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이승만암살 미수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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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노인

유시태

▲ 이승만을 저격하는 유시태. 미군 방첩부대 요원이 우연히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임시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나무 단상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하는 사진이다. 단상 앞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고 그 뒤에는 헌병 한 명이 단상을 엄중히 지키고 있다. 그런데 단상 뒤편에 한 노인이 보인다. 몸은 말랐지만 예전엔 힘깨나 쓴 듯 기골이 탄탄해 보이는 노인이다. 주변 풍경과 섞여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는 머리 위로 한 팔을 들고 있다. 손끝에 뭔가를 쥐고 있다. 권총이었다. 1952년 6월 25일 임시수도 부산의 충무로광장에서 6・25 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런데 이날 기념식에서 이승만대통령암살미수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당시 나이 62세였던 유시태. 그는 내빈석에 앉아 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을 시작하자 성큼성큼 단상으로 다가가 총을 겨눴다. 그는 대통령을 향해 2~3발을 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두 불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기사에는 유시태가 총을 쏘려고 할 때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헌병 중위 이범준과 치안국장 윤우경에게 발각되어 저지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시 사진을 보자. 사진으로만 판단한다면 팔의 각도가 펴지는 순간 유시태는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상을 지키는 헌병 뒤에 한 남자가 유시태 쪽을 향해 서있다. 그리고 그와 유시태 사이에 앞머리가 벗겨진 한 남자의 얼굴이 반쯤 보인다.

그들이 유시태의 저격을 저지한 헌병 중위와 치안국장이었을까? 그것을 알 수는 없다. 헌병 중위나 치안국장은 사진 밖에서 갑자기 튀어나왔을 수도 있다. 물론 기사 자체의 오류 가능성도 있다. 기사 작성이 치안당국의 발표에 근거한 탓인지 치안 담당자들의 공로가 한껏 부풀려진 감도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김시현과 유시태

경향신문

▲ 이승만암살미수사건을 최초 보도한 기사. <경향신문>1952.5.27

 

유시태는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진 지 2시간 만에 유시태에게 대통령 저격을 사주했다는 범인이 잡혔다. 당시 나이 70세였던 국회의원 김시현이었다. 김시현이 누구인가? 우리는 작년에 개봉한 영화 ‘밀정’을 통해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당원이자 의열단원으로 1923년 3월 의열단의 ‘제2차 대암살파괴계획’을 주도했던 저명한 독립투사이다. 그는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26년간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일제는 그 기간 동안 4번 체포하여 13년간 감옥에 가두어놓았지만 끝내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해방 후 김시현은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49년 이승만정권의 6월 공세를 경험한 후 현실정치 참여로 돌아서 민국당에 입당했다. 그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동 갑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고 보니 유시태도 낯설지만 전혀 모를 인물은 아니다. 그 역시 의열단원으로서 제2차 대암살파괴계획에 참가했다가 복역한 독립투사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서울의 부호 이인희의 집에 독립자금을 요청하러 갔다가 이인희의 신고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그의 법정 최후진술이 <동아일보>에 실려 있는데 그는 일제 경부 황옥에게 속은 사실을 분통해하면서 “나는 강도가 아니다. 오로지 조선을 위해 일편단심으로 일했을 뿐”이라고 열변을 토했었다.

합리적 의심

그런데 이승만암살미수사건이 벌어진 지 2시간 만에 주범 김시현이 붙잡힌 정황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대통령 저격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에서 사건 발생 2시간 만에 진범을 붙잡다니, 당시 경찰이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이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신뢰로 묶인 오랜 동지 관계였으니 유시태가 김시현의 존재를 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유시태는 가능한 한 끝까지 김시현을 숨기고자 했을 것이다.

혹시 경찰이 현장 수사의 결과로 김시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사건 당시 유시태의 신분을 확인해주고 기념식장 내빈석에 앉도록 도운 것이 김시현이었으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날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미리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은 한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유시태와 동행한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럽다. 더구나 경찰은 사건이 발생한 지 2시간 만인 오후 1시경에 이미 김시현의 주거지를 파악하고 경찰 인력을 보내 그를 검거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사건 다음날인 6월 26일 공보처가 발표한 수사결과도 의심스럽긴 마찬가지다. 발표 내용 중에 김시현이 민국당원 4명과 모의한 사실을 자백했다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김시현은 자신의 행위가 민국당에 손해를 끼치지 않도록 한 달여 전에 미리 민국당을 탈당한 바 있었다. 그랬던 그가 사건 하루 만에 모의자로 민국당원 4명의 이름을 자백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과거 김시현은 어떤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혀를 깨물었던 투사 중의 투사였다. 때문에 그는 후유증으로 어눌한 말씨를 갖게 되었고, 선거 유세 때는 부인 권애라가 대신 연설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건 발생 직후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치안당국은 이미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었고, 수사의 칼날을 어디로 향할 지도 미리 결정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사건의 배후로 민국당을 지목하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것은 한창 진행 중이었던 부산정치파동의 결과를 매듭짓는 것이었다. 이승만암살미수사건,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속속 드러나는 사실들

