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증언집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간
– 기 획 : 민족문제연구소·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 지은이 : 김민철, 김승은, 김영환, 김진영, 노기카오리, 강동민
– 펴낸곳 : 민족문제연구소, 신국판 472쪽
– 발간일 : 2017.6.20.
☞ [구매하기]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지난 6월20일,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공동기획 한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강제동원피해자 유족증언집』(민연)이 발간되었다. 이 책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강제동원 되어 희생당한 피해자의 유족 23인의 삶과 사연이 담겨있다. 강제동원 피해를 당한 당사자의 증언집, 구술집, 회고록 등은 다수 있었지만 유족들의 이야기를 직접 다룬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책에서 주인공들은 아버지, 남편, 오빠가 강제동원 된 후 가족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며 차분히 설명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시작된 고달픈 삶, 여성이기 때문에, 며느리이기 때문에 받은 차별과 배제, 그리고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로부터 외면당하면서도 가족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온 유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일제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일본정부와 일본기업에 있다. 하지만 한국정부 또한 2차적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근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며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 유족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외면 받고 있고 유족들의 삶을 또 다른 독립적인 피해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정부가 가족의 피해를 외면하는 동안 유족들은 모두가 잊어버린 한 마디 소식을 듣기 위해, 그저 ‘종이 한 장’에 불과할지 모를 아버지의 기록을 찾기 위해, 연락 한 번 없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아버지의 이름을 빼내기 위해, 십 수 년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23명의 주인공들은 이 책을 통해 ‘아버지를 빼앗긴’ 이후 겪어야 했던 유족들의 힘겨운 삶을 기록하고 돌아오지 않는 가족의 ‘흔적’을 찾아온 긴 여정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교과서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다루지 않는 스물세가지의 새로운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오랫동안 문제를 외면해온 한국사회를 향해 유족들이 풀어놓는 첫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이 보고를 통해서 우리는 일제가 남긴 식민지배의 유산과 상처가 당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한일관계의 원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이 책은 증언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쓰는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정형화된 구술자료와 진술서에는 유족 스스로의 목소리가 담기기 어렵고 그 내용도 소략하기 마련이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필자들은 오랜 시간동안 유족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기록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필자들은 증언자가 언어로 담아내지 못하는 사연을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그 마음이 잘못 기록되어선 안 된다는 부담을 안고 작업했고, 증언자는 황망했던 가족들의 삶과 고비마다 무너져 내리던 심정이 왜곡되지 않도록 여러 차례 원고를 검토했다. 이렇게 뼈대만 있던 이야기에 피와 살을 붙이고 증언자들의 마음을 담아 재구성하는 작업을 반복해 책이 완성되었다. 말하고 싶어도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 가슴속에만 삭혀온 유족들의 사연이 이 책에 얼마나 잘 담겼는가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들에게 있다.
이 책의 주인공 23명은 평범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보통사람들이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지 피해자로만 있지는 않았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며 주체가 되어 온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을 통해 주인공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시대 ‘어른’들이 살아온 굴곡진 한국현대사를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분단과 독재정권의 긴 터널을 지나온 수많은 피해자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붙임>
※ 강제동원피해자 유족 소개
■ 강종호
1941년 제주 출생, 1941년 목선과 함께 강제동원되어 어업통제회사 선원으로 근무하다 희생된 강태휴의 아들
경찰관과 젊은 청년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끌어갔다. 두 분을 뒤쫓아 가자 할머니는 못 따라 오게 말렸다. 할머니는 끌려가면서 ‘하늘님, 하늘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찰관과 청년들이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간 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갑자기 마을이 소란스러웠다.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어른 이야기로는 끌려간 28명의 주민 모두 총살당했다고 한다.(18~19쪽)
■ 권수청
1938년 경북 상주 출생, 1944년 오키나와에 징용되었다가 희생된 권운선의 아들
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제를 시작했다. “아버지, 오늘은 아들의 술을 받고 슬픔과 고통, 억울함을 잊으시기 바랍니다.” 인사를 드리고 한국에서 가져간 술을 올린 뒤 위령비를 아버지 무덤 삼아 주변에 술을 조금씩 부었다. 이어 동행한 벗들도 절을 올렸다. 위령비 옆에 피어 있던 히비스커스에 나비가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잘 찾아왔구나. 고맙다.”
