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시론] 5월, 혁명상미성공(革命尙未成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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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우리 민족사에서 5월은 평화와 자유로 아늑한 푸른 계절의 여왕이 아닌, 살육과 탄압의 눈물로 얼룩진 울분의 달이었다. 5・16과 5・18의 긴 질곡 속에서 2017년 5월 9일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생명이 약동하는 5월을 되찾게 해주었다.

실로 멀리로는 유구한 한민족의 자주정신의 승리요, 가까이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념의 구현이자 항일민족해방투쟁 선열들의 염원의 성취이자 민족통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순절하신 모든 영령들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아, 5월의 태양이여, 한껏 화사하게 빛날지어다.

돌이켜보면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0분,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낭랑한 목소리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라는 주문을 또박또박 읽던 그 순간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5월 10일 오전 8시 10분,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의결할 때까지 두 달 동안 온 국민은 정치평론가로 표변했고 방방곡곡이 국회처럼 정치토론장이 되었다. 가족과 친인척, 동창과 고향친구, 직장 등 모든 인간관계가 살벌해질 정도로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치열한 대립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다. 2016년 10월 24일, JTBC가 최순실 게이트를 공개한 이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뤄낸 이 웅혼한 1700여 만 시민들의 촛불혁명은 1987년 6월 시민항쟁 이후의 대선 패배와는 달리 5월 민주선거혁명을 성공시켰다. 흔히들 자발적인 시민 개개인의 참여가 촛불혁명의 성공 요인이라고 편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오랜 기간에 걸친 시민운동단체들의 굳건한 투지와 응집력과 선구적인 향도가 다른 어떤 요소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가장 큰 보람은 민주공화국이란 국가의 위상을 성큼 높여준 국민적 자존감이다. 5・9선거혁명은 박근혜가 4년간 개코망신시킨 국격을 일시에 되찾았다. 비인격적인 정치 지도자 때문에 심리적인 갈등을 겪고 있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유럽 일부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됨직한 이 성취감! 경제적으로는 OECD 가맹국이면서도 정치 문화적으로는 후진국이었던 불명예를 한 순간에 불식시킨 이 통쾌 무비함!

그간 친일 친미 보수정당의 만병통치약이었던 ‘종북좌파’ 배격이라는 안보논리의 약발이 먹혀들지 않게 된 사실 또한 큰 성과다. 분단 한국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미국과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안보의 방파제로 삼아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근혜는 마치 자기 정권만이 미-일의 안보를 보장받은 듯이 국민을 기만해 왔다. 중국과 러시아가 존재하는 한 미국과 일본은 영원히 한국을 방어 전초기지로 사용하고자 통일은 원천봉쇄하고 평화공존조차 훼방 놓아 적대감을 조장시켜 무기장사를 지속하려 획책할 것이다. 이걸 독재세력은 ‘안보’라는 미명으로 포장해 왔는데, 사드배치 문제로 이런 미-일의 음험한 장사속내가 훤히 드러난 것이 이번 대선이었다. 사드는 미-일의 안보용에다 미국의 장삿속, 거기에다 부가가치로 한중 친선을 방해하려는 책략이 깃든 한반도 불행의 판도라 상자에 다름 아니다.

안보의 위장술이 들통 나면서 오랫동안 써왔던 수구세력의 가면이 벗겨져서 그 초라한 진면목이 드러난 것 역시 이번 대선에서 얻은 선물의 하나다. ‘종북좌빨’ 타령 말고는 제대로 된 정책도, 정치철학도 없는 그 민낯은 국가 지도자로서의 품격은커녕 일개 시민으로서의 품성에도 함량미달임이 이미 이명박근혜에 의해 명백해졌다. 마땅한 후계자조차 없는 그 궁여지책의 파장 마당 같은 본색! 그럼에도 차점 득표라는 사실은 경악스럽다. 5・16 쿠데타 세력이 사라졌어야 할 자유당을 리모델링하여 친일-친미-친군부 독재세력으로 뿌리내린 게 오늘의 극우수구가 아니던가.

시저를 죽인 로마는 도리어 공화제를 멸망시켜 황제체제로 굳어져 버렸고, 프랑스 대혁명도 나폴레옹 쿠데타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우리 역시 10・26 후에 또 쿠데타를 겪었고,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직선제 개헌에서도 국민의 열망을 실현시키지 못하지 않았던가.

촛불혁명으로 정권교체는 성공했으나 냉철하게 따져보면 절반의 실패라는 게 이번 대선의 솔직한 성적표이다. 적폐청산의 몸통인 박근혜 지지 세력이 제1야당으로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혁명상미성공(革命尙未成功)을 과제로 남겨준 셈이다.

촛불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정치혁명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제 시민단체들은 샴페인을 미리 터트려도 안 되지만 무리하고 성급하게 과욕을 부려서도 안 될 것이다. 더구나 한반도의 민주주의는 미국과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데, 마침 두 나라의 집권자는 한반도의 행운을 축복할 조짐이 얕다. 탄탄해 보이던 재스민혁명이 시들어버리는 걸 보노라면 혁명의 꽃이 피는 건 한참이래도 지는 건 잠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모든 시민단체들은 더욱 분발하여 이제 저 장엄했던 촛불혁명의 불길이 영원히 타오르도록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 혁명상미성공(革命尙未成功)은 중국혁명의 지도자 손문이 1925년 북경에서 객사하기 직전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 “革命尙未成功 同志仍須努力”의 첫 구절. 그 뜻은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동지들이여 여전히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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