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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지옥도…헛된 꿈을 꾼 마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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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불편한 진실 ①] 일제 민족분열정책이 키운 ‘차별 지배’ 참상
광복 72주년을 맞이한 한국 사회에서 ‘친일’은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지금까지도 과거사 청산의 뚜렷한 열매를 얻지 못한 데 따른 비극이겠죠. 친일의 온전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탓에 우리네 과거사 인식 역시 비좁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모든 해법은 문제를 직시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CBS노컷뉴스가 친일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친일파’ 지옥도…헛된 꿈을 꾼 마름들
피튀기는 조선인들 뒤에 숨은 ‘일제 민낯’
‘미완의 청산’이 낳고 기른 ‘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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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군함도’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친일파는 헛된 꿈을 키웠다.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는 데 협력한 그들은 왜 ‘마름’의 길을 택했을까.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자국민이 자국민을 관리하게끔 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형적인 통치술로 볼 수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통치의 효율성 면에서) 비용이 싸게 드니까, 적절하게 선만 안 넘으면 허용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회가 민주화 되면 그런 것들도 줄어들게 돼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하급 관리자)도 권력이니까 강화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지주가 가장 살기 좋았던 때가 일제시대라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양반으로서 지주들이 권력을 지녔는데, 일제는 그런 식으로 지주를 굉장히 잘 대접했다는 것이다. 당시 지주를 대변하던 마름들 역시 실제적 권력을 행사했다. 이를 크게 보면, 일제시대에는 일종의 민족분열정책이 잘 활용되면서 계급적인 지배가 훨씬 강화됐다고 볼 수 있다.”

김 연구원은 “일제가 친일파로 육성·홍보했던 이들은 주로 조선 사회 지배계층, 그러니까 거물급이었다. 소위 말단에서 친일을 한 경우는 자생적인 측면이 강했다. 작은 권력이나마 누리려는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까”라며 “(일제가) 의도적으로 (친일파 육성을) 기획하지 않았더라도, 식민지 구조는 그 자체로 폭력과 차별에 기초한 사회다. 그 차별이라는 것이 일차적으로 ‘민족’ 차별, 이차적으로 ‘계급’ ‘성’ 차별 등이 중층적으로 들어가는, 구조 자체가 이를 생산해내는 기능을 한다”고 설명했다.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들은 먼저 자신부터 설득하는 합리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유선영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는 “어느 제국주의 체제에서나 식민지를 운영할 때, 중간 관리자까지는 아니어도 대민업무에 종사해야 할 하급관리는 해당 식민지 민족의 일부를 차출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며 “식민지에서 소수의 정복자가 다수의 원주민을 지배해야 했기 때문에 이 둘을 연결시키는 중간 브로커 집단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매판 하급관리를 아프리카에서는 ‘서벌턴'(subaltern)이라 불렀다. 인도네시아 등 화교가 많이 퍼져 있는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인들을 이러한 매개로 썼다. 중국인이 상업, 회계 등을 잘 깨우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 당대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민족을 ‘배반했다’는 생각보다 ‘문명화했다’는 것으로 스스로의 행위를 합리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화’를 ‘문명화’와 동일하게 쓰는 정서가 한편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 교수는 “(친일파는)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이 컸다. 양반 중심의 신분제 아래에서 소작농 등으로 살았던 계층이 전체 인구의 80, 90%였으니, (친일을) 전복의 기회로 생각했고, 일제에 협력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이익이 무지 많았을 것이라고 본 것”이라며 “(말단 영역에서의 친일을 통해) 일단 생활을 보존하고, 뇌물을 받는 등 사소한 권력을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생존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기존 체제에서 억압 받았던 계층이 이런 식의 신분상승을 위한 방편으로 일제에 부역했을 여지도 크다”고 봤다.

