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으로 가자, 조선! 하시던 조선은 저승길보다 멀었는가.”
잠자고 있던 역작을 깨우다!
20여 년 만에 재출간되는 이규정 장편소설 『사할린』
91년 사할린 현지 취재, 5년에 걸친 집필!
이규정 소설가가 전하는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끌려간 동포들의 애달픈 삶과 꿈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상처, 그 속에서 삶을 일궈가는 사람들에 주목해온 이규정 소설가의 장편소설 『사할린』(전 3권)이 재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은 1996년 출간된 『먼 땅 가까운 하늘』을 새롭게 편집하여 선보이는 것으로, 20여 년 만에 다시금 독자들과 만나게 된 셈이다. 시간은 지나갔지만, 아픈 역사가 남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도 사과 한 마디 받지 못한 위안부 문제가 그러하고,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다. 이규정 소설가는 작가란 존재에 대해 ‘역사의 파수꾼이자 현실의 증거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일제 하 강제 징용 이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이규정 소설가는 오랜 시간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고 91년 사할린 취재에 나섰다. 노트 3권, 녹음테이프 5개, 사진 필름 10통에 담긴 취재 기록들은 이후 5년의 시간을 더해 소설로 만들어졌다. 그 후 다시 20여 년이 지났다. 시간의 장벽을 걷고 이규정 장편소설 『사할린』이 다시금 독자들 곁으로 다가간다.
▶ “그저 어디든지 훨훨 날아서 이 불길한 올가미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사할린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한 맺힌 삶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상처
『사할린』은 러시아 사할린 동포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이다. 1930년대, 사할린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사할린 현지를 방문하는 1990년대 초반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경남 함안, 북한, 일본, 러시아 등을 오가며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여정을 웅장하게 담고 있다. 최숙경과 이문근 부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은 이 부부의 생이별을 중심 갈등 구조로 삼아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동포들의 삶을 보여준다. 1943년, 숙경은 아픈 남편의 약값을 위해 사할린으로 떠나게 된다. 가와카미 탄광에 배속돼 인부 숙사에서 일하게 된 그녀는 그곳에서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을 만나게 되고, 열악한 노동 환경과 일본인 간부들에 의한 비인간적인 고문 등을 접하게 된다. 이 소설은 사할린 탄광촌의 삶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이규정 소설가가 직접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신 분들의 비극적 삶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한스러운 삶이 해방 이후에도 고된 타향살이와 이산가족의 아픔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남송우 문학평론가는 이 소설에 대해 “한민족의 어두운 역사 한 편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기록적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아픔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여러 곳에서 펼쳐졌다. 하지만 사할린 강제 징용 문제는 그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온전히 재구성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몇 세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사할린 동포들의 한스러운 삶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규정 장편소설 『사할린』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할 것이다.
▶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의 굴곡진 역사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사할린』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야기 하나 하나에 집중한다. 뛰어난 특정인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편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사할린으로 떠난 숙경, 가와카미 탄광의 조선인 감독 판도, 탄광에서 탈주한 후 모진 고문을 당하는 남보, 정신대로 끌려가게 된 14살 소분, 하굣길에 일제 트럭에 태워져 강제징용을 당하는 형개 등 사할린으로 끌려간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그들이 겪었던 참혹했던 삶을 그려낸다. 탄광 내에서 벌어지는 조선인에 대한 폭력, 짐승만도 못한 생활, 조선인 탈주자에 대한 고문대회, 정신대로 팔려가는 여성 등의 신랄한 묘사를 통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1945년 해방 이후, 탄광촌에서 건강을 유지한 채 살아남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여기서 병신이 되면 폐갱에 던져져 생매장 되는 것뿐이란 말이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이는 극히 드물다. 숙경도 북해도로 건너가 가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일본인들의 조속한 귀국에 막혀 4만 3천여 명의 한국인들은 사할린에 그대로 방치된다. 독립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반도는 분단이라는 혼돈과 아픔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숙경의 남편 문근이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생사의 고비를 맞이하게 되는 등 해방 이후에도 민초들의 고난은 계속되고,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이들은 사할린 동포, 이산가족이란 이름으로 남게 된다.
▶ “1991년 5월이 어제의 일처럼 기억되면서 그때가 그립습니다.”
첫 출간된 지 20여 년이 넘은 소설에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했다. 일제 식민지하 민족은 갈갈이 흩어졌고, 평범한 사람들은 이유 없는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도둑같이 찾아든 해방의 기쁨도 잠시, 외세에 의한 분단은 고향 땅을 밟고자 했던 민초의 삶을 짓눌렀다. 머나먼 타지에서 무국적자로 남아야했던 삶, 돌아오려 해도 돌아갈 수 없었던 동포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그들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에 소설 『사할린』이 자리한다.
