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여성사전시관, 순회전시 논란
‘최초 여성 비행사’로 애국지사 권기옥 아닌
‘친일 논란’ 박경원으로 소개하는 전시 열어
권 지사 아들, 권현 “무책임한 행동” 비판
여성사전시관 “최초 민간 여성 비행사인데
제목 오기일 뿐, 고의 아냐” 해명
국내 유일의 여성사박물관인 국립여성사전시관이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된 여성비행사 박경원(1901~1933)을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고 소개하는 순회전시를 진행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 지사를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고 발표한 상황에서 국립박물관인 여성사전시관이 잘못된 사실을 토대로 전시를 기획했다는 점에서 전문성 논란이 예상된다.
국립여성사전시관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여성가족부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국내 유일의 여성 역사·문화 전시 공간이다. 여성사전시관은 ‘양성평등주간’ 기간이던 지난 7월 5일부터 7일까지 성남시청 1층 누리홀에서 여성사 특별 기획 전시를 열었다. 여성사의 가치를 확산하고 전시관을 홍보하기 위한 순회전시였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경계를 넘은 여성들’로 전통사회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배경에 따른 여성 노동사를 다뤘다. 7월 6일 전북도청에서도 같은 내용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번 순회전시 중 문제가 된 내용은 ‘선구적 여성들’이라는 주제 아래 근대부터 1950년대까지 활약한 여성을 조명한 부분이다. 해당 전시에서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와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함께 박경원이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소개됐다.
여성사전시관은 박경원을 가리켜 ‘한 마리 푸른 제비로 비상했던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고 소개했다. 상세 내용에는 “1925년 일본 도쿄 가마다 자동차학교를 거쳐 1927년 가마다 비행학교를 졸업,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받아 한국여성 최초로 민간비행사가 됐다”고 설명했다. 친일 논란이 있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문제는 박경원이 ‘우리나라 최초 여성 비행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보훈처는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를 권기옥 지사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권 지사는 3·1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1924년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교한다. 이후 1년 2개월여 만인 1925년 2월 졸업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됐다. 지난해 국가기록원이 복원한 권 지사의 항공학교 필업증서(졸업장)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비행사가 된 권 지사는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서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반면 박경원은 일본 다치가와비행학교에 입학해 1927년 1월 일본제국비행협회가 주는 3등 비행사 면허증을 받았다. 권 지사보다 2년 느리다. 그 후 1933년 일제의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을 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조선이 아닌 일제를 위해 하늘을 난 것이다.
여성사전시관이 박경원을 소개한 문구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운영하는 ‘문화콘텐츠닷컴’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창작자를 위해 역사, 민속 등 우리 문화의 원형을 디지털콘텐츠화해 제공하는 문화콘텐츠닷컴을 운영한다. 여기서도 박경원을 한국여성 최초로 민간비행사라고 알리고 있다. 같은 자료를 활용하는 ‘네이버 지식백과’도 똑같은 내용으로 박경원을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소개하고 있다.
‘최초’ 논란은 지난 2005년 박경원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청연’이 개봉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영화 제작사가 영화를 ‘최초 여성 비행사 스토리’로 홍보했으나 역사학자들과 독립유공자의 항의로 ‘최초의 민간인 여성 비행사’라고 홍보 문구를 바꾸기도 했다. 2015년에는 여성가족부가 어린이 성평등 교육을 위해 만든 홈페이지에 친일 전력으로 논란이 있는 박경원과 최승희 등을 ‘최초의 여성 인물’로 소개해 논란이 된 바 있다. 당시 여가부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의뢰, ‘최초 여성 비행사는 박경원이 아니라 권기옥’이라는 회신을 받고 이를 홈페이지에 반영했다. 이번 순회전시에서도 박경원과 함께 최승희도 ‘선구적 여성들’로 함께 소개됐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여성사전시관 A 학예사는 “제목에는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고 나갔지만 상세 내용에는 ‘최초 여성 민간 비행사’라고 설명하고 있다”며 “제목에서 ‘민간’이 빠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A 학예사는 또 “(전시 전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라고 생각했지, 권기옥으로 (최초 여성 비행사가) 굳어진 것은 몰랐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박경원은 친일 성격이 강하고 권기옥은 독립투사로 활동했다”고 말해 박경원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국립여성사전시관장이 해당 사실을 알고서도 방치했다”는 의혹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전시관 직원 B씨는 “순회전시 기획안에서 ‘최초의 여성 비행사’를 박경원으로 잘못 기재한 사실을 발견하고 관장에게 문의했다”고 주장했다.
정현주 국립여성사전시관장은 이에 대해 “사전에 양쪽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해 놓친 것은 제 잘못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성남에서 열린 전시는 3일 동안, 전북에서는 4시간 동안 열렸다”고 했다. 그는 이어 “해당 기관에 제목 정정에 대한 공문을 보내 큰 오류는 잡았다고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제목에 ‘민간’을 넣지 않았을 뿐, ‘최초 민간 여성 비행사’라는 사실은 틀리지 않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권기옥 지사의 아들인 권현 광복회 이사는 이 같은 해명에 대해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에게 ‘최초’를 부여해 친일 이력을 희석하려는 것 아니냐”라며 “박경원에게 자꾸 ‘최초’를 부여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권 이사는 “아직도 영화 ‘청연’ 주인공이 권기옥 지사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영화나 드라마, 전시회 등 문화는 독립운동가에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반대가 될 수도 있으므로 그만큼 검증과 사실 전달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17-07-22> 여성신문
☞기사원문: [단독] ‘친일 논란’ 박경원이 최초 여성 비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