◇ 친일에 뿌리내린 ‘성공주의’ ‘기회주의’…”자기 욕망 실현 과정서 타인 억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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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제막식’에 참석한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이러한 분열지배정책은 시기별로 다른 특징을 보였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조선의 경우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시대에 분열지배정책이 본격화 된다고 볼 수 있다”며 “그 이전에는 무조건 강압적인 정책이었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다음에는 모든 조선인 단체를 해산시켰다”고 전했다.

이어 “3·1운동 이후에는 각 분야마다 친일단체를 육성했다”며 “유생들 안에서도, 자본가들 안에서도, 지식인들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친일단체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 문화통치시대와 1930년대 중반 이후 동원체제에서 등장하는 친일파의 성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심용환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가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본격화하면서 친일파 육성을 지시했다는 문서가 있다. 이에 적응했던 사람들이 이광수로 대표되는 자치론자들이었는데, 1930년대 중반 이후 동원체제로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며 말을 이었다.

“동원체제 하에서는 소위 마름형 친일파가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는 일제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명분을 통해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시기였기 때문에 식민지 관리에 통제력이 있었다. 이에 비해 1930, 40년대 군부 우파가 권력을 잡고 전쟁을 계속 수행해 나가고, 필연적으로 강제징용이 이뤄지면서 상황 자체가 바뀐다. 생존이라는 문제 앞에서 모든 논리가 오그라든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등의 강제징용을 보면 소방서·면사무소 직원들까지 모조리 동원됐다. 떠밀려서 친일 행위를 하는 사람과 자기 생존을 위해 (동족을) 짓밟고 올라가 친일을 하는 사람들이 공존했던 것이다. 일제 말 친일파는 그렇게 양적으로 확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보다 자세한 것은 연구를 통해 규명돼야 할 문제다.”

심 소장은 친일파를 두고 “성공주의자” “기회주의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아래와 같이 부연했다.

“친일파는 조선인을 억압하기 위해 그 길을 택하기 보다는, 자신의 성공을 최우선에 두고 적당하게 자기 민족을 무시하고 독립운동을 찍어누르던 사람들이다. 본인의 성공과 영달을 위해 체제에 순응했던 독재 부역자가 탄생하는 메커니즘과 똑같다. 모든 것이 자기 성공을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과정 안에서 타인에 대한 억압도 이뤄진 것이다.”

그는 “기회주의는 속성상 싸우면서 모순과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개인·가족의 영달을 위해 성공하고 적당히 눈감고 필요하면 피까지 묻히라는 자기 합리화”라며 “그 길을 연 것이 (권력 유지를 위해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이었고, 기회주의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 준 인물이 김구였다. 이후 현대사에서도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기회주의가 문화로 계승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 ‘일제와 거래 가능하다’ 착각…권력 눈치만 살피는 손발로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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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일 제98주년 삼일절을 맞아, 당시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노컷뉴스)

친일파는 신분상승과 같은,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이다. 그러나 일제 입장에서 친일파는 철저하게 수단으로만 활용되는 존재에 머물렀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일제는 사실상 식민지 조선을 직접통치했다. 중간 관리자도 대부분 일본인들로 채웠다”며 “물론 각 지역 군수는 전부 조선인이었지만, 실제 권력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가끔 조선인 도지사가 있었는데, 이 경우도 일본인이 견제했기 때문에 실권을 가졌던 경우는 없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제는 조선을 일본으로 완전히 편입시키기 위해 이러한 지배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시 일본 인구가 팽창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남아 돌았으니, 일본인들에게 일자리를 준다는 차원이 컸다. (조선 통치에서도) 철저히 일본인 중심적인 면이 컸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제시대에서 조선인들은 철저하게 하등·열등 국민으로 자리매김 됨으로써 정치적인 모든 결정권에서 배제됐다”며 말을 이었다.

