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6월 10일(음력),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와중에 성난 군인들이 창덕궁으로 밀려들자 왕비 민씨(명성황후)는 급히 궁궐 밖으로 도망친다. 홍재희(洪在羲, 홍계훈)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간신히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난 이들 일행이 몸을 숨긴 곳은 화개동(花開洞, 지금의 화동)에 있는 사어(司禦) 윤태준(尹泰駿)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이틀을 머문 뒤에 벽동(碧洞, 지금의 사간동과 송현동 일대)에 있는 익찬(翊贊)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다시 피신하였다가 마침내 6월 15일 서울을 벗어나 저 멀리 여주와 장호원으로 이어지는 도피행로에 올랐다.
이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1903년 무렵 명성황후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석의 건립이 한창 추진된 적이 있었다. 감모비각(感慕碑閣)라고 불렀던 이 비석의 건립 장소로 최종 선정된 곳은 바로 임오군란 때의 피난처로 인연이 있던 화개동 장원서(掌苑署) 터였다. 하지만 이 당시 모금운동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는지 비각은 그럭저럭 완공이 되었으나 비석에 글자를 새기는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한동안 잊힌 감모비의 존재가 다시 부각된 것은 1915년 가을의 일이었다. 이 당시 대정천황(大正天皇)의 어대전(御大典, 즉위식)이 11월 10일에 거행되었고, 이에 맞춘 기념행사의 하나로 선당(禪堂)의 건립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1915년 11월 11일자에는 이에 관한 건립경위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경성묘심사별원(京城妙心寺別院)에서는 거(去) 10일 오전 10시부터 엄숙한 어대전축성기도회(御大典祝聖祈禱會)를 거행하였는데 우(右) 축도회 종료후 고토 노사(後藤老師; 後藤瑞巖)는 어대전기념사업으로 좌(左)의 취지서와 여(如)히 다년 황패(多年 荒敗)에 귀(歸)한조선불법(朝鮮佛法)의 부활을 도圖)하기 위하여 선당건립(禪堂建立)의 지망(志望)을 발표하였는데 내회(來會)한 음량회(蔭凉會) 회원 제씨는 기(其) 지의(旨意)를 익찬하여 시(是)의 기성(期成)에 취(就)하여 극력 외호(外護)하기로 하였다 하며 근래 회심(會心)의 미거(美擧)라 가위(可謂)하겠다더라.
[취지서(趣旨書)] …… 금(今)에 반도(半島)는 아(我) 황국(皇國)에 신부(新附) 이래로 5성상(星霜)을 황은(皇恩)에 흡점(洽霑)하여 만반의 시설이 점차 취서(就緖)하고 백물(百物)이 혁관(革觀)하고 차(且) 금일 우(又) 어대전의 성의에 치(値)할 어능위(御稜威)는 자차(自此)로 유익증휘(愈益增輝)하여 반도의 진운(進運)을 역(亦) 기대할지라. 연이(然而) 사간(斯間) 불법(佛法)을 어찌 이폐(弛廢)에 일임(一任)함이 가(可)하리오.(중략) 차(此) 영신(令辰)에 당(當)하여 자(玆)에 선불도량건립의 지(志)를 발하였으니 시(是)는 감히 명문(名聞)을 일세(一世)에 구함이 아니라 단(但) 반도의 불자(佛者)로 점정(點睛)하여써 황풍영선 제도하창 불일증휘 법륜상전(皇風永扇 帝道遐昌 佛日增輝 法輪常轉)을 원할 뿐이라. 원컨대 유연무연(有緣無緣)은 독지(篤志)의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야납(野衲)의 미지(微旨)를 성취케 하기를 지간지도(至懇至禱)하노라.
이를테면 ‘천황의 치세’가 날로 확장되는 가운데 그동안 피폐해진 조선의 불교도 부흥시키도록 일본인 사찰 임제종 묘심사(臨濟宗 妙心寺, 장사동 182번지) 구역에 새로운 법당을 건설한다는 취지였다. 이에 따라 1915년 11월부터 3년간의 시한을 정해 모금운동을 벌인 끝에 1918년 4월 7일에는 오하라(小原) 농상공부장관과 고쿠분(國分) 이왕직차관을 비롯한 다수의 총독부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지진제(地鎭祭)를 거행하기에 이르렀고, 곧이어 그해 6월 9일에는 상량식(上樑式)이 진행되었다.
