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아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하고 일본어 상용과 창씨개명・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더욱이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에서의 전시통제는 훨씬 강화되어갔다. 이듬해 홍원경찰서와 함경남도경찰부가 사소한 일을 침소봉대하여 조선어학회 회원 30여 명과 저명인사 50여 명을 피의자와 증인으로 연행하여 1년 동안 무자비한 고문과 겁박을 가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국체(國體)를 변혁하고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그 정(情)을 알고서 이에 가입한 자”를 처벌하는 치안유지법 제1조 위반 혐의를 씌웠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1942년 7월 박병엽(메이지대학 졸업생)이 함경남도 홍원읍 전진역에서 친구 지창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원경찰서 후카자와 형사가 한복 차림의 박병엽을 수상히 여겨 검문하자, 홍원읍 유지의 자제인 박병엽은 퉁명스럽게 응대했고 홍원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홍원경찰서에서는 형사들을 파견하여 그의 집을 샅샅이 수색했다. 특별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나, 야스다(安田稔, 본명 안정묵安禎默)라는 조선인 형사가 박병엽의 조카딸 박영옥의 일기장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증거로 압수해갔다. 며칠 후 야스다는 일기장에서 “국어(國語, 일본어를 말함)를 상용(常用)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일제의 국어상용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한 교사를 검거하기 위해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4년생인 박영옥을 비롯해 그의 친구 최순남 이순자 이성희 정인자를 연행하여 취조하였다. 이들이 며칠 간 버티다가 형언하기 어려운 고문에 결국 김학준 정태진 두 교사를 지목하고 말았다. 김학준은 영생고등여학교의 공민 선생으로 재직중이었고, 정태진은 1941년 5월에 7년간 재직하던 영생고등여학교를 사직하고, 정인승의 권유로 조선어학회로 전직하여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한글 사용을 권장하고 일제의 패망과 조선민족의 부활, 임진왜란 때 계월향의 순절 이야기 등을 들려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에 힘썼던 것이다.
홍원경찰서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치안유지법의 내란죄에 해당하는 범죄로 인식하고 정태진에게 출두명령서를 발부하였다. 1942년 9월 5일 홍원경찰서에 도착한 정태진은 야스다를 비롯한 고등계 형사로부터 갖은 고문과 협박에 시달렸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정태진은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선어사전을 편찬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수십 가지 범죄사실을 열거한 허위 자백서를 썼다. 그해 10월 1일에 이극로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한징 이윤재 이희승 정인승 권승욱 이석린 등 11명의 조선어학회 간부가 검거되었으며, 이듬해인 1943년 3월까지 이우식, 김법린 등 전국 각지에 있던 조선어학회 회원 및 사전편찬 후원회원들까지 잡혀가 총 33명이 검거되었다. 아울러 곽상훈과 김두백 등 50여 명이 넘는 증인이 홍원경찰서로 끌려와 온갖 고초를 겪으며 거짓 진술과 자백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조선어학회사건의 경과
홍원경찰서는 1942년 10월부터 심문하기 시작하여 조선어학회사건을 허위 날조하고 관련 피의자들을 치안유지법 제1조의 죄목을 뒤집어씌워 1943년 3월 중순 검사국에 송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때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送局)되면 일단 갖은 고문을 받았던 홍원경찰서를 벗어날 수 있고 검사한테 고문과 위협으로 거짓 자백한 것을 밝힐 수 있다는 희망을 잠시 가졌다. 하지만 이 사건을 맡은 아오야기(靑柳五郞) 검사는 홍원경찰서에서 출장 심문을 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검찰과 경찰의 합동작전에 의해 홍원경찰서의 날조된 수사기록을 그대로 추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1943년 9월 12일 검사측은 피의자 33명 중에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윤경 등 28명을 함흥형무소 구치소로 이감시켰다. 이감 다음날부터 피의자들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다시 심문을 받기 시작해 김윤경 정인섭 이병기 등 12명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9월 18일 석방되었다.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등 나머지 16명의 피의자들은 1943년 겨울 유례없이 찾아온 한파를 견뎌야 했는데, 결국 모진 고문과 혹한으로 인해 이윤재가 그해 12월 8일 옥사하고, 이듬해인 1944년 2월 22일 한징이 그 뒤를 따랐다.