“친일 부역자 문제, 이를 테면 협력자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이 ‘협력’이라는 것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 어떠한 파트너십을 지녔느냐가 관건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제국주의 전략을 보면, 식민지에 최소한의 정치력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 정치력은 결국 정책 결정을 위한 아이디어, 제국과 타협할 여지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여지는 아예 없었다”

“일제는 조선에서 최소한의 자치권·자주권마저 박탈한 채 앞잡이만 만들어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조선인 강제노동자, 일본군 ‘위안부’는 법으로 내려온 총동원령에 따라 끌려갔다. 이 과정을 조선총독부는 완전히 군대식으로 진행했다. 총독부가 령을 만들어 일본의회의 승인을 얻어내 집행하는 시스템이었다. 여기에 조선인들이 의사 결정권을 갖고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는 “조선인 스스로 부역자는 될 수 있었지만, 부역자 스스로 조선인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아이디어조차 낼 수 없는, 그야말로 최고 지도부인 총독부의 눈치만 살피는 손발이 된 것”이라며 “군국주의적인 ‘상명하복’이라는 야만을 학습한 식민지 말단 부역자들이 이승만 정권에서 재등장하고 군사독재 정권에서 그 야만을 강화하면서, 이러한 사회문화 구조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렸다”고 역설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제의 식민지 조선 지배에서 부역자를 강조하다 보면, 그 마름들에게 굉장한 자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며 “사실 친일이라는 것의 자율성은 굉장히 제한된 자율성이다. 일부 친일파는 그 제한된 자율성을 갖고 마치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최린처럼 (조선이) 자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하지만 일본은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허용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소위 ‘(일제와) 거래가 가능하다’고 착각했던 셈이다. 일상사에서는 작은 거래들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식민지라는 전체 구조에서는 불가능한 거래를 상정한 것”이라며 “그것을 착각하면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꾼 것”이라고 강조했다.


② 피튀기는 조선인들 뒤에 숨은 ‘일제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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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자리한 평화의 소녀상이 비에 젖어 있다. (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에 온 일본의 지배층은 항상 외국의 시선을 의식했다. 미국·영국·프랑스 같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과 비교되는 것에 예민했기 때문에 ‘문명의 언어’를 구사하려 애썼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교육을 받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고위직으로 왔는데, 대민업무에 종사하는 일본인이나 조선인에 비해 포악하지 않다는 인상을 준 것이 사실이다. 월급 잘 주고, 새로운 농업·어업 기술을 가르쳐 주고, 공장에 취직시켜 준 일본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지닌 조선인들도 있었다.”

유선영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이와 관련한 연구 보고서도 있지만, 우리는 일제시대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려는 측면이 강해 이러한 사실을 그리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당대 조선 사람들이, 교육 수준이 낮은 대다수 일본인들과 완장 찬 친일 조선인들의 폭악성에 분노하던 상황에서 가능했던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이라고 전했다.

유 교수는 “일제와 식민지 조선 사이 중간 브로커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개념 없이 정말 잔혹하게 동족을 억압했던, 쓸데없는 권위의식에 젖은 친일 조선인들이 분명히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식민 지배가 이뤄지는 곳에서는 대민업무를 맡는 하급 관리·계층이 동족 안에 항상 존재했다. 그런데 조선처럼 예전부터 반일 정서가 높았던 민족을 통치하려면 말단들이 훨씬 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무단에 가까운 초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일을 주로 조선인들이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더욱 미워하고 증오하는 정서가 있었다. 결국 일제는 자신들에게 향해야 할 증오를 조선인들에게 전가한 셈이다.”

조선과 달리, 일제가 대만을 통치할 때 유화정책을 쓴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유 교수의 설명이다.

“대만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는 대만인들이 고위직에도 올라갈 수 있도록 한다거나, 여러 복지시설을 쓸 수 있도록 하면서 포용정책을 썼다. 대만인들이 조금 더 자치적으로,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준 것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굉장히 컸고, 문화·문명적으로 일본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조선인 하급관리가 가장 많았던 데가 헌병과 경찰인데, 3·1운동 이전인 1910년대까지는 이 영역에 조선인을 쓰지 않았던 이유다.”

이렇듯 반일 감정이 높은 조선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일제가 끌어다 쓴 개념이 ‘민도'(民度)였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차별의 근거를 만드는 데 있다”며 “종족·인종 차별에 근거한 우생학을 조선에 노골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민도’를 활용했다”고 말했다.

