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낸 고령 피해자들 한 명씩 유명 달리해…“정권 바뀌어 꼭 해결됐으면“
(서울=연합뉴스) 채새롬 기자 =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당한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온 지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오지 않아 원고들이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
특히 피해자 대다수는 팔순이 넘은 고령이어서 배상을 받기까지 ‘시간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이들은 지난 정권에서 대법원이 확정판결을 미뤄왔다며 이제는 한(恨)을 풀어달라고 새 정부에 호소한다. 판결이 늦어지는 데는 정치적·외교적 이유 등의 요인이 있지 않겠느냐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29일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의 자택에서 만난 강제징용 피해자 중 한 명인 김옥순(88) 할머니의 목소리는 비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 할머니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4월 영문도 모르고 일본 도야마에 있는 전범 업체 후지코시 공장에 끌려갔다. 군산국민학교(현 초등학교) 6학년이던 김 할머니의 학급 60명 중 무려 50명이 제비뽑기로 징용자로 선정됐다고 한다.
김 할머니가 귀국한 건 전쟁이 끝나고도 3개월이 지난 그해 11월. 6·25전쟁 이후 서울에서 식모살이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던 김 할머니는 2015년 후지코시 관련 소송을 다룬 방송 뉴스를 보고서 법원에 찾아가 2차 소송부터 참여했다.
그는 “일본이나 한국 정부나 우리 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국가가 판결을 미루고 있으니까 답답하다. 빨리 보상을 받아서 신세 진 사람들(시민단체 등)한테 죽기 전에 보답해야 하는데…”라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후지코시를 상대로 일본과 한국에서 손해배상 소송을 이어온 김정주(86) 할머니도 연합뉴스 통화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김 할머니는 앞서 강제징용을 떠난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13살이던 1945년 2월 역시 도야마의 후지코시 공장에 근로정신대로 끌려가 같은 해 10월까지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일을 해야 했다.
김 할머니는 “돌아와서도 위안부라는 오해 때문에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몇 년 전까지도 TV에 나오는 내 모습을 누가 알아볼까 봐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에 방문할 때마다, 재판할 때마다 흘린 눈물을 다 셀 수도 없다”고 말을 이은 김 할머니는 “같이 소송에 참여했던 다른 할머니들이 한 명씩 죽고 치매에 걸렸다. 너무나도 서럽고 외로운 심정”이라고 했다.
김정주 할머니는 또 “계속해서 소송을 이어와도 정부에서 외교 문제 때문인지 신경을 안 쓰니까 기가 막히고 억울했다”며 “정권이 바뀌었으니 대통령이 꼭 도와주셨으면 좋겠다. 한을 풀고 싶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에서 진행 중인 일제 강제동원 관련 소송은 총 10여건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는 2000년 5월 1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첫 재판부터 패소를 거듭했다.
무려 12년이 흐른 2012년 5월 24일에야 이들은 희망을 봤다. 대법원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2심 판결을 뒤집어 부산고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낸 것이다.
이후 신일철주금,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미쓰비시중공업 등의 강제징용 피해자가 추가로 낸 소송에서 원고가 모두 이겼다.
하지만 정작 대법원은 지금까지 한 건도 확정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중 미쓰비시중공업 사건 원고 6명은 모두 사망했다. 신일철주금 사건 원고도 4명 중 2명이 숨졌다.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한 원고 일부도 유명을 달리해 한국 소송은 유족이 대신 참여하는 중이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관계자는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정권에서 대법원이 확정판결을 피해왔다”며 “대법원은 무조건 신속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정부는 또 추가 진상 규명과 유해조사 및 봉환 사업 등을 추진할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30일 국회도서관에서 일제 강제동원 문제 관련 국제회의를 열고 문제 해결을 촉구할 계획이다.
srchae@yna.co.kr
<2017-05-09>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