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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일 뿐? 테러범 김현희 사면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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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51> 6월항쟁, 서른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당신이 양보하라’ 서로 고집하며 단일화 협상 파탄에 몰아넣은 양김

프레시안 : 1987년 대선은 군부 독재 종식을 열망한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어렵게 얻어냈는데, 12·12쿠데타(1979년)와 5·17쿠데타(1980년)의 주역인 노태우가 바로 그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이 되는 기막힌 모습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틀이 짜인 정치 지형이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1987년 대선을 찬찬히 되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이 선거에서는 양김, 즉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일화해 한 명의 후보로 나오느냐 아니면 각각 따로 나오느냐가 6·29선언 직후부터 아주 중요한 관심사였다. 6·29선언 직후 두 사람은 “(19)80년과 같은 우매한 짓을 하지 않으며”, 이렇게까지 얘기하면서 굳게 단결하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과는 다른 조짐이 나타났다.

7월 9일 김대중이 사면 복권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7월 17일 김대중은 ‘1986년 11월 5일에 했던 대선 불출마 선언은 4·13 호헌 조치로 백지화됐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김대중은 7월 11일 <신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하면 불출마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 선언으로 이미 내 제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약속에 내가 묶여 있어야 하느냐는 논리가 나온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논리였다. ‘편집자’) 8월 27일 통일민주당 내 동교동계가 김대중 후보 추대를 공식화했다.

9월 29일, 마지막으로 단일화를 이뤄내기 위한 두 사람의 담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김대중, 김영삼 모두 상대방한테 ‘당신이 양보하라’는 태도로 나왔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문제의 그 비토(veto) 그룹 얘기를 꺼냈다. ‘김대중 당신을 비토하는 그룹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대통령을 하고 그다음에 당신이 하는 게 순리가 아니오’, 이런 식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 비토 그룹 부분은 당시 계속 나돌던 얘기였는데, 오버도퍼 책에도 이 얘기가 나온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였던 이 사람은 그해 8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을 각각 인터뷰했는데 “김대중의 자택을 찾아가기 며칠 전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은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에 반대한다는 군부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김대중이 선거에서 승리한다 해도 군 지도부가 그를 대통령으로 용납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감이 팽배했으며 군부에서 김대중 암살을 기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오버도퍼가 지적한 이러한 사항은 김대중 자서전에도 나온다. 김대중은 자서전에 “박희도 전 육군 참모총장은 나의 출마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군부 전체의 의견인 양 발표하기도 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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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김의 단일화 담판 결렬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87년 9월 29일 자 1면. ⓒ동아일보

양김 분열 파장으로 민주화 운동 세력마저 사분오열

프레시안 : 양김 분열은 제도권 야당 세력의 분열로 그친 것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서중석 : 단일화 담판이 결렬되면서 결국 김대중과 김영삼, 두 사람 모두 후보로 나오게 된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하는 데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도 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두 사람만이 아니라 백기완이 진보 세력을 대표해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고 하면서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은 세 세력으로 갈리고 말았다. 하나는 ‘비지’, 이건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가리키는데, 다른 하나는 단일 후보 추진을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쪽인 단일 후보론, 마지막 하나는 김영삼과 김대중 모두 마땅치 않으며 독자 후보를 지지해 진보 진영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쪽인 독자 후보론, 이렇게 셋으로 나뉘었다.

이 분열은 단순히 이 대선에서 갈라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씻어내기 어려운 분열 현상을 보여주게 된다. 또 6월항쟁에서 민주화를 쟁취하는 데 핵심 동력이었던 민주화 운동 세력이 분열되고 비판적 지지를 함으로써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전진시키는 데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재야의 중심축이라고 볼 수 있는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양김의 단일화 노력보다는 비판적 지지에 중점을 뒀다. 양김 담판 전날인 9월 28일 민통련은 ‘범국민 대통령 후보 추천을 위한 민통련의 입장’을 발표했다. 여기서 민통련은 반(反)군사 독재 민주 세력 후보 선정에서 방관적 태도는 잘못이라며 범국민적 후보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범국민적 후보로는 김대중을 많이 상정하고 있었고, 이 범국민적 후보를 결정하는 것도 민통련이었다고 볼 수 있다.