“일제시대에 천황이 조선을 지배하면서도 직접 법으로 통치하지 않고 자기 대권을 조선총독에게 위임하지 않았나. 이때 조선에서 일본 법을 시행하지 않는 이유로, 일제는 ‘조선의 민도가 낮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차별의 근거를 민도에, 그러니까 자본주의 문명이 낮다는 데 둔 것이다.”

◇ 일본인과 조선인 차별 근거 ‘민도’…잔인한 폭력은 친일파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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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전경(사진=국가기록원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이러한 맥락 안에서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대해 사실상 직접지배정책을 썼다는 것이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박 교수는 “일본의 조선 지배 정책에서 특이점은 중간 관리자를 둬 조선 사람들을 관리하도록 한 게 오히려 드물다는 것”이라며 “영국이 인도를, 프랑스가 베트남을 통치할 때 활용한 간접지배정책과는 차이를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은 자국에서 오히려 공공기관에 종사할 관리들을 대거 데려와 조선을 직접 지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제 말기까지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은 70만 명이 조금 넘는데, 교사·경찰 등을 다 합쳐 직업을 지닌 일본인 가운데 35% 정도가 그러한 통치인력이었다. 원래부터 조선 총독으로 군부 인사들이 왔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지배 방식은 (말기까지)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 방식에서 볼 수 있는 한 특징이다.”

그는 “일제가 친일단체를 육성하기는 했지만, 조선 사람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데는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했다”며 “오히려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들이) 친일파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전했다.

“사실 일본은 일제 말기까지도 (조선에서)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다. 식민통치에서 헤게모니는 원주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뜻한다. 일본은 조선에서 이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일제시대 책임있는 자리에는 조선인들이 거의 없었다. 그 밑에서 실무를 봤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해방 뒤) 미군정의 비호 아래 큰 권한을 갖는 자리에 올라서게 되니까 사회적 불만이 커졌다. 일제 하에서 실무 인력으로서 일제에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 실권을 잡았으니 반발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전히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친일파로 인해 조선인들 사이 갈등과 반목은 굉장히 심했다. 유선영 성공회대 교수는 “1920년대 초 만주나 중국,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의열단 등 무장단체들은 조선인을 착취한 조선인을 많이 암살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대 조선인들은 자기를 때린 일본인보다, 중간에서 말리지 않거나 더 앞장서서 억압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감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가정폭력에서도 보면 때린 아버지보다 말리지 않은 어머니를 더 미워하는 피해자가 많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기본적으로 조선에서는 일제에 대한 저항감을 확실히 갖고 있었고, 이와 더불어 전면에 나서서 자기들을 괴롭히는 같은 민족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유 교수는 일제 식민지를 경험한 조선인들의 가장 큰 트라우마로 ‘불신’을 꼽았다.

“일제는 그 자체로 불신과 증오의 대상이라지만, 같은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누가 언제 자기를 고발할지 모른다는 불신이 팽배했다. 순사가 아니어도 이웃의 누군가 자기를 고발할 수 있는, 사찰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가족·가문 외의 다른 타자는 같은 조선인이더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서가 깊이 뿌리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특히나 일제에 나라를 넘겨준 권력층과 그 지배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굉장히 강했다”며 “그러한 체제는 해방 뒤에도 청산되지 못한 채 그대로 유지돼 왔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권력과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크다”고 진단했다.

◇ 용기가 필요했던 ‘친일파’ 연구…”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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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밀정’ 스틸컷(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지배했던 몹시도 야만적인 통치 방식을 꼬집는 목소리도 있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식민지 사람들을 어떻게 포섭하는가’는 18세기 제국주의 통치의 중요한 어젠다였다. 식민지 원주민들을 ‘제2국민화’ ‘열등국민화’ 시키는 것은 공통된 통치방식으로 볼 수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대 영국이나 프랑스는 이론적으로라도, 식민주의를 일종의 ‘문명의 은총’처럼 선전하고 인식시켰다. 그들 제도의 품으로 들어와 그들이 원하는 국민·식민이 된다면 민주주의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후 식민지를 대상으로 대중교육과 민주주의 의회를 준다는 문명화 전략을 취했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통치 전략은 몹시 야만적이었다.”