1944년 9월 30일에 열린 예심공판에서 장지영과 정열모가 면소(免訴) 처분을 받아 석방되고 12명의 피고가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1944년 11월 말경부터 함흥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진행되었는데 주심 판사는 일본인 니시다(西田)였고, 한격만 박원삼 유태설 변호사와 일본인 나가시마(永島雄藏) 변호사가 변론을 맡았다. 하지만 “조선어사전 편찬의 목적은 조선어 보존으로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있고, 민족문화의 발전은 곧 민족정신 함양으로 직결된다. 민족정신이 고조되면 궁극적으로 조선 독립을 기도하게 된다”는 검사측 논지가 받아들여져 1945년 1월 18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다음과 같은 형량이 언도되었다.
징역 6년 : 이극로 / 징역 4년 : 최현배
징역 3년 6월 : 이희승 / 징역 2년 : 정인승 정태진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 김법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
무죄 : 장현식
이 재판 결과 무죄와 집행유예로 7인이 풀려나고 나머지 5인의 피고인이 상고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놓였는데, 복역기간이 몇 개월 남은 정태진만 상고를 포기하고 4인은 1945년 1월 21일 고등법원에 상고를 제기했다. 당시는 전시(戰時)라 고등법원이 최종심이 되어 경성고등법원에서 이 사건을 맡게 되었다. 원래 고등법원 재판이면 경성형무소로 이감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종래 무소식이었다. 전쟁 말이어서 서류 심사만의 약식 재판으로 8월 12, 13일경 최종 판결이 내릴 것이라는 소문만 떠돌 뿐 서울과의 연락마저 두절된 상태였다. 마침내 8·15 광복으로 8월 17일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함흥형무소에서 출소하여 19일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편 최종심의 판결문이 발견되지 않아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을 뻔했으나 『동아일보』 1982년 9일 3일자에 경성고등법원 판결문이 공개되어 다행히 수수께끼를 풀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경성고등법원은 일제 패망 이틀 전인 1945년 8월 13일에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유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온갖 수단으로 고문한 조선인 형사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심문하고 조사한 자들은 홍원경찰서와 함경남도경찰부 고등경찰과 소속 형사들이었다. 당시 사상사건을 도맡아 수사했던 홍원경찰서와 함경남도경찰부 고등경찰과 형사들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문과 날조를 일삼기로 유명했다. 조선어학회사건을 수사했던 당시의 조선인 형사들의 이름과 직급은 다음과 같다.(<조선경찰직원록>, 조선경찰협회, 1943)
〈홍원경찰서〉 13명
三和大容(경부보 55급봉, 함남) 安田稔(야스다 미노루, 안정묵, 순사부장 50급봉, 함남)
白川勝久(순사부장 50급봉, 함남) 宮本眞成(순사부장 50급봉, 함남)
德山義(日+睿)(순사 49급봉, 함남) 松井秀夫(순사 43급봉, 유도초단, 함남)
利川龍雄(순사 41급봉, 함남) 眞木秀男(순사 41급봉, 함남) 伊東輝元(순사 39급봉, 함남)
三井貞雄(순사 37급봉, 함남) 西尾厚頊(순사 37급봉, 함남) 三山範模(순사 37급봉, 함남)
新原東哲(니이하라, 박동철, 순사 50급봉, 함남, 홍원서 전진주재소)
〈함경남도경찰부 고등경찰과〉 17명
大原炳熏(주병훈, 경부보 55급봉, 함남) 鶴川泰雄(순사부장 52급봉, 경기)
淸原壽雄(순사부장 50급봉, 충북) 永原進吉(순사부장 49급봉, 함남)
延川鍾直(순사부장 47급봉, 함남)
高山昇(순사 51급봉, 함남) 白川淸一(순사 50급봉, 함남) 廣川秀夫(순사 49급봉, 함남)
安本忠正(순사 47급봉, 함남) 松山茂(순사 47급봉, 함남) 光山宗學(순사 46급봉, 함남)
柴田健治(시바타 겐지, 김석묵, 순사 45급봉, 전남) 金坡幸則(순사 45급봉, 함남)
新井驥一郞(순사 43급봉, 함남) 金村淵郁(순사 43급봉, 함남) 大島夏鏞(순사 39급봉, 함남)
* 출신지에 근거하여 조선인으로 추정함
사건 초기에 이들 중 10여 명의 전담 취조반이 편성되어 홍성경찰서 연무장 마룻바닥에 책상과 걸상을 놓고 피의자 33명을 심문하고 조서를 썼는데 그들이 짜맞추어 놓은 내용대로 진술하지 않거나 허위사실을 자백했다고 하더라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구타와 고문을 일삼았다. 이중에도 가장 악명을 떨친 자는 박정옥의 일기장에서 불온한 글귀를 찾아내 조선어학회사건을 야기시킨 야스다(안정묵)와 함경남도경찰부 고등경찰과에서 파견된 시바타(柴田健治, 金錫默)였다.