10월 12일 민통련의 24개 가맹단체 표결이 있었는데, 표결 결과 비판적 지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다음 날인 10월 13일 민통련은 범국민적 후보로 김대중 고문을 추천한다고 발표했다.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11월 17일 민통련은 군부 독재 타도 공동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범국민 후보를 적극 지원하자고 나섰다. 선거 막바지인 12월 11일에는 민통련 가맹단체와 노동 운동 단체 등을 열거하고 ‘범국민적 단일 후보는 김대중 선생으로 결정됐다’는 부제가 붙은 공동 성명서를 발표해 단일 후보론, 독자 후보론을 비난하고 “유세 열기나 권위 있는 주요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대중 선생의 압도적 우위가 판명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 민통련의 그러한 행보,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민통련의 주장에는 논의해야 할 것들이 있다. 민통련은 기본 과제 또는 우선적 과제와 부차적 과제 또는 2차적 과제를 혼동했다. 민통련은 1985년부터 시종여일하게 군부 장기 집권 야욕을 분쇄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재야 단체보다 직선제 쟁취에 기울어져 있었다. 직선제를 통해서만 독재 권력을 축출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을 가졌다면 민통련은 양김 중 누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가를 가지고 대선에 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대선을 통해 군부 독재 세력을 제거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양김 중 누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가를 따지기보다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 모두 진보적인 쪽으로 가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민통련은 6·29선언이 나온 이유를 재삼재사 떠올릴 필요가 있었다. 6·29선언이 나온 첫 번째 이유는 전두환 정권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런데도 군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전두환 정권 쪽에서 양김이 단일화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직선제를 받아들일 경우 김대중을 사면 복권한다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여겼다.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 사면 복권, 이 두 가지는 항상 따라붙게 돼 있었다. 왜 그랬겠나. 양김이 동시에 나오면 전두환, 노태우, 민정당은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건 일반 국민들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했다.

굵직한 쟁점은 묻히고 인파 동원 경쟁 난무

프레시안 : 그런 상황에서 이른바 4자 필승론(1노 3김, 즉 노태우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대결하는 구도에서는 김대중이 반드시 승리한다)이라는 이상한 주장까지 김대중 쪽에서 나오지 않았나.

서중석 : 김대중 측에서 제기한 4자 필승론도 문제를 안고 있었다. 4자 필승론은 망국적인 지역 갈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발상이었다. 1987년 대선에 양김 중 한 명만 나오고 5년 후인 1992년 대선에 다른 한 명이 나오기로 하면서 양김이 협력했다면 군부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은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영호남 갈등을 약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대선은 1971년 이후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이었다. 1972년 유신 쿠데타 이후 15년간 파시즘적 독재 통치를 받다가 치르는 대선이었기 때문에 굵직굵직한 쟁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도, 거의 모든 여론의 신경이 양김의 통합과 분열 문제에 집중되다보니까 정작 선거에 들어가서는 오히려 아주 싱거운 선거가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쟁점이 별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까 세 후보(노태우, 김영삼, 김대중)는, 한계가 뚜렷했고 누구도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김종필을 제외한다면, 자신의 세가 다른 두 후보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유세장에 엄청난 인파를 동원했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국군의 날에 위압적인 대규모 군 퍼레이드가 벌어졌던 여의도광장에 100만 명 이상을 김대중은 11월 29일 유세에서, 김영삼은 12월 5일 유세에서, 노태우는 하필이면 12·12쿠데타 8주년이 되는 12월 12일 유세에서 동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엄청나게 많은 차량이 그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고 섬에서까지 왔다고 신문에 보도됐다.

대선 기간에 터진 KAL기 폭파 사건…노태우 측, 선거에 최대한 활용

프레시안 : 1987년 대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안이 KAL기 폭파 사건이다. 유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겼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이런저런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서중석 : 이 선거에서 큰 쟁점이 제대로 제기되지도, 부각되지도 않았지만 선거 기간에 초대형 사건이 일어났다. 현지 시각으로 1987년 11월 28일 밤(한국 시각으로는 29일 새벽)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공항을 경유한 KAL기가 서울로 오던 중 버마(미얀마) 상공에서 공중 폭발해 승객 95명, 승무원 20명 등 탑승자 115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은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피격 사건(1974년), 김대중 납치 사건(1973년), 김형욱 납치·살해 사건(1979년) 못지않게 엄청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에 대해 숱한 의혹이 제기됐지만,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라고 본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우선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는데 왜 이 시기에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났는가, 무엇 때문에 KAL기가 공중 폭파됐는가,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이다. 범인 중 한 명인 김현희의 경우 아주 하부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째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선거 중반전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대선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왜 북한에서 이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 쪽에 유리한 이런 사건을 일으켰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사건은 북풍의 원조라고도 불리는데, 나중에 일어나는 북풍은 남북이 짜고 한 것이라는 얘기가 많이 돌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그렇게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이처럼 있을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도 그렇고, 이런 사건을 선거에 악용하면 당연히 그것에 따른 의혹이 커질 것이기 때문에도 민정당 측에서 이 사건을 선거와 무관하게 다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민정당은 조직적으로 이 선거에 이 사건을 이용했다. 김대중, 김영삼 모두 이 사건 때문에 자신이 낙선했다는 주장을 했다.

