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비망록 24
서울 을지로입구역 쪽에서 남대문로를 따라 보신각 방향으로 걷다보면 이내 도로의 동측에 해묵은 2층 벽돌건물 한 채를 만나게 된다. 서울시 기념물 제19호(2002.3.5)로 지정된 이 건물의 이름은 광통관(廣通館, 남대문로 1가 19번지)으로, 이곳과 바로 이웃한 자리에 청계천 광통교(廣通橋, 광교)가 있다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곳은 원래 1909년에 탁지부건축소가 수형조합사무소(手形組合事務所)의 용도로 건립했으며, 이층에는 회합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곧잘 강연회나 경축연, 만찬회와 같은 모임들이 개최되곤 하였다. 그 시절 한국의 고건축 조사를 맡았던 일본 동경제대(東京帝大) 건축과 교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도 이곳에서 강연회를 열고 그 결과를 담아 <한홍엽(韓紅葉; 카라모미지)>이라는 소책자를 남기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 건립비용을 제공한 대가로 조선상업은행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소유권을 취득한 광통관 전경. 지금은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광통관의 준공 당시부터 이곳에는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의 본점이 옮겨와 상주하였고, 1911년 2월 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으로 개칭된 시기를 거쳐 1924년 9월에 조선실업은행 건물(남대문로 2가 111번지)로 본점 위치를 변경한 이후에도 줄곧 은행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건물 전면의 출입구 상단에 여전히 부착되어 있는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이라는 석판이 이 건물의 오랜 내력을 짐작케 한다.
광통관은 당초 대한제국 정부 소유였으며 대한천일은행은 세들어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건물의 소유권이 조선상업은행으로 귀속된 데는 남다른 숨은 사연이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23년 7월 13일자에 수록된 「상은 건물(商銀建物)과 교환(交換)」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내막을 엿볼 수 있다.
남대문통 일정목 조선상업은행의 기지 건물은 총독부(總督府)의 소유물로 계상(階上)은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가 차용(借用)이던바 총독부는 남대문통 이정목 광선문내(光宣門內) 조선도서관(朝鮮圖書館)을 건축하게 되었는데 건축자금이 무(無)하여 기(其) 건축비 25만원을 조선상업은행에서 지출케 하고 기 대상(代償)으로 남대문통 일정목 기지 건물을 상업은행에 제공하기로 하여 목하(目下) 신축중(新築中)이며 조우(朝郵)는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이전하였으나 10월까지 사용권(使用權)이 유(有)하므로 10월 이후에는 조선상업은행에서 전부 사용하게 되리라더라.
여기에서 보듯이 경술국치 후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전환되어 있던 광통관이 조선상업은행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조선총독부도서관’ 신축이었다. 이를테면 조선상업은행이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건립비용을 대고 그 대신에 조선총독부로부터 광통관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는 얘기였다
1935년 10월에 창간된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기관지 <문헌보국>창간호(제1권제1호)의표지.창간호에는 우가키 총독이 설파한 ‘조선통치의 사상관측소’ 역할과 관련한 항목들이 주 내용으로 채워졌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922년 2월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이 새로이 개정 발포된 것을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구체화하여 1923년 11월 29일에 공포된 ‘조선총독부도서관관제’를 통해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별도의 도서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헌병대사령부 진단소(診斷所) 내에 임시사무소만 설치하였다가 도서관 건물이 대략 완공되자 1924년 4월에 신축 건물로 옮겨 정식으로 사무소를 개설하였다.
하지만 실상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설립에 관해서는 이보다 앞서 하세가와(長谷川) 총독 시절부터 계획수립이 검토된 흔적이 눈에 띈다. 더구나 1918년 11월에는 진남포(鎭南浦)의 실업가 나카무라 세이시치로(中村精七郞)가 경성에 도서관건립기금으로 거액을 기부할 의사를 밝혔고, 이때 조선총독부 영선과(營繕課)의 건축설계와 더불어 도서관 건립위치도 조선호텔 동편의 광선문(光宣門) 안쪽 옛 석고단(石鼓壇, 소공동 6번지 구역.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으로 사실상 확정단계에 이른 적이 있었다. 이 일은 결국 기부자의 기증의사 번복으로 유야무야되고 말았지만, 바로 이 자리는 불과 몇 년 후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신축공사 때의 실제 건립 위치와 그대로 일치한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건립이 마무리되자 1925년 4월 3일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에 맞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도서열람이 개시되었다. 출입자에 대한 열람료는 1회에 4전씩 징구(徵求, 10회권은 35전에 판매)하였으며, 신문열람은 무료였다. 개관 당시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열람시간은 계절별로 다르지만 오전 8시~10시부터 오후 9시까지였고, 매주 수요일, 기원절, 시정기념일, 천장절축일, 연말연시(12월 28일~1월 6일)는 정기휴관일로 정하였다.