김 교수는 “여타 제국주의 국가와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로 포장한 제국주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을 지배했다. 형식적인 차원에서도 (인권·민주주의 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떨어졌던 것”이라며 “조선 총독부는 한 번도 식민지 의회를 주려 한 적이 없을 뿐더러, 3·1운동 전까지 대학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등 식민지 관리 모델의 터전 자체를 스스로 제거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 통치 방식을 고려할 때 “당대 창씨개명을 한 모든 조선인을 친일파로 보면 역사에서 어떠한 비판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김 교수의 당부다.

“친일을 논할 때 ’50보 100보’라는 개념은 모든 토론의 여지를 무력화시킨다. 자식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창씨개명을 한 가난한 아버지와, 더 많은 권력을 취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한 권력자는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제에 부역하면서 더 많은 권력을 누리고 이를 통해 동족을 가렴주구한 ‘마름 정치’의 수혜자는 분명히 비난받아야 한다. 다만, 군사 독재시대에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반공교육을 받은 모든 사람을 독재 협력자로 부를 수 없듯이, ‘일제시대를 산 사람은 모두 친일 부역자’라는 인식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친일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이분법적인 사고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용환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은 “그간 ‘친일’이라는 말조차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친일파를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라며 “친일에 대한 광범위한 질적 연구가 안 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 소비 방식에서는 단순히 ‘친일파는 나쁜 놈’이라는 감정이 섞임으로써, 정작 ‘친일 메커니즘’을 다룬 연구는 퍼져나가지 못해 왔다”고 설명했다.

“친일 연구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만들어 온 ‘친일인명사전’ 이상의 성과는 없다고 봐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일제시대와 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난 우리네 문화의 문제도 잘 모른다고 본다.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학계에서부터 분발해, 친일파를 단죄하는 차원을 넘어선 연구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심 소장은 “일제와 친일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법이 지금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 측면이 굉장히 강하다고 본다”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몇몇 학자들의 연구만으로는 안 된다.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법이 바뀐다고 곧바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에도 그럴싸한 법과 명분이 있었고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도 근로기준법이 있었지만,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더 나은 현실을 위해서는 법과 제도의 개선과 더불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지닌 윤리·도덕 수준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공유가 요구된다. 일제시대와 독재시대는 이러한 시민의 덕성을 기르는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막아내는 시스템이 강하게 작동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문화가 여전히 뿌리박고 있다.”


③ ‘미완의 청산’이 낳고 기른 ‘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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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암살’ 스틸컷(사진=쇼박스 제공)

‘헬조선’으로 불리우는 지금 한국 사회의 모순 덩어리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근대’의 문을 폭압적인 일제 식민통치로 열게 된 데다, 해방 이후 청산의 고비마다 좌절을 맛봐야만 했던 과거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가 분단을 경유하면서, 남과 북은 각자 정통성을 주창하기에 급급했다. 남한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식민통치 메커니즘을 더욱 강화시켰다. 1960년대 이후에는 반공과 더불어, 가난 극복을 위한 ‘독재’에 대한 지지가 강요됐다. 이러한 틀 안에서 일제 식민통치는 ‘한국화’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더욱 왜곡돼 왔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적폐를 논할 때 일제 식민통치 그 자체의 영향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며 위와 같이 설명했다.

그는 “보편적인 복지 등을 통해 평등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매도하고, 극우단체를 부추겨 여성·장애인·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도록 만드는 권력층의 비뚤어진 행태 역시 (차별에 근거를 둔) 전형적인 내부 식민통치”라고 꼬집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토론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을 들어 왔다. 토론이 몹시 비효율적인 것처럼 인식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랜 기간 대통령·국회의원 등만을 뽑는 것으로 왜곡돼 왔다. 1987년 민주화가 되고 1990년대부터 지방자치를 행해 왔지만, 현실은 아래로부터의 토론을 통해 결정된 의사를 위로 올리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다.”

