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군국가요 40선〉 제작에 얽힌 사연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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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 이준희 부회장

정리 :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 인터뷰이는 〈군국가요 40선-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 부르고〉 제작을 함께한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 부회장 이준희 씨다. 이 부회장은 한국 대중음악 전공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관련 논저를 발표해왔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 음악분야(군국가요)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 또한 유정천리의 〈남인수 전집〉 〈이난영 전집〉 등 음반을 기획・제작했고, KBS 〈가요무대〉 등 방송 프로그램에 자문하고 있으며 대중음악 및 대중문화를 강의하는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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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 부회장 이준희 씨

 

문 : 이번에 발매된 〈군국가요 40선〉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옛가요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가 함께 기획, 제작했습니다. 먼저 유정천리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답 :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는 2009년 11월 옛 가요를 사랑하는 사회인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점차 일반인들도 참여하는 대중모임으로 발전했습니다. 유정천리는 뿔뿔이 흩어진 소중한 옛 가요를 하나 둘씩 찾아 모으고 정리해서 가수별 음반을 복각판 CD로 발간하는 일을 1차적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남인수전집〉(2012) 〈이난영전집〉(2016) 등 해마다 다수의 음반을 제작했고, 가요사 유적지 답사, 대중가수의 평전 및 대표곡집 발간, 노래비 건립, 축음기음반 감상회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회장은 영남대 국문과 이동순 교수(시인)입니다.

문 : 군국가요의 정의와 성격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답 : 군국가요는 1930~4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부응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노래 가운데 상업적인 대중가요의 생산·유통 과정을 거쳐 유포된 것을 말합니다. 일각에서는 친일가요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는데, 군국가요는 친일적 내용을 담고 있는 몇 가지 노래 유형 가운데 하나이므로, 친일가요의 하위 개념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군국가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말과 1938년초에 조선문예회를 중심으로 잠시 동안 제작됩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터진 직후인 1942년과 1943년에 다수의 군국가요가 만들어졌고 1944년초부터는 전시경제의 침체가 심화되어 조선어 음반 생산 자체가 중단됩니다.

일제가 정부시책으로 군국가요를 널리 홍보했지만 일반인들의 호응은 크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음반 판매량이 통계로 나와 있지 않지만, 신문잡지의 음반 광고를 통해서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일본의 군국가요가 행진곡풍인데 비해 한국의 군국가요는 모성을 강조하는 노래가 많아요. 즉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게 진정한 모성(母性)이란 거죠. 수록곡 중에서 ‘지원병의 어머니’ ‘아들의 혈서’ ‘모자상봉’ ‘아들의 소식’ 등이 대표적입니다.

10일제하 군국가요를 최초로 다룬 분은 일본에 계신 대중음악전문가 박찬호 선생입니다. 박 선생은 1970년대부터 한국 가요 음반, 가사집, 관련 문헌, 사진 자료 등을 수집하며 우리나라 가요사 관련 책을 구상하다가 1987년 일본 정문사(晶文社)에서 <한국가요사1895~1945>(일어판)를 출간하였습니다.
이 책 제5부 암흑기의 가요곡 중 ‘민족수난과 군국가요’라는 장에서 군국가요의 실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92년 <한국가요사>로번역 출판되었고, 2009년에는 제1권의 대대적인 수정증보판과 더불어 해방 이후의 가요를 다룬 제2권을 펴냈습니다. 이 두 책은 우리 가요사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라 할 만합니다. 박 선생은 이번 군국가요 CD 제작 때도 희귀한 음원을 제공해주셨습니다.

문 : 연구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2003년으로 알고 있는데요

답 : 2003년 4월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음악의 진상’ 전시회를 국립중앙도서관 1층에서 개최했었습니다. 현제명, 홍난파 등 양악계와 김기수, 함화진 등 국악계, 그리고 남인수, 박시춘, 백년설, 손목인 등 가요계까지 실물자료와 판넬, 음악 시연을 통해 국내에서 최초로 친일음악의 진상을 알리는 자리였습니다. 전시회 첫날 방문하여 살펴보았는데 친일음악을 소개하는 취지는 좋았으나 당시만 해도 자료와 연구 부족으로 곳곳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 오류를 바로잡고자 관람한 다음날인 4월 22일 <오마이뉴스>에 「여전히애매한‘친일음악의 진상’」 이란 기사를 기고하였고, 연구소와의 전화통화를 통해서 사실을 정확히 기록, 전달해야 한다는 저의 생각을 표명했지요. 이것이 연구소와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친일가요의 한 분파인 군국가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6월부터 <오마이뉴스> 에 「일제침략전쟁에동원된유행가,‘군국가요’다시보기」 를 연재하기시작했습니다. 군국가요의 정의와 성격, 시대적 배경, 개별 군국가요의 분석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여 장장 1년간 45회에 걸쳐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2009년 정부 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대중가요부문 조사위원으로 참가했고, 그해 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에 군국가요 관련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문 : 〈군국가요 40선〉 제작이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는데 음반 수집 등 제작과정에서 애로사항은 없었는지요.

