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촛불혁명도 역사적으로 평가되고 기록될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것이 이번 촛불혁명은 애당초 ‘역사전쟁’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건국절’로 상징되는 역사전쟁을 시작했고, 이는 국정교과서 문제로 첨예하게 맞붙었다. 박근혜는 권력을 통해 승리하는 듯했지만 촛불민심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 역사전쟁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100년 전쟁>이라는 한 프로그램이 중요한 동인(動因)이 됐다. 이것은 친일의 근원과 독재로 이어지는 고리와 현재를 학술적으로 동영상화한 것으로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박 정권이 이를 그냥둘 리 만무했다. 그런 면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은 박 정권의 극심한 피해자이면서 촛불혁명의 감격적인 승리자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취임 이후 몇 달 동안 불안해 잠을 못 잤다. 박근혜는 3월 13일 청와대에서 이인호(당시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후에 KBS 이사장), 백선엽(군 장성) 등과 오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이인호씨가 우리가 만든 <100년 전쟁>을 ‘국가안보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를 보수신문과 종편이 일제히 보도하면서 우리 연구소가 타깃이 됐다. 이어 4월 이승만기념사업회가 ‘민족문제연구소를 민사소송으로 기둥뿌리 뽑고, 형사로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5단 광고를 전 신문에 냈다. 이승만기념사업회 돈으로 그런 광고를 냈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5월 이승만 유족이 <100년 전쟁> 영화감독, PD, 그리고 나 세 사람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직원들은 지금까지 13번이나 검찰에 불려가는 등 아직까지 고초를 당하고 있다. 임 소장은 “수사를 다한 검사도 기소를 못하니 검사를 바꾸고, 그래도 안 되니 이 사건을 형사부에서 공안부로 보냈다”면서 “외부의 압력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했다.
-박근혜 탄핵에는 역사전쟁을 수행한 시민사회단체들의 역할도 컸다.
“그렇다. 역사문제 등으로 축적된 힘이 최순실 국정농단과 결합하면서 폭발력을 가진 것이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촛불광장에 나왔지만, 자발적으로 나오기까지 수십 년 싸운 시민사회운동이 있었다. 처음에 조직이 움직였다.”
-박근혜는 왜 취임하자마자 ‘역사전쟁’을 시작했을까.
“박근혜의 역사는 첫째 유신시대 통치방법, 더 나아가 아버지의 5·16쿠데타가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두 번째는 친일파에 대한 비판을 완화하려 했다, 건국절 도입과 위안부 문제를 극비리에 일본과 합의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사실 박근혜는 국정교과서 문제 하나로도 탄핵을 당해야 했다. 결국 국민은 친일문제가 과거문제가 아닌 현실의 문제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번 촛불에서 가장 큰 이슈였던 적폐청산은 친일세력-분단세력-독재세력으로 이어지는 70년 적폐를 청산하자는 요구였다.
“그렇다. 박완서가 소설 <오만과 몽상>에서 이렇게 썼다.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 기업인을 낳고, 악덕 기업인은 현이(소설의 인물)를 낳는다’. 거꾸로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도배장이는 남상이(소설의 인물)를 낳고…. 박완서는 진보도 아닌 중도우파적 생각을 가진 소설가인데도 우리나라는 매국노들이 지배한다고 한탄한 것이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친일문제와 독재문제를 논리적으로 까발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미웠을 것이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배분도 이명박 정권부터 완전히 끊기고, 박근혜 정권에선 본격적인 탄압국면에 들어갔다. 심지어 박근혜 정권이 탄핵되기 바로 직전까지 사무실 앞에 스프레이로 낙서테러까지 자행됐다. 뒤늦게 밝혀졌지만 청와대 안종범 수석의 업무수첩에 민족문제연구소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임 소장은 지난해 10월부터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념 시리즈로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했다. 33회로 끝났는데 아쉬운 대목이 많았다.
“처음 30회 계획으로 박근혜 시대까지 하려고 했다. 언론도 무기력하고, 야당도 무기력하니 누군가 불을 지펴야 하는 것 아닌가 했다. 그런데 시대별로 중요한 사건을 미리 꼽았어야 하는데, 욕심에 꼼꼼히 하다보니 박정희 시대 하다가 30회가 됐다. 그래서 33회에 끝나게 됐다. 나중에 못쓴 사건을 보완해 단행본으로 내려고 한다.”
-필화 70년 중 가장 끔찍한 필화사건은 역시 <민족일보 사건>과 조용수 사장 아닐까.
“그렇다. 필화로 인해 사형을 내리고 실제 사형이 집행된 경우는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유일하다. 기사에서도 썼지만 원 선임기자의 책을 참고했다. 조용수 사장도 그렇지만 필화사건 모두 한 편의 책으로 엮을 만큼 중요하다.”
-나중에 마무리 기사에서 현대판 김제동·김미화 등의 설화도 광의의 필화로 규정했다. 공감이 간다.
“필화의 개념이 붓으로만 쓴 것에 고정관념을 둘 필요가 없다. 말과 글은 같다. 정치인 발언도 필화다. 유성환 의원의 국시 발언(1986년 국회 본회의에서 신민당 유성환 의원이 ‘국시는 반공이 아닌 통일이어야 한다’고 발언해 유 의원이 구속돼 의원직을 상실했다)도 필화다. 우리 시대 김제동·김미화 등 연예인은 시 한 편, 소설 한 편 못지않게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는 “블랙리스트 자체가 필화의 증거로 박근혜 시대에 다방면에서 필화를 양산한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를 지지하는 문구에 서명한 것, 세월호 참사를 비판하는 성명에 서명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은 그 자체가 필화다. 그 역시 유신 반대 성명 등으로 보안사 블랙리스트에 오른 적이 있다.
