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역사가들은 2017년 3월 10일 촛불혁명을 1919년 3·1대혁명, 1960년 4·19민주혁명,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과 같은 반열에 놓고 역사를 설명할 것이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어떠한 혼란도 없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작동시켜 독재자를 쫓아내는 명예혁명을 이뤄낸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헌법재판소(헌재)는 재판관 8명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하였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대통령 박근혜가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를 자행”하였기에,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헌법 수호의 이익을 위해 파면한다.”고 하였다. 작년 10월 29일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몰려나와 박근혜정권 퇴진의 촛불을 든 지 132일 만의 일이다. 탄핵 선고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헌재의 탄핵결정에 대해 국민의 86%가 “잘했다”고 응답하였으며 “헌재의 결정에 승복한다”는 응답이 92%에 달해, 탄핵 불복의 목소리는 극소수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은 헌정사상 첫 탄핵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을 구속 수사해야”한다는 여론이 69.4%에 달해, 조만간 인신 구속될 운명에 처해 있기도 하다. 국민들은 뇌물공여 등 재벌 관련 의혹, 우병우 전 민정수석 관련 의혹, 그리고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 관련 의혹 등에 대해 철저하고 투명한 수사를 원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사회에 짙게 암운을 드리웠던 박정희 망령도 사라질 전망이다. 박정희 프레임은 한마디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인데, 이는 독재를 미화하는 주장이다. 경제성장을 상위개념으로 민주주의를 하위 개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아시아는 후진국이기에 경제성장을 위해선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은 양립할 수 있는 가치이지, 어느 하나를 위해 어느 하나가 희생되어야만 하는 상충개념이 아니다.
양자를 상하 또는 선후 관계로 본다면, 경제발전이 이루어져야만 민주주의도 가능하다는 주장이 된다. 이는 민주주의가 독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궤변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최대의 공로자는 바로 독재자 박정희라는 주장이 되고 만다. 한편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인권을 침해한 잘못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성장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이 역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좋다는 전도된 사고로 연결된다. 박정희 군사독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전도된 가치관에 입각해,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10월 유신을 선포했다는 식으로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친일-독재의 상징으로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일 뿐이다.
헌재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수준과 한계를 잘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국민주권의 원리’를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민주권의 원리라 함은 모든 국가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를 국민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민주국가적 헌법원리를 말한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이고, 국민은 그러한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이라고 하였다. 국민이 유일한 헌법 제정권력 주체라는 설명이다. 이는 헌재의 대통령 탄핵이 국민 80%의 찬성 여론과 연인원 1600만 명이 참가한 촛불집회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소식을 접하고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고 분노하며 광장으로 뛰쳐나와 촛불을 들었다. 그러한 직접민주주의의 힘으로 경제 권력의 상징인 재벌총수 이재용을 구속시켰고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시킴으로써, “이게 나라다. 이게 정의다”라고 선언하였다. 3·10촛불혁명의 성공은 우리 사회에 만연된 패배주의와 기회주의를 극복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이 ‘법치주의 국가’임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법치주의란 ‘사람의 지배’나 ‘힘의 지배’가 아닌 ‘법에 의한 통치’를 말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법치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 2014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민의 27%만 “사법부를 믿는다.”고 답했다. 국민 열 사람 가운데 일곱 명 이상이 사법제도를 불신할 정도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이다. 이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42개국 가운데 최하위와 다름없는 39위에 해당하는 수치로, OECD 전체 평균치 54%에 훨씬 못 미치는 수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 등의 뒤틀린 현실을 목도하면서, 사법부가 정의의 보루가 아니라 ‘권력의 시녀’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실례로 광주고법은 17년간 한 번도 돈을 잘못 입금한 적이 없었던 버스기사를 2,400원을 부족하게 입금했다는 이유로 해고한 것이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반면 서울중앙지법은 국민들에게 6천 억원의 손해를 입히고 3조원을 무단 획득한 삼성그룹 이재용 구속영장을 기각하였다. 그야말로 무전유죄 유전무죄인 것이다. 이처럼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바닥인 가운데, 헌재가 “피청구인(대통령)의 위헌·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중대한 행위”라며 대통령을 파면하였다. 물론 이는 국민 절대다수가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다는 촛불민심 때문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사회에 짙게 암운을 드리웠던 박정희 망령도 사라질 전망이다. 박정희 프레임은 한마디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인데, 이는 독재를 미화하는 주장이다. |
아무튼 이번 헌재 판결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할 경우에는 대통령이라도 법의 심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을 수호하며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곳이다. 국민의 기본권 가운데 제일은 생명권인데, 헌재는 대통령의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인 판단을 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헌재는 〈결정서〉에서 “세월호 사고는 참혹하기 그지없으나, 세월호 참사 당일 피청구인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였는지 여부는 탄핵심판절차의 판단대상이 되지 아니한다고” 하여,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별다른 이유 없이 집무실에 출근하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대통령의 “정치적 무능력이나 정책결정상의 잘못 등 직책수행의 성실성 여부는 그 자체로는 소추사유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을 위해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복리 증진까지 부담을 져야 하는 자리인데, 박근혜에게 ‘국민의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헌재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반해 소수의견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 등에 중대한 위해가 가해질 가능성이 있을 경우, 대통령은 시의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국민을 보호할 구체적인 작위의무를 부담”한다고 보았다. “대통령에게 구체적인 작위의무가 부여된 경우 성실한 직책수행의무는 법적 의무이고, 그 불이행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촛불혁명이 시작된 2016년 한 해를 교수들은 사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로 표현하였다.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한겨울에도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듦으로써, “민중들은 개, 돼지”라는 망언을 일삼는 지배층에게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특히 이번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은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가운데 이루어졌기에 더욱 뜻 깊다. 뉴욕타임즈는 “몇 달 간 이어진 대규모 평화시위로 대통령이 퇴진했다는 것은 한국의 젊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진화했는지를 보여준다.”고 전했다. 촛불혁명의 열기가 대선에서 민주세력의 승리로 이어지고, 새롭게 출범하는 민주정부가 박근혜정부의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힘과 지혜를 한층 가다듬어야 한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