아버지의 전령사였을까. 나비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62쪽)
■ 김기호
1941년 충북 옥천 출생, 1942년 포로감시원으로 타이에 배속되었다가 희생된 김만업의 아들
아버지를 추모할 권리는 내게 있다. 내가 싫다는데 무슨 해괴망측 한 논리를 만들어 야스쿠니신사는 거부하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다. 대단히 불쾌해서 참을 수 없다. 영혼을 일본이 가두고 있는 것 같다. 자식으로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고 하니 마치 아버지가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죄책감마저 든다.(83~84쪽)
■ 김동관
1942년 충남 부여 출생, 1942년 홋카이도에 징용되어 희생된 김대성의 아들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골을 찾으러 며칠을 걸려 서울까지 걸어서 다녀왔다. 그 먼 곳까지 걸어가서 남편의 유골을 가슴에 품고 돌아오는 어머니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무 것도 모르는 다섯 살 형이 유골함을 열어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장난감인 것처럼 방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마음이 오그라드는 듯 아팠다고 했다.(87쪽)
■ 김문식
1949년 경북 문경 출생, 1942년 나가사키 탄광으로 징용되었던 김정옥의 아들
나는 알고 싶었다. 아버지가 왜 스무 살에 탄광으로 끌려가야 했는지, 탄광에서 얻은 진폐증이라는 병마에 시달리면서 단 하루도 건강한 날이 없이 살다가 돌아가셨는지, 왜 내 동생들은 장애로 그토록 고생하며 살아야만 하는지, 우리 가족에게 불행의 씨앗을 뿌린 역사를, 그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다.(108~109쪽)
■ 남양강
1943년 일본 고베 출생, 1943년 사할린으로 징용되었다가 행방불명된 김외준의 며느리
고향에 오지 못하고 막막한 사할린 생활을 이어가던 징용자들은 거기서 재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는 분들도 생겼지만 우리 시아버지는 오매불망 고향에 돌아올 귀환 소식만 기다리고 홀로 사셨다고 한다. 얼마나 가족들에게 돌아오고 싶었을까. 가족들은 또 얼마나 시아버지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까.(127쪽)
■ 남영주
1939년 경남 의령 출생, 1942년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뉴기니에서 전사한 남대현의 여동생
“오빠! 오빠! 영주가 왔습니다! 오빠 보고 싶어서 영주가 왔습니다!” 추도사를 읽으려 했지만 더 이상 목이 메어 읽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험하고 먼 곳까지 끌려와서 얼마나 고생했을까,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떻게 죽었을까, 불쌍한 오빠를 생각하며 한없이 눈물이 흘렸다. 술을 따라주면서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오빠에게 이야기했다.(157쪽)
■ 노재원
1936년 충남 연기군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중국 호북성에서 근무하다 귀국길에 사망한 노복만의 아들
해방이 되자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거라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드리려고 원두막 밑에 참외를 묻어두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아마 곧 오실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짐승들이 땅에 묻어둔 것을 보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는 오시질 않아, 한참 뒤에 다시 땅을 파보니 참외는 이미 썩어 먹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166쪽)
■ 동정남
1944년 일본 나고야 출생, 1943년 군속으로 일본 현지에서 동원되어 북태평양에서 전사한 동선홍의 아들
그 날인은 1959년 7월 31일에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아버지는 ‘천황’을 위해 죽어간 것도 아니고,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어간 것도 억울한데 야스쿠니신사에 합사까지 되어 있다니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사망했다는 사실도 알려주지 않고 합사하겠다고 묻지도 않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뿐이었다.(187~188쪽)
■ 박남순
1943년 전북 남원 출생, 1942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브라운섬에서 희생된 박만수의 딸
편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현지에는 새 한 마리도 없습니다. 날이 너무 더워 옷을 입을 수가 없고 훈도시(일본의 남성용 속옷) 하나면 일주일을 입을 수 있습니다.” 보내달라는 속옷과 바르는 약을 같이 보내줬다고 이야기해주면서 둘째 작은 아버지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아버지 이야기만 하면 옛날 생각에 잠겨 목이 메어 말을 잘 못하였다.(201쪽)