야스다는 1933년 홍원경찰서 순사(36급봉), 1934년 홍원경찰서 희현주재소 순사, 1937년 용원주재소 순사(38급봉)를 지냈고 1940년에는 함경남도로부터 지금의 모범공무원 표창장이라 할 수 있는 정근증서(精勤證書)를 받기도 했다. 1943년 무렵 야스다는 홍원경찰서 고등계 순사부장으로 가장 악질적인 방법으로 회원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정인승은 야스다의 잔혹한 고문 수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이윤재와 이희승을 맡고 있던 「야스따」는 이 사건을 처음부터 발단시킨 자로서 횡포가 심했다. 그때만 해도 정말 우리 한글학자들은 순하디 순한 어린양이었다.(중략)
특히 비행기태우기란 고문을 당하고 나면 열이면 열 모두 얼이 빠져 그저 ????사실이지????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고개만이 저절로 끄덕여졌다. 비행기태우기란 두 팔을 등 뒤로 젖혀서 두 손을 한데 묶어 허리와 함께 동여 놓고 두 팔과 등허리 사이로 목총을 가로질러 꿰어놓은 다음 목총의 양끝에 밧줄을 묶어 연무장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빙글빙글 돌려서 밧줄을 꼰 다음 탁 놓으면 빙글빙글 빨리 돌아 정신을 잃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십자가모양 매달린 팔이 비틀려 그 아픔은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이 고문을 그들은 공중전이라 불렀고 물 먹이기를 해전, 죽도나 목총으로 마구 때리는 것을 육전이라 했다.(「조선어학회 사건」(8), <중앙일보> 1972.11.30)
시바타는 함경남도경찰부에서 파견나온 악질 형사로 장지영과 정인승 그리고 김선기를 주로 맡았다. 전남 제주도에서 태어난 그는 이윤재의 제자였다. 처음에는 이윤재에게 깍듯이 인사하더니 며칠 후부터 취조받고 있는 이윤재에게 다가가 욕을 퍼붓고 마구 때렸다. 시바타는 ‘고문왕’이라 불릴 정도로 잔혹했는데, 증언에 따르면 “생리적으로 매를 때리는 것에 쾌감마저 느끼는 듯 한차례 매를 들고 사람을 치면 칠수록 흥이 나는지 그의 매는 더욱 사나와지고 매서워지는 것이었다.”고 한다.(상동) 그에게는 엉뚱한 면도 있어 하루는 이극로과 정인승에게 독립정부를 세워 각각 대통령과 문부대신을 하기로 했다는 날조사실에 대해 자백하라고 구타하기도 했다. 이처럼 악랄했던 시바타는 마침내 심신이 쇠약했던 이윤재와 한징을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수많은 피의자를 반신불수로 만들고 말았다.