이 당시 경학원 대제학 김윤식(金允植) 자작이 지은 ‘상량문’에는 “기념선당을 건립하여 ‘소세지은(昭世之恩; 세상을 밝게 해준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었다. 이때 본당(本堂)과 불전(佛殿)으로 사용될 건물은 모두 다른 장소에 있던 것을 옮겨오는 방식으로 건립되었는데, 이것들의 정체는 옛 탁지부 청사와 화개동 소재 감모비각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니까 광화문 육조앞길에 자리하던 옛 호조(戶曹) 건물이 그대로 옮겨와서 일본인 사찰의 본당으로 변신하였고, 명성황후를 기리기 위한 감모비각은 비석 알맹이를 뺀 채 불전으로 개조되었던 것이다.
묘심사 본당 및 불전의 이건(移建) 연혁
일찍이 감모비는 국운이 기울게 되자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고 더구나 1913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불용관유재산(不用官有財産)의 매각 대상에도 포함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입찰불하목록에는 ‘북부 화개동 소재 감모비’ 일대의 토지(751평)와 건물(25평)이 포함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15일자에 수록된 「낙성된 묘심사의 법당」 제하의 기사에는 감모비각의 이전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시내 장사동(長沙洞)에 있는 묘심사는 대정 4년(1915년) 11월에 어즉위 대전기념으로 데라우치 전 총독과 오하라 농상공부장관과 모리야스 의학박사 등의 명사가 설립위원이 되어 대정 7년(1918년) 4월 7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공사비용 약 1만 5천 원을 들여서 창건한 사찰인데 사진 있는 굉장한 집은 묘심사의 선당이라. 이번에 삼청동에 있는 명성황후 감모비각의 매하(買下)를 받아 선당 위에다가 불전을 지었는데 감모비각 들보 속에서 뜻밖에 조선 은전 5원이 나왔더라. 묘심사의 주지 고토 즈이간(後藤瑞巖)은 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와 그 절과는 인연이 깊다 하여 명성황후의 위패를 그 절에 모시기로 계획하는 중이라 하며 불단은 지금 공사 중인데 이달 안에 준성하리라더라.
여길 보면 묘심사의 불전이 감모비각을 옮겨온 것이라고 하여 그 인연으로 명성황후의 위패를 묘심사에서 모시기로 한다는 구절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묘심사의 선당이 완공된 직후 이곳은 일본 불교가 조선 불교계를 장악하는 근거지로 삼으려 했던 흔적도 드러난다.
<매일신보> 1920년 3월 6일자에는 원래 일본인들만을 포교대상으로 했던 묘심사가 장차 조선사람들에게도 개방된다는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일본 임제종과 조선불교의 합병을 추진하려다가 조선 불교계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킨 친일승려 이회광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묘심사가 개방되고 임제종 조선불교회가 생겨난 후로 4일 오후 1시부터 처음으로 조선부인회 제1회가 묘심사포교당 안에 개최되었는데 정각 전부터 조선 귀부인들은 하나씩 둘씩 점차로 내참(內參)되어 이해창(李海昌) 후작의 대부인과 조명구(趙命九)의 왕대부인과 조경하(趙敬夏) 씨의 부인과 천상궁(千尙宮), 기타 지명가의 귀부인 등 200여 명이나 되는 성황이었었다. 정한 시간 오후 한 점이 되자 고토 즈이간 화상은 삼소거사(三笑居士; 中村健太郞)의 조선어를 빌어서 일반 부인에게 간단한 식사(式辭)가 있은 후에 본회 포교주임은 경상도 합천에 있는 우리 조선에 유명한 대찰 해인사(海印寺) 주지 이회광 화상(李晦光 和尙)이 추천되어 이후부터는 이회광 화상의 주임으로 강연이 늘 있을 것이라고 일반에 소개하는 말을 마친 후에 곧 회광 화상의 심원하고 아름다운 불교강연이 있었는데(하략).
이러한 내력을 지닌 일본인 사찰 묘심사의 흔적은 언제까지 남아 있었던 것일까? 이 대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의 확인이 어렵지만 해방 이후 이곳은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의 차지가 되었다가 1967년 세운상가(世運商街)를 조성할 때 부지의 일부가 이곳에 편입된 것으로 드러난다. 탁지부 청사와 감모비각을 옮겨지은 묘심사의 건물도 이 무렵에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행방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이다. 그나저나 묘심사에 있었다는 명성황후의 위패는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