■ 박진부
1940년 일본 홋카이도 출생, 1944년 일본 현지에서 징용되어 후쿠시마 탄광에서 사고로 희생된 박선봉의 아들
해방이 되자 어머니는 누이와 나를 데리고 조선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와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한 (일본인) 친정 식구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조선으로 가려면 연을 끊으라’고 했다. 조선말도 한 마디 못하는 젊은 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조선으로 간다고 하니 어떤 부모가 좋아했을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낯선 땅 조선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216쪽)
■ 신명옥
1946년 황해도 연백 출생, 1944년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중국 안징성에서 전사한 박헌태의 며느리
(돌아가시기)이틀 전이었을 게다. “엄마, 누가 가장 보고 싶어?”하고 물으니 시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셨다. “엄마, 아들 보고 싶어? 손주들 보고 싶어?”, “어”. “엄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얘기해, 누가 보고 싶어?”, “영감, 영감이 보고 싶다.” ‘영감’이라니, 내가 시집 와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단어였다. 시어머니는 일제 말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빼앗긴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오셨던 게다.(248~249쪽)
■ 윤옥중
1940년 충남 논산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페릴리우 섬에서 사망한 윤삼병의 딸
굿을 하면서 들리는 할머니의 원망 섞인 울음소리, 무사 귀환을 비는 기도 소리를 들을 때면 마치 ‘애비 잡아먹은 년’ 하고 나를 꾸짖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한 것이 내 탓인 것 같아 너무나 괴로웠다. 할머니가 굿을 하시는 날이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254쪽)
■ 이금수
1943년 충남 논산 출생, 1942년 징용되어 행방불명된 이도우의 딸
그렇게 기분 좋은 날 어머니는 또 우시는 게 아닌가. 나는 ‘왜 이 좋은 데 와서 궁상이냐’고 타박을 했다. 나는 어머니가 우는 게 제일 싫었다. 하도 설움과 한이 많아서 그런지 툭하면 우시던 어머니를 평생 옆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창경궁에 가니 아버지 생각이 더 간절하셨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들이 하던 때가 떠올랐던 것이다.(285쪽)
■ 이명구
1938년 경기도 여주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팔라우 섬에서 사망한 이낙호의 아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아홉 살, 동생은 다섯 살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도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고, 병들어 시름시름 앓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형으로서 어린 동생을 잘 돌봐주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마저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 제사상에 차려진 과일이 먹고 싶다고 울던 어린 동생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304쪽)
■ 이춘자
1942년 경기도 시흥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중국에서 행방불명된 이병헌의 딸
아버지는 어떤 이유 때문에 도망갔을까. 어머니가 전해준 말처럼 (아버지는) 독립군이 되기 위해 도망갔을까. 이후의 일본군 정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도망에 성공한 건 분명한데, 도망갔다면 왜 집으로 돌아오질 못했을까. 항일독립군에 편입되어 어느 전선에서 싸우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향으로 오지 못한 걸까. 물음에 물음이 꼬리를 물 뿐이다.(327쪽)
■ 정윤현
1953년 전북 김제 출생, 1944년 후쿠오카현 소재 탄광으로 징용되어 행방불명된 박운석의 며느리
처음에는 어떻게 피하신 모양인데 두 번째 나온 징용영장은 피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시아버지는 옆 마을 여동생 집에서 처남 집으로 옮겨 다니며 숨어 지냈다. 순사들이 집집마다 수색해 마을 남자들을 끌고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예 산 속에 숨었다. 산 속에 먹을 것이 없으니 나무뿌리나 열매 그리고 잡초로 겨우 연명했는데, 결국 큰 배탈이 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341쪽)
■ 정태랑
1941년 경북 선산 출생, 1941년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행방불명된 정봉규의 아들
