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1절 처음 열린 뒤 33인 중 ‘변절자’ 친일 행각 지적
(합천=연합뉴스) 김선경 기자 = 경남 합천 해인사가 매년 열기로 한 민족대표 33인 합동다례제를 중단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33인 중 3명이 1919년 독립선언서 서명에 참여한 이후 변절해 친일 인사로 규정됐다는 이유에서다.
해인사 용탑선원은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을 위한 합동다례제를 지난 1일 처음으로 열었다.
용탑선원이 33인 가운데 한 명인 용성선사(용성스님·1864∼1940)의 출가·열반지이자 사리가 봉안된 탑이 있어 합동다례제를 열기에 의미가 있는 장소라고 용탑선원은 판단했다.
용탑선원은 이 과정에서 33인 이름이 적힌 위패 33개를 별도 제작하기도 했다.
합천군도 예산 1천만원을 지원했다.
용탑선원과 군은 합동다례제가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미래 세대에 3·1 운동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
이에 매년 합동다례제를 봉행하겠다는 방침을 정한 바 있다.
그러나 33인 중 일부의 친일 행적 탓에 민족대표 전원을 대상으로 한 합동다례제가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33인 가운데 박희도(1889∼1952)·정춘수(1873∼1953)·최린(1878∼1958) 등 3명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박희도는 1919년 독립선언문에는 서명했지만 그 이후 상반된 행보를 보였다.
1939년 ‘내선일체’ 구현과 일본정신 고취를 위해 동양지광사를 설립하고 일본어 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을 창간했다.
박희도는 동양지광에서 “조선인의 행복은 국민적 의무에서도, 국가적 자격에서도 완전히 일본인으로 돼버리는 것에 있다”고 단언했다.
박희도 등의 권유를 받아 독립선언에 참여한 정춘수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일제가 항일 민족주의 단체 관계자들을 검거하려고 조작한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당시 흥업구락부원 일동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에는 “여하한 희생도 불사하고 광휘 있는 황국 일본의 신민으로의 영예와 책임을 통감하고” 등 내용이 담겼다.
이후 기독교 조선감리교단 통리자(統理者)에 선출되기도 한 정춘수는 “일본정신에 합치되는 황도주의화한 일본적 기독감리교회로서 매진한다”는 등 발언을 일삼아 감리교 내부에서도 친일파 거두로 지목됐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매일신보사 사장을 지낸 최린은 3·1 독립선언에 참여해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른 이후 변절했다.
최린은 출소 이후 일제 침략 전쟁과 식민통치 정책을 정당화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각종 선전에 앞장선 것으로 파악됐다.
박희도·정춘수·최린은 모두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33인 중 이갑성 등 일부도 친일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뚜렷한 증거 자료가 없는 상태인 반면 박희도·정춘수·최린은 친일인명사전뿐만 아니라 국가 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에도 포함된 인물들”이라며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 인사인 이들 3명을 포함해 행사를 하는 건 지극히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춘수의 경우 과거 충북 청주에 동상이 있었지만 친일 행적이 알려진 뒤 완전히 철거되기도 했다”며 친일반민족행위자 3인을 포함한 합동다례제가 중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해인사 측과 군은 민족대표 3인의 친일 행적을 사전에 몰랐다는 입장이다.
해인사 용탑선원의 한 관계자는 “그런 부분까지는 몰랐고, 스님이기 전에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합동다례제를 열었던 것”이라며 “(외부에서 비판이 제기된다면) 친일 인사를 빼고 용성선사와 불교계 인사를 중심으로만 다례제를 지내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합천군도 “갈수록 3·1절 행사가 퇴색되는 부분이 있어서 합동다례제 개최에 힘을 보탰지만 33인 중 친일 인사가 있는 부분은 미처 몰랐다”며 “향후에는 그 부분을 고려해 행사 지원 여부 등을 결정하겠다”고 설명했다.
<2017-03-23>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