김 교수는 “이러한 전형을 우리는 일제시대에 배웠다”며 “형식적인 민주주의로 포장해 투표권과 배만 채워 주면 된다는 어느 고위 공직자의 ‘국민 개돼지론’은 일제시대 분열지배정책에 뿌리를 둔 인식”이라고 진단했다.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는 사회 구조에서 식민통치의 잔재를 뛔뚫어 본 시선도 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사회 구조는 전형적인 계급분리정책”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스스로 이를 묵인하든 동조하든 체념하든, 형식상 평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하지 않나. 이러한 차별을 신자유주의가 굉장히 강화된 데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식민지의 경우 이러한 갈등을 전면에 드러내놓는 사회이고, 민주화 될수록 이러한 분위기는 약화되는 쪽으로, 교묘하게 감추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유선영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역시 “인권 개념 없이 소위 ‘갑을’ 관계가 불합리하게 유지되는 방식은 오롯이 식민통치의 영향이라고까지는 못해도 한국 사회가 여전히 덜 근대화됐다는 증거”라며 “근대화는 타자의 인권을 존중하고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의 사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전근대적”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일제시대부터 커 온 권력층이 근대화 되지 못했기에 그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근대적인 사람은 자기 감정과 권력을 절제할 줄 안다. 권력자들의 이러한 비뚤어진 모습이 역사적인 식민지배의 영향이라면 영향이다. 그 기간(일제시대)에 우리가 제대로 근대화를 했다면 어땠을까. 결국 우리는 반세기를 잃어 버린 셈이다.”

◇ ‘저들만의 문제’로 축소된 친일 잔재 청산…”우리 모두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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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4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서울 청계광장에서 정의기억재단이 주최한 관련 전시회에서 남과 북 위안부 피해 신고자 수에 해당하는 500개의 작은 소녀상이 전시돼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노컷뉴스)

“일제시대에 만연했던 기회주의적인 인식이 현대 한국 사회 안에서 일그러진 욕망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 유선영 교수의 설명이다. 그의 표현을 오롯이 빌리면 “남의 굴욕을 받지 않기 위해 성공해야 한다는 자기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식민지 후유증”이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지위상승 욕망일 텐데, 남보다 앞서고 위에 서고 성공하겠다는 열망이 너무 공격적으로 강화돼 온 것이다. 지위상승을 위해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사교육, 명품 소비, 외모 등이 모두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는 수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외형적 과시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 바람에 사람과 사람이 서로 존중하는 관계, 사회에서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방식과 같은 가치관의 정립을 가로막고 있다.”

결국 “식민 통치로 각인된, 불안한 생존 환경에서 남보다 위에 서야 한다는 강박, 기반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으니 자기 혹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권력도 돈도 지위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심용환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은 한국 사회의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에 주목했다. “그는 일본 역시 광범위한 재벌체제이지만, 우리나라처럼 심각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는 덜 일어난다”고 운을 뗐다.