답 : 제가 연구소에 음반 제작을 건의한 게 작년 여름이었습니다. 제가 유정천리 회원들과 의논하여 군국가요 예비 목록 7, 80곡을 추려봤습니다. 이 중에서 음질이 양호하고 노랫말이 군국가요라 칭할 만큼 선동적인 것을 골라 40곡을 선곡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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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원 중에는 가요 역사를 두루 꿰고 있는 분, 일제시대 희귀음반 소장가, 음반 제작 전문가까지 골고루 있어서 음원 발굴과 복각, 제작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듯이 박찬호 선생이 소장한 귀중한 음반을 비롯하여 제가 일본에서 경매로 구입한 SP, 그리고 다른 네 분의 SP의 복각을 통해 음원이 마련될 수 있었습니다.
연구소와 협의과정에서 〈군국가요 40선〉이 판매용으로 제작되는 만큼 여기에 수록된 곡들의 저작권문제가 크게 우려되기도 했는데, 사단법인 함께하는음악저작권협회・한국음반저작권협회를 통해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두 협회에 우리가 필요한 곡 목록을 보내 사용허가를 요청했고 그 곡들에 대한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일부 곡들은 50~70년의 저작권 시효가 지난 것도 있고 저작권 등록이 안 된 것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골치를 썩인 것은 불분명한 가사 확정 문제였습니다. 70, 80년이 지난 음반들이라 마모되거나 깨진 부분이 있어 가사가 잘 안 들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국가요 40선〉 1번곡으로 수록된 ‘동방의 용사’ 가사 중 2절 “〇〇〇 〇〇 앞에 〇명의 용사”에서처럼 가사 확정이 안 되는 경우 〇로 표시했습니다.

문 : 군국가요라는 이미지가 언뜻 부정적으로 인식될텐데 유족과 회원들의 문제제기나 이견 등은 없었나요.

답 : 좋은 노래도 많은데 굳이 부정적인 이미지의 군국가요를 제작하느냐는 일부 회원이나 유족의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7년부터 1943년까지 대중가요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군국가요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여 일반인에게 당시의 전시상황을 온전히 느끼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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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작업에서 군국가요라고 낙인 찍혀 있던 남인수의 ‘감격시대’가 전혀 친일이나 군국과는 무관한 보통 유행가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노래는 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1939년 4월에 오케레코드에서 발표된 것으로 희망 찬 청춘을 구가하는 노래입니다. 친일이나 전시동원을 표현하거나 암시하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남인수가 ‘그대와 나’(1941)와 ‘강남의 나팔수’(1942) 등 여러 군국가요를 불러 <친일인명사전>에등재되기도했지만,그가부른노래라고모두 군국가요로 단정지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이 노래가 나온 1939년은 군국가요가 발매되지 않은 시기임을 당시 신문・잡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 : 〈군국가요 40선〉에 수록되지 못한 곡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후속작업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나요.

답 : 〈군국가요 40선〉 가사・해설집 말미에 ‘선집 미수록 군국가요 목록’이라 하여 24곡의 곡명을 밝혀놓았습니다. 40곡을 선곡하는 데 있어 음질이 좋은 것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따라서 남은 24곡은 이보다 떨어지는 것이지요. 상태가 양호한 같은 곡의 SP나 새로운 노래의 음반이 발굴된다면 40여 곡을 모아 〈군국가요 40선〉 Ⅱ도 제작하기로 연구소와 합의한 상태입니다.
그 밖에도 일제시기에 제작된 다양한 음반들 즉 1931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宇垣一成)의 연설, 김옥균 찬양가, 조선어 나니와부시(일본식 판소리), 만주이민 장려 등 국책을 선전하는 노래들을 복원하고 싶습니다.
일제는 1933년 5월 22일 부령 제47호로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을 공포하고 ‘치안방해’와 ‘풍속괴란(風俗壞亂)’이란 이유로 온갖 금지곡을 양산해 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리랑’과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도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금지곡 모음집이란 주제로 복각본을 제작하는 것도 충분히 시도할 만한 작업입니다. 금지곡 하면 홍난파의 ‘봉선화’가 많이 거론됩니다. ‘봉선화’는 홍난파가 1920년 4월 ‘애수’라는 기악곡으로 만들었고, 훗날 김형준이 가사를 부쳐 널리 불리게 된 노래입니다. 그런데 금지곡 관련 내용은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이고 언제 무슨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지금껏 확인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1942년 6월 소프라노 김천해가 경성후생실내악단 단원으로서 서울 부민관에서 이 노래를 불렀고 이후 지방순회공연에서도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1942년 당시까지 금지곡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해방 직후에 나온 ‘광복가요’나 4·19혁명 후 제작된 혁명가요 등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들도 많은데 이를 복원하는 작업도 뜻깊은 일이 될 것입니다.

문 : 끝으로 〈군국가요 40선〉 제작의 의미와 연구소와 함께 작업한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이번 선집은 군국가요의 실상을 가장 정밀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울러 군국가요에 관한 오해를 푸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감격시대’ 같은 경우 군국가요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2006년에 한국음악협회 경기도지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1년 반이란 긴 공동작업 끝에 <난파홍영후 연보>를출간한적이있습니다.객관적사실을근거로홍난파연보를만든것인데꽤나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군국가요 40선〉 공동 제작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정천리와 민족문제연구소가 비록 지향점이 다를지라도 식민지 시대의 아픈 과거사를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 왜곡된 것을 바로잡아 보다 나은 역사적 결과물을 함께 만들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앞으로도 연구소와 함께 의미 있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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