프레시안 : 양김은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한 것인가.

서중석 : 먼저 김영삼 회고록을 보자. “대한항공기 공중 폭파 사건은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유권자들의 불안 심리를 크게 자극했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나에게 가장 큰 타격이 왔다.” 이렇게 써놓았다. 그러면서 “투표를 하루 앞둔 12월 15일 전두환은 KAL기 폭파범 마유미를”, 김현희를 말하는데, “바레인에서 서울로 이송함으로써 노태우에게 엄청나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6월 민주 항쟁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해온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여망이 KAL기 폭파 사건의 거센 바람에 날아가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썼다.

김대중은 이렇게 얘기했다. “이때 대한항공 폭파 사건의 범인이라는 김현희가 선거 전날 한국에 끌려왔다. 그것은 나에게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모든 언론은 김현희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연(히) 국민들의 관심도 그쪽으로 옮겨갔다. 이는 노태우 후보 진영에 절대 유리했다. 사람들은 다시 ‘안보 무드’에 젖어들었다. 여기에 맞춰 노태우 후보 진영에서 일제히 색깔 공세를 개시했다. 안정이냐 혼란이냐는 구호를 외치며 국민들을 선동했다. 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떠내려간다고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프레시안 : 각종 여론 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다는 김영삼 얘기, 근거가 있는 주장인가.

서중석 : 어림없는 소리다. 김영삼, 김대중의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민정당 측이 이 사건을 선거에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 조사에 따르면, 안기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사업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 이 사건 직후인 1987년 12월 2일부터 KAL기 실종 사건이 북한의 공작임을 폭로, 홍보하는 무지개 공작을 추진했다. 그리고 안기부 주관으로 12월 9일부터 전국에서 궐기 대회를 개최한다는 등의 계획을 세웠다. “무지개 공작과 정부 대책 회의 보고 자료 등을 볼 때 KAL 858기 사건을 여당의 대선 후보에 유리하게 이용한 점”을 확인했다고 국정원 과거사위는 결론을 내렸다.

테러범 김현희는 어떻게 대법원 판결 16일 만에 사면됐나

정공채 시인

▲ 대선 전날 김현희가 서울로 이송된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87년 12월 15일 자 11면. ⓒ경향신문

 

프레시안 : 이 사건과 관련해 중요한 세 가지 사항 중 두 번째는 무엇인가.

서중석 : 왜 김현희에 대해 그렇게 빨리 사면 복권을 해줬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그게 이 사건에 대한 두 번째 의혹, 큰 의문이다. 유가족들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처럼 김현희는 보통 큰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태우 정권 때 대법원 확정 판결 후 16일 만에 사면을 받았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이 김현희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이틀 후인 3월 29일 법무부 장관이 사면을 상신했고 4월 12일 대통령이 재가해 사면됐다.

사면 이유도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진범은 북한 지도부이며 그녀는 세뇌당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특별 사면을 했다면, 그 발표대로라면 북한이 일으킨 모든 사건 관련자들도, 심지어 간첩들도 다 ‘세뇌당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사면을 안 시킬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김현희처럼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그런 식으로 특별 사면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건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피격 사건하고도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그때는 수사를 9일 만에 빠르게 매듭짓고 대법원 판결 사흘 후 문세광을 처형했다. 억지로 생각을 해본다면 김현희가 교도소에 계속 있으면 수많은 사람과 접촉할 수 있고 그래서 그걸 차단하기 위해 사면한 것 아닌가, 이런 억지 주장도 나올 수가 있다.

(김현희 특별 사면 다음 날인 1990년 4월 13일 노태우 정권은 이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 대변인인 최병렬 공보처 장관은 “김 양이 극도로 폐쇄된 사회 체제에서 북한 공산 집단의 적화 통일 전략 수행을 위한 인간 도구로 개조돼 이 사건 범행에 투입된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 실질적인 주범은 김일성 부자라는 점을 고려해 사면키로 했다”고 밝혔다.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에 따르면, 안기부는 1988년 11월에 이미 외무부, 문공부, 검찰 등의 관계 기관들과 협의해 ‘형 확정과 동시에 김현희를 구제·활용한다’는 방침을 세워두었다. 또한 희생자 위령탑 건립 작업이 부지 및 예산 확보 등의 문제로 지지부진하다가 1990년 4월 9일 기공식을 열게 됐는데, 국정원 과거사위는 “김현희 사면 3일 전에 위령탑 기공을 한 것은 사면을 고려한 부분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편집자’)

KAL기 폭파 사건 의혹 해소 노력에 끝까지 어깃장 놓은 김현희

프레시안 : 세 번째는 무엇인가.