<매일신보>1924년1월16일자에는조선총독부출입기자단인청구구락부(靑邱俱樂部)일동에대한 조선총독부 학무국 당국의 설명형식으로 공표된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운영방침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同) 도서관의 이상(理想)은 (가) 특히 조선통치의 주의 방침에 의하여 사상(思想)을 잘 지도하며 교육의 보급, 산업의 진흥 등에 관한 신구 참고도서를 갖출 것, (나) 조선민족의 문헌(文獻)을 모을 것, (다) 널리 조선연구에 관한 화한양서(和漢洋書)를 모을 것, (라) 전선(全鮮)에 도서관의 보급발달을 도모하여 그 지도자가 될 것 등인데 이상의 이상(理想)을 실현함에는 많은 경비와 세월을 요할 터인 고로 동관(同館)은 점진주의를 취하여 가장 건실한 발달을 기할 터이라는데(하략)
1935년 10월 경성에서 개최된 전국도서관대회에서는 당시 우가키(宇垣) 총독이 도서관의 2대 사명으로 ‘사상(思想)의 관측소(觀測所)’이자 ‘양서선본(良書善本)의 선택소(選擇所)’라고 규정한 바 있었다. 이러한 방침을 반영이나 하듯이 조선총독부도서관은 이때 <문헌보국(文獻報國)>이라는 이름의 기관지(機關誌)를 창간했다. 여기에는 신착도서분류목록, 선만(鮮滿)관계중요잡지기사목록, 선내(鮮內)발매금지도서목록, 경무국납본목록, 문부성추천도서소개, 조선총독부도서관비치잡지신문목록, 선내계속발행출판물일람표, 관세월보(館勢月報) 등의 항목이 고정적으로 수록되었다.
<경성과인천>(1929)에수록된조선총독부도서관의전경.앞쪽에정문팻말이보이는 곳이 원래 석고단의 정문인 광선문이 서 있던 자리이다.
이밖에 1937년 1월에 발족한 조선독서연맹(朝鮮讀書聯盟)과 1939년 4월에 창립된 조선도서관연맹(朝鮮圖書館聯盟) 등 이들 도서관 유관단체들의 기관지에도 동일한 방식이 적용되었다. 이곳에도 이른바 ‘불온서적’은 사전에 차단되고 총독정치에 충실한 도서와 서지의 목록만이 선정되어 소개됨으로써 조선인 대중을 사상적으로 지도하려는 문화적 침탈을 보조하는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조선총독부관보>1944년5월12일자에 수록된 ‘도서관월보’를 살펴보면, 이 당시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장서 규모는 정본 275,870책에 별본 47,251책을 더하여 합계 323,121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자료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의 내막과 실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용한 통로가 되고 있다.
<경성부사>제2권(1936)에수록된남산동본원사의정문모습.석고단의광선문을옮겨간것으로왼쪽위에보이는건물은옛 조선총독부 남산청사이다.(왼쪽) <성대신문>제327호(1964.6.1)에수록된대성문(옛광선문)의모습.이 문은1976년에다시해체되어사라졌다.(오른쪽)
그런데 조선총독부도서관에 관한 얘기를 꺼내놓고 보니, 건립부지로 사용된 석고단 영역의 문화재 수난사도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석고단이란 1902년 당시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의 송성건의소(頌聖建議所)가 고종황제의 칭경기념(稱慶記念, 등극40년 망육순望六旬)을 위해 건립된 시설물이다. 고종의 중흥공덕을 ‘돌북[石鼓]’에 새기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제왕의 업적은 오로지 서책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라는 이유로 제작이 중단되었다고 알려진다.
석고각 이전과 관련한 <매일신보>1935년3월23일자의보도내용.사진에보이는 건물은 조선총독부도서관 후면에 간신히 남아 있는 석고각의 전경이다.
이 자리는 이미 1911년 무렵 경성부민회관(京城府民會館)으로 사용되던 시절에 점포 설치를 위해 중문(中門)과 남문(南門), 기타 석재가 방매 처분된 일이 있었을 정도로 진즉부터 수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더구나 조선총독부도서관이 건립된 후에는 석고단 정문인 광선문은 물론이고 석고각(石鼓閣) 자체가 해체되어 잇달아 옮겨지는 등의 수난은 지속되었다.
석고단 영역의 문화재 수난사 일람
이 가운데 광선문은 1927년 남산 조선총독부 바로 아래에 터를 잡고 있던 일본인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팔려 나갔다가 해방 이후까지 용케도 잔존하였으나, 1964년에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다시 이건되어 대성문(大成門)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다. 하지만 1976년에 이 문은 철거 해체되었고 그 부재(部材)의 행방은 알 수 없는 상태이며 주춧돌만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남아 있다.
석고(石鼓)의 보호각에 해당하는 석고각은 1935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추모사찰인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종각으로 사용되다가 1966년에 다시 창경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야외무대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창경궁 복원계획과 맞물려 1984년에 철거되어 사라지면서 지금은 전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조선호텔 구내 황궁우 옆으로 옮겨진 석고의 현재 모습. 원구단과는 전혀 무관하며 조선총독부도서관을 매개로 수난을 겪어온 유물이다.
또한 석고각 안에 놓여 있던 ‘미완성 상태’의 석고 3개는 1936년 여름 바로 이웃하는 황궁우(皇穹宇) 옆에 이전 배치되었다. 이 석고는 지금도 조선호텔의 구내에 그대로 잔존하고 있으나 간혹 원구단(圜丘壇)에 부속된 유적으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한다. 하지만 원구단과 석고단은 건립연대는 물론이고 유래를 달리하는 별개의 공간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석고들이 조선총독부도서관을 매개로 하여 엉뚱한 장소에 터를 잡은 연혁을 알리는 안내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순우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