“해방되고 조선 사람은 고향으로 가는 배를 탈 수가 없잖아요? 여기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가 보였거든, 저기 보이는 섬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위령제가 열린 장소는 조선 사람들이 배를 타지 못해 자살을 많이 한 곳이란다. 강제동원 된 조선인들 가운데 일본 여성들과 결혼한 사람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고, 나머지 사람들은 귀국을 시키지 않았다.(368쪽)
■ 최낙훈
1940년 서울 출생, 1942년 후쿠오카 가이지마 탄광으로 징용되어 행방불명된 최천호의 아들
아버지와 헤어진 지 72년 만에 난생 처음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르는 그 순간에 어머니의 생각이 아른거렸다. 스물일곱 나이에 삼형제를 키우며 행상을 다니던 어머니의 탄식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일본 대판이 얼마나 좋아서 꽃 같은 나를 두고 연락선을 탔느냐’하며 울던 불쌍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이가 든 뒤에는 가끔 TV에서 강제동원 이야기가 나오면 “네 아버지 유골이라도 한 번 봐야 되지 않겠냐” 하시던 게 눈에 선하다.(395~396쪽)
■ 최두용
1938년 경기도 평택 출생, 1944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중국 광시성에서 사망한 최승봉의 아들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날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울었다. 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아버지는 축음기를 사 갖고 온다며 나를 달랬다. 할머니가 나를 등에 업은 채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때 우리들을 뒤로 하고 청북면의 너른 들판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것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402쪽)
■ 최상남
1938년 전남 무안 출생, 1941년 지원병으로 입대해 버마에서 전사한 최판룡의 아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일본군에 지원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진을 늘 책 속에 꽂아두고 그리워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도 못하고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그리워했지만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422쪽)
■ 최인재
1938년 서울 출생, 1943년 군속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 트럭섬에서 사망한 최병석의 딸
어느 날 오후 작은 아버지와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작은 아버지는 내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더니 우체부가 하얀 상자를 들고 왔고 작은 아버지께서 상자를 받더니, 이내 내게 고개를 돌리며 “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하얀 상자에 아버지가 입었던 베적삼, 손톱,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431쪽)
■ 한광수
1942년 경기도 양평 출생, 1943년 중국 해남도에서 사망한 한기석의 아들
어느 날 수감 중인 아버지가 중국의 해남도 어느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가족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수형자를 왜 뜬금없이 해외로 보내 노동을 시킨다는 말인가. 사정을 알아볼 틈도 없이 아버지는 그렇게 해남도로 끌려가 버렸다.(451~452쪽)
※차 례
감사의 글 03
책을 내면서 08
강종호 강제동원과 4·3사건의 이중 피해자 15
권수청 오키나와에서 부르는 한의 노래 45
김기호 아버지를 두 번 욕되지 하지 마라 67
김동관 스물여덟에 홀로 되신 어머니를 그리며 85
김문식 내가 애쓰며 사는 이유 101
남양강 사할린에서 온 편지 123
남영주 그립고 그리운 우리 오빠 141
노재원 땅 속에 묻어 둔 참외 161
동정남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181
박남순 길섶에 풀처럼 197
박진부 훗카이도 탄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 213
신명옥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지켜주신 나의 인생 233
윤옥중 해바리기 인생 251
이금수 어머니의 일생 271
이명구 이 세상에 11살 소년으로 홀로 남겨져 299
이춘자 미스터리로 남은 아버지 기록 317
정운현 시아버지의 기록을 찾아서 337
정태랑 동토의 땅, 사할린에 묻힌 아버지 355
최낙훈 끝나지 않은 망부가 371
최두용 축음기를 사 오신다고 했는데 401
최상남 사진 속의 아버지를 그리며 415
최인재 내 마음에 평화의 촛불을 켜며 429
한광수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 447
태평양전쟁보상추진협의회 연혁 466
- 0703_press.hwp (1.58 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