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에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이 추진된다.
(사)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준비위원회(위원장 이이화)는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종각(鐘閣) 건너편 영풍문고 앞(서울지하철 종각역 5~6번 출구) 도로변에 우리나라 민주주의 첫새벽을 활짝 연 동학농민혁명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건립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오는 3월 22일 출범을 공식 선언하는 동상건립위원회는 3~4월 중 동상 건립 장소를 확정짓고, 건립사업을 구체화하기로 했다. 나아가 동상 건립기금은 범국민적인 성금모금을 통해 그 의미를 높여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지난 해 8월부터 서울시와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을 협의해온 동상건립준비위원회는 조선시대 의금부 터가 서울지하철 종각역 1번 출구이고, 5~6번 출구 앞 영풍문고 종로지점 자리가 죄수를 수감했던 전옥서(典獄署) 자리였다고 말하면서, 바로 이곳에 권설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봉준 장군이 심문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殉國)한 좌감옥(左監獄) 터였다고 말했다.
동상건립위원회는 오는 3월 22일 성균관대학교600주년기념관에서 오전 11시부터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창립총회를 열고, 오후 2시부터 동상건립 추진을 위한 학술발표회를 갖기로 하였다.
한편, 동학농민혁명 최고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4년 겨울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일본군에 패한 후 전북 순창군 피노리에 몸을 숨긴 채 재기를 엿보다가 관군에게 붙잡혔다.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설치된 권설재판소에서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29일(음력) 대전회통 형전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時斬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관아를 점령한 자 지체없이 목을 벤다.)”에 따라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인 3월 30일(양력4.24.) 새벽 2시 전옥서 좌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참고1 : 창립총회 및 학술발표회 초청장
참고2 :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사업 기본개요
참고3 : 전봉준장군동상겁립위원회 창립선언문
참고4 : 녹두장군 전봉준 순국 관련 기록
□ 사업개요
○ 사 업 명 : 전봉준 동상 건립사업
○ 건립규모 : 16제곱미터(약 5평, 서울시유지)
○ 건립위치 : 서울 종로구 서린동 26-1(영풍빌딩 앞, 종각역 띠녹지지대)
□ 추진경과
□ 향후 추진일정
○ 2017년 03월 : 사단법인 설립 창립총회 및 학술대회
○ 2017년 03~10월 : 동상 건립기금 국민모금 계획 수립 및 추진
○ 2017년 10월~2018년 2월 : 동상 제작
○ 2018년 4~5월 중 : 동상 건립(*예정)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른 것은
창생(蒼生)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 이 땅을 격동시켰던 동학농민군의 장엄한 창의문을 떠올리며 오늘 우리는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의 출범을 엄숙하게 선언하며, 전봉준 장군 순국 122주기를 맞아 그분의 순국 터인 서울 종로구 보신각 맞은편에 동상을 건립하고자 한다. 바로 이곳이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 아래 신음하던 수많은 백성들을 구하고자 결연히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 최고지도자 전봉준 장군이 의연하게 최후를 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 중심의 불평등한 중세 봉건제도를 개혁하여 만민이 평등한 근대 민주주의를 지향한 반봉건항쟁이다. 나아가 세계사적으로 전개된 19세기 서세동점기(西勢東漸期), 불법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이루고자 했던 전국적인 반일민족항쟁이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그 숭고한 정신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심각하게 왜곡되고, 거세되어 반란사건으로 평가 절하되었다. 다행스럽게 1994년 혁명 100주년을 맞아 본격화된 역사학계의 연구와 전국 각지에서 창립된 기념사업단체의 적극적인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에 힘입어 마침내 2004년 3월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실로 110년 만에 반란사건에서 혁명으로 명실상부하게 그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그해 3월 무장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향해 진격하던 중 정읍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고, 전남 장성에서 서울 경군(京軍)을 격파한 후 파죽지세로 호남의 수부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일본도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에 조선의 산하가 외국군대 전쟁터로 변하는 것을 막고자 동학농민군은 조선정부와 화약을 체결하고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정부의 철병요구에 응하지 않고 도리어 경복궁 무단점령, 친일내각수립, 청일전쟁 도발 등으로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전봉준 장군은 전라도 삼례에서 2차 봉기를 단행하여 반일민족항쟁에 나섰으나 애석하게도 동학농민군의 꿈은 일본군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후퇴하면서 수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연달아 패배하여 주력부대를 해산하기에 이르렀고, 전북 순창군 피노리로 몸을 피한 채 재기를 엿보던 전봉준 장군은 관군에게 붙잡힌 다음 일본군에게 인계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 장군은 대역죄를 다루는 의금부 권설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1895년 4월 24일 새벽 교수형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 일본 영사관 측은 조선민중의 추앙을 받는 전봉준 장군을 조선침략 야욕 실현의 꼭두각시로 삼고자 끊임없이 회유하였다. 이에 대해 장군께서는 “너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라 일을 바로잡으려 하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는 나를 죽이는 것뿐이요 다른 말을 묻지 마라.”고 단호히 말했으며, 죄인 취급하는 법무아문 관리에게 “도(道) 없는 나라에 도를 세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탐관오리를 벌하고, 부당한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을 매매하여 귀천이 있게 하고 공토로서 사토를 만들어 빈부가 있게 하는 것은 인도적인 원리의 위반이라 이것을 고치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며, 악한 정부를 고쳐 선한 정부를 만들고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냐? 자국의 백성을 쳐 없애기 위하여 외적을 불러들였나니 네 죄가 가장 중대한지라,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나아가, 교수대 앞에 선 장군께 집행관이 “가족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권고하자 “다른 할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이 컴컴한 도둑 굴속에서 남몰래 죽이느냐”라고 준절하게 꾸짖었다.
전봉준 장군 순국 122년,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 수도 서울 종로에 그분의 동상을 건립하려는 것은 일그러진 천리(天理), 왜곡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기여하고자 함이다. 종로 네거리에 건립될 전봉준 장군 동상은 자손만대 애국애족 정신의 표상으로 길이길이 우뚝할 것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는다.
2017. 3.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일동
아래의 기록들을 통해 전봉준 장군은 1895년 3월 29일(양력4.23.)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인 1895년 3월 30일(양력4.24.) 오전 2시 좌감옥(左監獄)에서 교죄(絞罪)에 처해졌음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좌감옥(左監獄)은 조선시대 죄수를 관장하던 전옥서(典獄署)로 현재 영풍문고(종로점) 자리이다. (현재 그곳에는 ‘전옥서’ 터였음을 알리는 비가 서 있다.)
- 20170321-1.pdf (769.18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