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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공공도서관에 비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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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 소장은 2003년 민족문제연구소를 맡은 이래 친일 청산을 위한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다. 1970년대 대표적 문학평론가인 그는 간첩으로 몰리며 두 차례 옥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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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위)은 2006년과 2009년 <친일인명사전>(전 3권)을 펴냈다. ⓒ시사IN 윤무영

지난 9월17일 대검찰청 공안부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태영호 납북 사건’ 등 6건의 조작 사건 피해자 18명에 대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먼저 잘못된 수사와 기소를 인정해 ‘셀프 재심’ 청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재심 권고 대상으로 밝힌 ‘문인간첩단 사건’ 등에 대해서도 재심을 청구할 방침이다.

검찰의 추가 ‘셀프 재심 청구’ 대상자 중에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대표적 문학평론가인 그는 문인간첩단 사건 외에도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두 사건 모두 진화위 조사 결과 고문에 의한 조작임이 드러난 바 있다.

임헌영 소장은 2003년 민족문제연구소를 맡은 이래 친일 청산을 위한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다. 2006년과 2009년 각각 <친일인명사전>(전 3권)을 펴냈고, 2012년에는 현대사 시리즈 <백년 전쟁>이라는 4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임헌영 소장을 만났다.

‘문인간첩단 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은데?

1970년대 재일동포 중에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인사들이 일본에서 <한양>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했다. 여기에 국내 문인들이 기고해 원고료를 받았고,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했다. 이것이 간첩죄에 해당한다는 사건이었다. 간첩으로 몰린 문인들은 이호철·김우종·정을병·장병희 그리고 나, 5명이었다.

왜 문인 5명만 엮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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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3월2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법정에 선 이호철·임헌영·김우종·장병희·정을병씨의 모습(오른쪽부터). ⓒGoogle 갈무리

지금도 그 까닭을 모르겠다. 당시 모윤숙·박종화·조연현 등 기라성 같은 선배 문인들도 <한양>지에 투고해 원고료를 받았다. 이들도 초청을 받아 일본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다 빠지고 우리 다섯 명만 체포되었다. 재판장도 선별 기준에 대해 물었지만 검사는 “할 말 없다”라고 하더라.

<한양> 잡지가 북한과 관련 있었나?

민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잡지로서 친북적인 내용은 없었다. 원고를 보낸 필자 가운데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 의원을 포함해 여야 유명 정치인은 물론이고 보수적인 예술인, 장차관 등 각계 인사가 다 망라됐다. 게다가 매달 <한양>이 일본에서 발간되면 국내에 보급하던 한국총판 책임자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절친한 구상 시인이었다. <한양>은 국회도서관은 물론이고 공립도서관, 대학도서관에 다 들어갔다. 우리도 국회도서관에 가서 그 잡지를 봤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구상 시인과 어떻게 절친하게 됐나?

구상 시인은 한국전쟁 종군작가 시절 박정희와 알게 되었고 이후 격의 없이 만나는 술친구였다고 한다. 5·16 쿠데타 직전 박정희를 집에 숨겨주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경향신문>을 5·16 쿠데타 세력들이 인수한 뒤 구상 시인을 사장으로 앉히려고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절친했지만 구상 시인은 그래도 양심을 지킨다는 평이 많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문인들 조작 사건을 만든 이유는?

1973년부터 유신 반대 운동이 대학가에서 일어나자 다급해진 박 정권은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바로 그때 문인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긴급조치 선포 하루 전날인 1월7일 문인 61명이 (유신)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에 앞서 1973년 12월 장준하·백기완 선생이 ‘100만인 개헌 청원 서명운동’을 시작했는데 문인들의 개헌 지지 선언은 그 연장선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볼 때 문인들의 성명을 그대로 두면 파급력이 커지니까 ‘문인간첩단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처음 조사받았던 곳은? 그러니까 어느 부서가 간첩 사건을 만들었나?

긴급조치 시절이라 국군 보안사령부가 체포했다. 당시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던 보안사 대공분실로 우리를 끌고 갔다. 그곳에서 무수히 맞고 고문당했다. 구치소로 넘어가도 변호인 접견은 물론 가족 면회조차 안 되었다. 밖에 있는 가족들은 내 생사를 몰랐고, 나는 안에 갇혀서 가족들을 걱정했다. 검찰이 우리를 검찰청으로 불러 조사하는 게 아니고, 서울구치소로 파견 나와 부소장실이나 소장 부속실에서 조사했다. 어느 날 검사 취조를 받고 있는데 느닷없이 한승헌 변호사가 들어왔다. 한 변호사가 마치 구세주처럼 보였다. 끌려온 뒤 처음 보는 민간인이었다.

그때 한 변호사를 선임했나?