임 소장은 1941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군 면서기를 했던 부친은 1950년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나’라는 다소 가슴 아픈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래서 한국전 민간인 학살피해자 모임 회원이다. 참…(그는 잠시 말을 잇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나이 들어 조사해 봤는데 부친은 명백히 보도연맹원도 아니었다. 부친은 일제 말기 면서기, 광복 후에 군청 과장급 정도를 했다. 그것도 6·25 직전에 그만두고 농사를 지었다. 삼촌이 일제강점기 대구사범 다니면서 독서회를 통한 항일운동을 했고, 해방 후 46년 대구 10·1사건에 약간 관여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6·25가 나서 삼촌이 예비검속에 걸리자, 동생 구명하러 갔다가 원한을 가진 사람이 같이 엮은 것이다. 엮이자마자 소명할 기회도 없이 처형되신 것이다.”
-본인의 문학·역사적 관점에 부친의 억울한 죽음이 영향을 미쳤다고 봐도 되나.
“없다고 볼 순 없겠지…. 그렇다고 부친의 억울함을 한풀이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 인물, 독재자 때문에 한 집안은 물론 민족 전체가 얼마나 피끓는 고생을 했나. 민족적 비극을 가져왔다. 결국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친일로 돌아간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나이 10살에 가문에서 홀로 남은 남자가 됐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는 공부를 잘해 안동사범에 진학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다. 하지만 ‘요시찰 인물’로 낙인 찍힌 그가 교단에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좁았다. 1960년 4·19 학생혁명이 나자 그는 교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공부(중앙대 국문과·대학원)를 더했다. 그리고 1966년 <현대문학>에 ‘아나키스트의 환가(幻歌)’를 발표하며 문학평론가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문학을 항상 역사와 함께 바라봤다. 내 첫 평론은 소설가 장용학론(論)으로, 부제가 장용학의 정치학이다. 장용학은 우리나라 6·25 전후문학, 특히 관념소설·지식인 소설에서 최인훈과 쌍벽을 이루는 참 좋은 작가인데, 평론가들이 연구를 안해 묻혔다. 그는 현대문학에서 간첩을 정식 소설 주인공으로 삼은 첫 번째 작가다. 간첩을 보통의 인간, 모든 사상을 부정하는 아나키스트적 인간으로 묘사했다. 60년대 당시 반공 일변도 시대에 아나키스트적 관점도 그나마 남북한과 역사를 균형 있게 보는 것이라 평가했다.”
그는 1968년 <경향신문> 경력기자로 입사했지만 몇 년 근무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기자 월급도 적었고, 특히 언론 자유도 없어 기사 쓰는 것이 재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 재야 사람들과 더 잘 어울렸다. 결국 그는 진보적 잡지인 월간 <다리>지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리>지는 후농(신민당 김상현 의원)이 만든 잡지로, 사실상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홍보캠프였다. 그는 이곳에서 마음껏 ‘언론의 봄’을 느꼈다. 하지만 이를 가만히 둘 정권이 아니었다. 결국 <다리>지는 많은 필화를 겪다가 72년 10월 유신이 나면서 폐간됐다.
그 역시 고난의 길을 갔다. 그는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첫 번째 구속되고, 두 번째는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됐다. 두 사건 모두 재심을 통해 고문에 의한 조작임이 드러났고,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1983년 남민전 사건에서 석방된 후 “내가 민주화운동을 하면 옆 사람도 같이 빨갱이로 몰릴 수 있으니 역사공부나 하자고 만든 것이 바로 역사문제연구소였다”고 말했다. 1986년 그때 같이 한 사람이 바로 박원순 현 서울시장이다. 당시 대학에서는 현대사를 거의 가르치지 않았고, 이에 갈증을 느낀 대학·대학원생들이 이곳에서 해방전후사 등 근·현대사를 배웠다. 이들은 대부분 현재 유력 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있다.
하지만 나중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는 “박원순 시장은 참여연대를 만들어 나가고, 다른 사람들은 한·일문제와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로 전환했다”면서 “박원순 시장과 민족문제연구소는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실정을 모르는 몇몇 극우인물이 박원순 시장과 민족문제연구소를 같이 엮어 비판하다 손해배상소송에서 패소하기도 했다. 2001년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다가 2003년 소장이 된 이래 지금까지 ‘집요하게’ 친일 청산의 최일선에서 뛰고 있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은 그의 노작이고, 2013년 <100년 전쟁>은 유튜브에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다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고 있다.
“도움을 청한다. 대통령 하나 잘못 뽑으니 10년 남북화해가 전쟁위기로 간다. 어떤 정치도 완전히 착근하려면 역사와 맥이 닿지 않으면 안 된다. 유럽은 지금까지 나치 청산작업을 하고, 프랑스 곳곳에 레지스탕스 기념관이 있다. 훌륭한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나라는 역사가 현재로 정착돼 있다. 그러기 위해선 제대로 된 역사박물관이 필요하다. 정부가 만든 역사박물관은 산업발전연구관 소리를 듣는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가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만들고 있다. 서울 청파동에 건물도 마련해 내년 8월 29일 국치일에 개관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돈이 모자란다. 후원해 달라.”
칠순이 넘은 임 소장은 눈썹이 희었지만 눈에서는 30대 청년 같은 열정이 넘쳤다. 그리고 후원 요구도 당당했다. 기자는 후원계좌(우리은행 1005-703-038353·시민역사관)를 기사에 꼭 쓰겠다고 약속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 안내>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2017.06.25>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