그 연극에는 할머니도 직접 출연했었기 때문에 그이도 나에 못지않은 각별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대신 나는 평소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무궁화 꽃을 들었습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지만 천안 망향의 동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 질 무렵이었습니다. 유골함 안치는 황금주 할머니가 직접 하셨습니다. 그 위에 흙을 덮고 무궁화를 올려 이쁘게 장식을 한 후 봉분을 쌓았습니다.

“올해가 벌써
20주년입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망향의 동산 장미 가열 24-24 묘지에 묻혔습니다. 1994년 11월 황금주 할머니와 함께 미리 마련해놓으신 자리였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와 황금주 할머니가 이곳에 마지막 자리를 마련한 것은 그해 6월 제가 아버지의 묘지로 장미 가열 23-19를 예약하면서였습니다.

두 분은 제가 아버지의 묘지를 마련했다는 말을 들으시곤 자기들도 그곳에 묘지를 예약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묘지와 같은 줄에 두 분의 묘지를 예약해드렸습니다. 예약을 하고 나자 두 분은 “우리가 죽으면 아무도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아버지 묘지를 찾을 때 우리 묘지도 잊지 말고 찾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저와 제가 속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는 매년 12월 16일 망향의 동산을 찾습니다. 5주기와 10주기에는 특별히 ‘위안부’ 관련 단체와 일본에서 온 시민들이 공동으로 추모제를 지냈습니다.

황금주 할머니는 부산요양병원으로 내려가시기 전인 2006년까지 매년 추모제에 참여하시다가 2013년 1월 5일 김학순 할머니 옆 장미 가열 24-23 묘지에 묻히셨습니다.

올해는 김학순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채 고국 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계셔서 아직도 아버지의 묘지는 이름 없는 묘지로 남아 있지만, 전 올해도 할머니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망향의 동산을 찾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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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외 단체와 한일 시민들이 함께한 김학순 할머니 5주기 추모제 ⓒ 민족문제연구소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생전에 김학순 할머니와 나눴던 이야기를 최대한 이 글에 담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 모든 것을 담진 못했습니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서로 얘기를 나누며 이 글에 들어갈 내용과 뺄 내용을 상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 없어 너무 아쉽습니다.

“진실의 힘은
언제나 강합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게 싸웠습니다. 할머니가 가는 길은 언제나 난생처음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만큼 두렵고 힘든 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할머니는 묵묵히 원래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었던 것처럼 그 길을 걸어나갔습니다. 할머니의 옆에서 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저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유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알았습니다.

30년을 싸웠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멉니다. 2015년 12월 한국의 박근혜 정부와 일본의 아베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양국이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은 무시한 채 적당히 덮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기만적인 합의였습니다.

l “일본 정부가 갖은 망언과 망발로 사실을 감추려 애를 쓰지만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던 김학순 할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과연 한일 양국의 ‘12.28 합의’를 보고 어떤 심정이 되셨을까요.

세상은 어느 순간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과거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견고한 세상에 냈던 조그만 파문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진실의 힘은 언제나 강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바꿀 우리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스토리펀딩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강제 동원의 역사를 전하려 하지만, 이번에도 담지 못한 피해자분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고통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이 흘렸을 눈물과 한 분, 한 분의 혹독한 삶의 역정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입니다.

저희들은 이분들의 삶과 역사를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담고자 합니다. 기억을 기록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여러분들과 반갑게 뵙기를 바랍니다.

0316-30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알라딘, 예스24, 교보문고, 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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