서중석 : 세 번째로 이 사건과 관련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김현희를 만나려고 장기간에 걸쳐 많은 노력을 했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현희가 면담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2005년 10월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김현희 주거지를 방문해 면담 필요성을 설명했으나, 김현희는 강하게 반발하며 면담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2006년 3월에는 국정원 간부의 면담 요청 서신을 전달했으나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2007년 2월에도 김현희 주거지를 방문해 국정원장 명의의 서신을 전달하려고 시도했으나, 김현희는 이를 또 거부했다. 곧이어 국정원 간부가 직접 김현희 주거를 방문해 김현희 남편과 접촉하고 과거사위 면담에 응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김현희는 이것도 거부했다.

김현희는 숱한 의혹에 싸여 있었다. 유족들은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국정원 과거사위처럼 진실을 알고자 하고 그것을 알리는 곳에서 찾아왔으면, 그런 의혹을 씻기 위해서라도 조사에 응하는 것이 더 좋았던 것 아니냐, 그렇게 해서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었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김현희는 끝까지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국정원 과거사위에 따르면, KAL기 폭파 사건 재조사와 관련해 국정원 TF와 과거사위에서 10여 차례 면담을 요청했지만 김현희는 모두 거부했다. 이처럼 KAL기 폭파 사건 진실 규명에는 비협조로 일관하면서도 일본인 납북 피해자 가족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2009년 3월 11일, 김현희는 수백 명의 기자들 앞에 섰다. 김현희는 북한에 납치돼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진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을 만나 허리를 90도 굽혀 거듭 인사했고, 다구치 야에코의 아들을 포옹하며 울먹였다. 그러면서 KAL기 폭파 사건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KAL기 사건은 북한이 한 테러이고 저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는 유가족이 KAL기 사건이 북한이 한 테러 사건이라고 인정하고 어떤 다른 목적이 없다면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KAL기 폭파 사건 희생자 유족인 동아일보 김재영 기자는 이렇게 썼다. “12년 만에 공개 석상에 나온 그가 처음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희생자 가족이 아니었을까. 비록 ‘유가족들을 위해 조용히 살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첫마디는 ‘나는 가짜가 아니다’가 아니라 희생자에 대한 애도였어야 하지 않을까….”

오마이뉴스에서 민족·국제를 담당한 김태경 기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유가족들에게 사죄하기는커녕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던 김 씨가 이제는 조건까지 내건다. (…) 가해자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적반하장격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 형식으로 보나 (일본인 납치 문제라는) 소재로 보나, 그리고 일본인 피랍 가족을 만나 포옹하며 눈물까지 흘리는 연기력(?)으로 보나 김 씨의 이날 회견은 ‘거물급 (정치) 한류 스타’의 일본 진출 선언 기자 회견 같았다.” ‘편집자’)

양김 분열로 어부지리 얻은 노태우, 득표율 36.6퍼센트로 당선

정공채 시인

ⓒ오월의봄

 

프레시안 : 김현희가 서울로 이송된 다음 날(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대선,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선거 결과 노태우가 투표자의 36.6퍼센트, 김영삼이 28.0퍼센트, 김대중이 27.1퍼센트를 득표했다. 노태우가 당선됐다. 노태우는 득표율에서 김영삼을 8.6퍼센트포인트, 김대중을 9.5퍼센트포인트 앞섰다. 그렇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의 표를 합치면 55.1퍼센트로 노태우의 득표율보다 무려 18.5퍼센트포인트나 높았다.

일각에서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단일 후보로 나왔어도 두 사람이 각각 얻은 표를 합친 것만큼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이건 김대중이건 먼저 누가 나오고 그다음에는 누가 나온다는 확신만 유권자들한테 심어줬다면 그 유권자들의 반응은 비슷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단일화만 이뤘으면 당선은 확실했다.

호남권에서 김대중은 광주 94.4퍼센트, 전남 90.3퍼센트, 전북 83.5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노태우는 경북권에서 대구 70.7퍼센트, 경북 66.4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경남권에서 김영삼은 부산 56.0퍼센트, 경남 51.3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일부에서 부추긴 지역감정, 전두환·노태우 측의 색깔론 공세와 검은돈의 위력 등이 이 선거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지만, 결과를 좌우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권력욕을 앞세운 양김의 분열이라고 볼 수 있다. 노태우 당선 후 양김은 상대방을 탓하는 등의 방식으로 변명했지만, 자신들이 스스로 표현한 대로 “우매한 짓”을 했고 그것이 역사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은 없다. 양김이 주도해 직선제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6월항쟁을 통해 마련해준 직선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쉰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김덕련 전 기자

<2017-04-09> 프레시안

☞기사원문: 꼭두각시일 뿐? 테러범 김현희 사면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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