1952년 8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승만암살미수사건의 제1회 공판이 열렸다. 사상 초유의 사건이어서 내외의 관심이 법정으로 쏠렸다. 김시현은 공판에서 이승만이 민생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으면서 정실인사를 자행하고 권력을 남용한 독재자라고 비판했다. 그는 북한이 상당 기간 동안 전쟁 준비로 분망했음에도 이승만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 전쟁이 발발한 후 국민들에게는 안심하라고 하면서 혼자 남쪽으로 도망쳐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시원치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점,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일으킨 민족의 역적 신성모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주일대사로까지 발탁한 점을 들어 그대로 둘 수 없었다고 저격의 동기를 밝혔다. 김시현에게 일제 강점기의 ‘암살과 파괴’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것이었듯이, 이승만에 대한 암살 시도는 조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공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시현은 유시태와 논의하기 이전에 인천교도소장이었던 최양옥과 암살계획을 논의한 바 있었는데, 최양옥이 이를 듣고 곧바로 치안국 정보수사과에 고발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사건 발생 3일전인 6월 22일에는 치안국 정보수사과 형사들이 김시현을 체포하고 문초한 결과 혐의가 짙다고 판단하여 강제처분을 결정했는데, 치안국장 윤우경이 일선 수사관을 퇴실시키고 30분간 독대한 후 그대로 풀어줬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관련 경찰관들의 증언에 의해서였다. 이후 경찰관들은 김시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자고 상부에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김시현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건 김시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김시현이 법정에서 원래부터 자신은 이승만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탄환 4발 중에 2발이 구입할 때부터 불발탄이었고 나머지 2발도 손수건에 물을 적셔 싸가지고 다니면서 불발탄을 만들었다며, 자신이 일부러 불발탄을 만들고 불발될 것이 확실한 권총으로 암살을 도모한 이유는 애초부터 저격의 목적이 살인이 아니라 권총으로 위협하여 대통령의 각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김시현이 구입하여 유시태에게 줬던 권총과 탄환이 불발될 수밖에 없는 상태였음은 7월 3일 이범석 내무부 장관도 확인해준 바 있었다.

새로운 사실과 증언이 잇따라 터져 나오면서 법정은 혼란에 휩싸였다. 변호사 장후영은 이러한 모든 사실을 종합하여 이 사건이 민국당을 파괴하기 위해 김시현이 경찰의 양해 아래 연출한 연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이 본래부터 진정한 살의도, 암살할 수 있는 무기도 없는 연극이었으므로 살인미수사건은 완전히 무죄라고 주장했다.

암살인가? 모종의 음모인가?

경향신문

▲ 말년의 김시현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현재 역사학계에서 이 사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지만,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김시현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독재자 이승만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호사 장후영의 주장처럼 김시현이 경찰당국과의 교감 속에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자의 의견은 김시현의 오랜 독립투쟁경력을 중시하여 그가 경찰당국과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후자는 이승만암살미수사건이 부산정치파동의 와중에서 민국당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결과에 주목하여 김시현과 경찰당국의 음모 모의론을 긍정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와 증언으로는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내리기가 상당히 힘들다는 것이다. 김시현은 1961년 이종률과의 면담을 통해 자신의 회고록을 남겼지만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선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독재자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권총의 불발로 실패했다고만 했을 뿐, 실행 전 경찰의 조사를 받은 사실이나 살해 목적은 없었다는 자신의 법정 증언 등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면 김시현은 이승만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최양옥의 고발로 거사 3일전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치안국장 윤우경과 원치 않는 독대까지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애초부터 암살 목적이 없었다는 김시현의 법정 진술은 형량을 낮추기 위한 거짓 증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윤우경은 김시현의 암살계획을 이용하여 민국당에 타격을 줄 모종의 음모하에서 그를 풀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윤우경이 김시현의 암살계획을 알고도 풀어준 것을 보면 그는 김시현의 권총이 불발될 것을 확신했거나, 암살 직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김시현이 당시 권총을 “모경사(경찰관)로부터 구입했다.”고 한 점, 이 글 서두에 밝힌 것처럼 암살사건 최초의 보도에서 유시태의 암살시도를 헌병과 윤우경이 모두 막았다고 한 점은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상기해볼 만한 대목이다. 실제로 김시현은 이승만 암살에 실패했고, 윤우경과 이승만 정권은 이 사건을 통해 민국당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부산정치파동을 의도대로 이끌었다. 하나의 사건에 두 개의 의도가 있었으나 하나는 실패로, 하나는 성공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김시현의 말과 행동은 변호사 장후영마저 설득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장후영은 김시현을 불신했고 그 결과 김시현의 이승만 암살은 민국당을 파괴하기 위해 경찰의 양해 아래 연출한 연극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를 근거로 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변호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54년 1월 30일 김시현과 유시태는 대법원 판결을 통해 사형이 확정되었다.

 김시현과 유시태는 4・19혁명 직후인 1960년 4월 28일 형집행정지처분을 통해 정치범 가운데 1호로 석방되었다. 유시태는 석방 소감에서 “그때 목적을 달성치 못한 것이 지금도 원통하다. 학생들의 피의 투쟁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한 것을 살아서 보게 되었으니 당장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했다. 김시현은 “모경사(경찰관)로부터 구입한 권총을 미리 검사해보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 이 대통령이 오늘날 이렇게 하야를 당하게 된 것은 그의 고집 때문”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민국당의 후신인 민주당이 4・19 혁명 이후 정치범 중 가장 먼저 김시현과 유시태를 석방하도록 신경을 쓴 점이나, 김시현과 유시태 두 사람 모두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싸운 민주투사로 인정받는 모습은 아마도 이승만암살미수사건의 역사적 평가에 있어 또 하나의 근거가 될 것이다. 진실은 안개에 가려 있으나 그 안개는 언젠가 맑게 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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