부산 지역 문단의 원로 소설가 이규정은 소설집 『치우』(2013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2014 이주홍문학상 문학부문 수상), 장편소설 『번개와 천둥』(2015 지역출판문화 및 작은도서관지원 우수도서, 2016년 몽골 현지 출간) 등 탁월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되짚어 보고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어루만지는 작품들을 집필했다. 장편소설 『사할린』은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이자 가장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이규정 소설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가 사할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은 20년이 넘었다. 우리 역사의 상처, 우리 민족의 맺힌 한, 이런 것들에 대하여 정부 당국이 미처 손쓰지 못한 일이 있다면 이야말로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 언제까지나 사할린 동포의 그 단장의 망향을 방치해 두고만 있을 것인가, 하는 나름대로의 분노 때문이기도 했다. _ 「작가의 말」 중에서
▲『사할린』 큰글씨책(1~5권)
1991년 5월, 그는 사할린 동포에 대한 소설을 쓰기 위해 무작정 러시아 사할린으로 떠났고 이후 5년이 흐른 1996년 첫 출간을 하게 된다.(당시 소설의 제목은 『먼 땅 가까운 하늘』) 하지만 당시 출판사의 사정으로 책은 곧 절판되어 버리고, 이 이야기는 독자들을 만날 길을 잃어버린다. 이후 한 지역신문 문화부 기자의 재조명을 시작으로 재출간 작업에 들어가게 됐고, 다시금 독자들을 만날 준비를 하였다. 새롭게 편집된 이규정 장편소설 『사할린』은 노년층 및 약시자들을 위한 큰글씨책(전 5권)으로도 만들어져 보다 많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산지니 출판사는 소설 『사할린』을 중심으로 사할린 동포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위안을 줄 수 있도록 관련단체와 협의해 나갈 예정이다.
기억되어야 하는 질곡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 놓여 있었던 사람들.
장편소설 『사할린』를 통해 많은 독자들이 아물지 않은 역사의 상처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이규정 현장취재 장편소설 『사할린』 동영상 산지니 블로그를 통해 공개할 예정
책속으로 / 밑줄긋기
1권_p.49 최숙경은 이 탄광 인부들의 숙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숙사는 2충으로 된 간이 건물이었고, 1, 2층 모두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편에 방이 있었다. 한 방에 40명씩의 조선인 노무자들이 짐승처럼 아무렇게나 지내고 있었다.
1권_p.107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가라후토의 남부 절반 땅을 전리품으로 얻어, 본토의 인구를 그곳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힘을 쏟고 있었고, 조선은 이제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된 뒤였다. 이래서 이몽돌의 손자 현기는 1931년 일본에서 가라후토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의 조부는 그때 50대 초의 나이, 부친은 30대 초반. 현기는 12살이었다.
1권_p.347 보도연맹은 강제적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리끼는 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가입을 하지 않았다가는 어떤 낭패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2권_p.45 그저 어디든지 훨훨 날아서 이 불길한 올가미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든지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한국 안의 새로운 땅, 그런 땅에서 자기 나름의 이상과 꿈을 개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꽃 피워 보고 싶었다. 그러자면 이 새장 속같이 갑갑한 이 환경, 매일 하루가 다르게 조여드는 듯한 올가미를 벗어나야 하는데 날개가 없었다.
2권_p.99~100 숙경을 만나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갈증처럼 전신을 죄어왔다. 이 오랜 갈증을 해소해야만 한다…. 그렇고 말고! (…) 이제 문근은 자신이 사할린으로 가야 하는 것이 오래전에 정해진 숙명이기나 한 듯이 마음속 깊이 결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할린으로 간다!
2권_p.340~341 조선 사람들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서, 2세들의 결혼만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일가친척들 앞에서 올리자던 생각을 바꾸어 나이만 차면 사할린에서 결혼을 시키고 있었다. 요행히 한국사람끼리 결혼이 되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었지만 총각에 비해 처녀가 여전히 부족한 형편이었으므로 웃지 못할 현상도 벌어지곤 했다.
3권_p.29 “남조선 대통령 박정흰가 하는 사람이 우선 남조선 사람 살려놓고 보자고 경제개발에만 힘쓴다 쿠니 경제개발 다 해 놓고 나몬, 저그도 사람인데 우리를 영 잊어삐리기야 하겠습니꺼.”
3권_p.75 조선으로부터 강제로 끌고 와 노임 한 푼 주지 않고 온갖 혹사를 시키다 그것도 부족해 사람을 개 패듯이 패거나 다코베야란 지옥에 가두어 생매장을 시켜 죽여버린 조선인 희생자를 먼저 위로해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조선 사람들은 지금도 허리가 휘고 백발이 된 채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눈앞에서, 가해자인 왜놈들이 자기들 희생자의 위령탑을 세우다니! 아무래도 그냥 참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3권_p.106 89년 말까지 최상필은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한 번 더 받을 수 있었는데, 그사이 그는 민간인이 사할린으로 갈 수 있는가를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어림도 없었고, 사할린 동포의 고국 방문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았다.
3권_p.345 ‘얼마든지 갈 수 있는 땅은 천리 만리보다 더 멀었고, 결코 닿을 수 없는 하늘이 오히려 더 가까웠던 사할린 동포! 그래서 나의 양부나 최상필의 부친은 가까운 땅을 두고, 하늘로 먼저 가셨는가.’
이규정 소설가
경남 함안 출생. 1977년 단편 <부처님의 멀미>를 월간 『시문학』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1979년 계간 『문예중앙』에 의해 80년대의 신예작가 10인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 전개. 소설집 『부처님의 멀미』등 9권과 장편, 동화집, 이론서, 산문집, 칼럼집 등 2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서울) 부이사장을 지내고, 현재 부산의 원로 민주인사 단체인 ‘민족광장’ 공동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종교 활동으로 천주교 부산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부산시문화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 PSB(현KNN)부산방송 문화대상, 가톨릭대상, 부산가톨릭문학상, 이주홍 문학상, 홍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신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2002년에 정년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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