야스다와 시바타의 악행에 대해서는 해방 후 발간된 <매일신보> 1945년 10월 10일자에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담임형사는 호랑이형사라고까지 이름난 안정모安貞模(安禎默의 잘못)란 자와 함경남도경찰부에서 응원온 창씨명 柴田健次(제주도 출생 김모로 그 후 경기도경찰부로 전근/김석묵)란 자로 때로는 천정 대들보에 두 팔을 끌어매어 달아놓기도 하고 혹은 목총이나 죽검으로 몇 놈의 형사가 보리타작하듯 치기도 하고 개짐승같이 마룻바닥에 엎드려 꿇어놓기도 하고 같이 취조받고 있는 동지까지 서로 맞세워 놓고 죽검으로 마주 때리라고 강박도 하고 혹은 유도로 볏단을 던지듯 둘러메 꽂기도 하고 몽둥이로 몇 놈의 형사가 떡치듯 돌아가며 내치기도 하고 혹은 콧구멍에 물주전자를 대고 붓기도 하여 날이면 날마다 야만적인 고문이 우리 선생들의 약한 몸 위에 그칠 때가 없었다. 그때마다 우리 선생들은 한참씩 까무러쳐 버리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1946년 4월의 두 장면
1945년 8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곧바로 조선어학회를 다시 소집하여 모임을 갖기 시작하고 21일에 총회를 열고 “조선어학회는 정치에 관계없이 불편부당, 한글 보급과 교육에만 힘쓴다”는 성명서를 발표, <한글 첫걸음>을 제작하여 우리말 보급에 앞장섰다. 기적과 같은 일은 조선어학회사건 때 일제 경찰에 압수되어 재판 자료로 이용되었던 한글사전 원고가 9월 8일 서울역 운송부 창고 속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이것을 바탕으로 한글사전 편찬사업을 재개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해 10월 9일 광복을 맞아 처음으로 맞는 한글날에 천도교회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한 후 고 이윤재・한징 선생 추도회를 열었다.
이극로 이사장의 사회로 이윤재・한징의 약력 보고에 이어 각계 각층의 추도사가 이어져 두 분의 명복을 기원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4월 6일, 이윤재의 유골 안장식이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에서 있었다. 이윤재의 아들인 이원갑이 1943년말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다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유골을 수습하고 돌아와 광주군 중대면 자택 주변 땅에 봉분도 없는 가묘를 만들어 묻어놓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회 인사들이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이윤재선생장의준비위원회’를 꾸려 묘지와 비석 등을 마련하고 안장식 행사를 준비했다. 이날 식장에는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동네 사람과 방이리 한글강습소 학동들의 참예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국어학자 환산 이윤재님 무덤’이라 새긴 비석 앞에서 안장식이 거행되었는데 이극로의 개회사에 이어 아들 이원갑의 유물 봉안,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성토(盛土), 김윤경의 약력보고 및 행장, 조소앙 등의 조사, 이회승 장의준비위원의 보고 그리고 봉분 다지기 순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한편 같은해 4월 11일에는 이윤재・한징 선생을 고문하여 죽게 한 김석묵(金錫默, 39세)의 본정서(本町署, 지금의 서울 중부경찰서) 독직죄(瀆職罪) 공판이 서울지방법원 제3호 법정에서 개정되었다. 김석묵은 1943년 조선어학회사건 수사의 혁혁한 공로(?)로 경기도경찰부로 영전되었다. 해방 때까지 사상사건 검거취조의 원흉인 고등계 경부 사이가(齊賀) 밑에서 독립지사와 선량한 조선인들을 고문하고 겁박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해방 후에도 배짱 좋게 본정서 경부보로 태연히 근무하면서 모리(森)라는 일본인 전당포 주인을 협박하여 30여 만원을 사취하였다. 이 일로 1946년 2월 검거되어 이날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황언한 검사는 “과거의 민족적 죄악사와 해방 후에도 그 자리를 고수하고 불법행위를 감행했다”고 준엄하게 꾸짖은 후 김석묵에게 1년 6개월을 구형하였다. 4월 13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심동구 판사는 검사의 구형대로 1년 6개월을 언도하였다.
이후 김석묵과 안정묵, 그리고 주병훈 박동철 등 조선어학회사건 관련 조선인 형사들의 행적은 신문 잡지, 기타 자료에서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1949년 1월부터 6월까지 진행된 반민특위 조사기간에도 이들의 체포, 기소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이승만 정부 때 악질・고문 경찰의 대명사인 노덕술이나 김태석 등이 이승만과 친일 경찰의 비호 하에 어떤 처벌도 받지 않게 순탄하게 살았던 것에 비추어볼 때, 반민족적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김석묵과 안정묵에 대한 수사나 처벌도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역사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들의 행적을 철저히 추적하여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 단죄해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