“물론 전반적으로 동아시아의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문제가 깨끗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까지 심화됐을까’를 보면 결국 친일 유산이 계승되면서 만들어진 기회주의 문화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비슷한 경제성장 단계에서도 기회주의를 맹신하는 자본가·엘리트가 권력을 잡게 된 상황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심 소장은 “상황이 이러하니 기회주의적인 권력층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 안의 기회주의적인 정서가 사라졌나’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회주의적인 권력층을) 욕하지만 우리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일단 너부터 성공해라’ ‘너와 가족이 먼저 잘 먹고 살 살아야 한다’고 권한다. 이러한 사람이 또한 대우 받는다. 결국 친일이 만들어낸 ‘기회주의’라는 문화 유산을 기득권층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친일을 논할 때 어떠한 특정 세력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은 면피하려는 경향이 발생하고 있다. 그들을 쓸어버리면 청산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이다. 친일을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저들의 문제’로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친일파는 (생물학적으로) 죽어서 사라졌다 치더라도 친일 문화, 그러니까 일제시대에 강요된 성공 양식이라는 유산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본다”며 “물론 누군가를 친일파로 규정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고증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공동체가 친일 문화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점에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역시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친일 잔재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이미 해방 70년을 넘겼다”며 “오히려 한국 사회가 그동안 밟아 온 과정 안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파생된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친일 잔재가 가장 큰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은 정말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러한(‘친일 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결국 우리 책임’이라는) 인식부터 가져야만 보다 발전적인 생각들이 나올 것이다. 우리 스스로 어떠한 문제를 만들어 왔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과거 역사 속에서 잘못했기에 그 영향이 분명히 오늘날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 역시 타당하다고 본다. 다만, 우리 스스로 과거 친일 문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부터 반성해야 한다.”

◇ 탈식민화로 가는 ‘존엄성’ 회복의 길…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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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제막식’에 참석한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친일 잔재 청산이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몫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심용환 소장은 “오늘날 우리의 구조화된 문화와 시스템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의식이 필요하다”며 말을 이었다.

“각자 ‘나부터 잘 살고 보자’는 인식 아래 스팩을 쌓는 데 들이는 노력들이, 우리 사회를 보다 선하게 변화시키려는 공동체 에너지로 전환되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수평적인 시민의식, 소위 ‘마름’ 의식과 상반되는 공동체 의식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관련 연구가 탄력을 받아야 한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귀옥 한성대 교수는 “일제 조선총독부 관리가 도대체 어떤 성격이기에 일반 국민들을 가혹하게 억압했는지,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일제 식민통치 방식이 어떠한 문화로 남았는지 등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전했다.

“일본군 ‘위안부’만 해도 일제가 끝나면서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와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도 미군을 대상으로 한 ‘위안부’가 운영됐다. 결국 ‘위안부’ 운영 방식은 권력층이 국민들을 손쉽게 통치하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일제가 만든 치안유지법 또한 여전히 ‘국가보안법’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한 번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힌 전근대적인 인식들을 청산하지 못하면, 그것이 권력층의 통치방식으로서 질긴 생명력을 갖고 사회문화적으로 전수될 수밖에 없다.”

김 교수는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대표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제시대 사찰과 같은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며 “이제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 통치를 위해 썼던 전략들이 지금 한국 사회 안에서 어떻게 ‘현대화’ 돼 작동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꼬집었다.

이러한 실천에서 자신과 사회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따라붙어야 하는 핵심요소다. 유선영 성공회대 교수는 “프란츠 파농(1925~1961, 식민주의에 맞선 사상가)은 ‘자기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탈식민화’라고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으로 세계에서 인정받으려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다. ‘한국 좋다’ ‘김치 좋다’ ‘한국을 빛낸 누구 안다’는 외국인들에 지나치게 열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휴머니티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존엄성을 스스로 깨닫고 인정할 때 비로소 탈식민화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에 바탕을 둔 학습이 수반돼야 한다.”

유 교수는 “일제시대부터 이어져 온 (기회주의적인) 권력층에 대한 불신이 지난 겨울 촛불혁명 때 박근혜·이명박과 겹쳐지면서, 비로소 한국에도 반엘리트주의로 대표되는 권력층의 지배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불신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것이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극우정당,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대중영합적인 단체·인물이 득세할 수 있는 분위기로 흐를까 우려된다”는 말을 통해 성찰을 통한 인간 존엄성의 회복과 탈식민화를 재차 강조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제시대를 일본과 조선의 단순 대립 구도로 봐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가해자로서 일차적인 책임은 일본에, 이차적인 책임은 일제에 협력했던 세력들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통치전략으로서 분열지배정책의 최고 수혜자는 언제나 소수의 지배계층이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권력층은 언제나 차별을 낳는 시스템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우리는 이것이 실제로는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회적 연대가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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