나중에 들어보니 한승헌 변호사가 문인간첩단 사건 보도 이후 우리 생사를 확인하려고 뛰어다녔다고 하더라. 그러다 검사가 구치소에 가서 누구누구를 조사한다는 정보를 듣고, 불시에 들이닥쳤다. 검사가 놀라서 “왜 들어오냐, 나가세요”라고 고함을 쳤다. 한 변호사가 막무가내로 들어와 앉았다. 한 변호사의 첫마디가 “일어나서 걸어보라. 팔 들어보라”였다. 고문을 당해 팔다리가 성하지 않을까 봐 그렇게 확인했다. 유신 체제는 지금 젊은 세대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야만의 시대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구’ 구상 시인은 문인간첩단 사건 피해자들을 외면했나?

우리 쪽에서 구상 시인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구 시인이 법정에 안 나오겠다는 소문이 퍼졌다. 속으로 “참, 이분도 어용 다 됐나”라고 원망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구상 시인의 ‘작전’이었다. 증인 채택 소식을 듣고 구상 시인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증인으로 나간다고 하면 친구 박정희 대통령이 싫어하고,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에서 “제발 나가지 말아달라”고 매달릴 게 뻔하니 일부러 법정에 못 나간다고 소문을 냈다. 중앙정보부를 안심시킨 뒤 재판 당일 법정에 나타났다. 방청석에서 “증인으로 채택된 모양인데 시간이 지금밖에 없다. 증언 허락해줄 수 없느냐”고 하니까 판사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증언대에 선 구상 시인은 “이 사람들이 이렇게 묶여 있으려면 내가 제일 먼저 묶여야 한다. 이 사람들이 나에 비하면 <한양> 잡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한양>과 제일 가까운데 이 사람들이 무슨 문제란 말이냐”라고 증언해주었다.

그 뒤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또 옥고를 치렀는데?

남민전 사건은 1979년에 터졌다. 나는 문인간첩단 사건을 겪고 대학 강단에서도 쫓겨나 출판사 번역 일로 겨우 연명했다. 그때 우리 같은 사람, 시민권 없는 이들에게 민주화가 절박했다. 겉으로 드러나면 잡혀가니 생존을 위해 택할 길은 지하투쟁밖에 없었다. 지하조직만이 가능하던 시대, 지하에서 민주화를 주장한 단체가 남민전이다. 다만 치안본부에서 조직 이름을 발표할 때 마치 북한과 연계된 것처럼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고 어마어마하게 붙였다. 수사기관은 남파간첩도 고정간첩도 아닌 자생적 반국가 단체라고 애써 강조했다.

주요 가담자들이 누구였나?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이재문씨, 그리고 안재구 전 교수와 이재오 전 의원 등이 주요 멤버였다. 나는 이재오씨와 같이 일했다. 이재문씨는 그 전 인혁당 사건 때 연루되었지만 체포되지 않고 피했다. 인혁당 사건 때 이재문씨의 동지 8명은 다 사법 살인을 당했다.

전두환 정권 때 석방된 뒤 역사와 민족문제 연구에 매진하게 된 계기는?

1986년 박원순 변호사와 의기투합해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들었다. 당시 모든 대학에서 근현대사를 3·1운동까지만 가르치고 해방 정국, 이승만·박정희 정권 부분은 못 가르칠 때였다. ‘한국 민주화가 이렇게 더딘 것은 역사를 몰라서다. 근현대사를 연구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자’며 의기투합했다. 근현대사 연구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심했느냐 하면 주요 대학 박사과정 두뇌들이 앞다투어 역사문제연구소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주로 어떤 일을 했나?

해방팀, 동학농민전쟁팀, 일제강점기 경제사팀 등 시대별로 팀을 나누어 발제를 했다. 진보적 학자들을 자문위원으로 모셨다. 역사문제연구소가 생긴 뒤 유사한 연구소들이 뒤따라 만들어졌다. 그렇게 해서 학술단체협의회가 생겼다. 경계 없이 모든 학문 분야가 다 모여서 한국 현대사를 분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학술단체협의회 산파 노릇을 했다. 그 기틀을 잡은 뒤 나는 민족문제연구소로 옮겼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했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처음 생겼을 때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라고 냉대를 받았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국민적 분위기를 바꾸는 데 민족문제연구소가 일조했다고 본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교과서에서 친일 반민족 작가 작품이 거의 다 빠졌다. 친일파 청산은 국민 다수의 공감대를 얻은 데 비해 친일파를 기리는 기념상까지 없애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깝다.

친일파를 기리는 상의 대표 사례는?

미당문학상이다. 아무리 서정주 시가 좋아도 그가 친일한 건 맞다. 친일파를 얘기하면 옛날 얘기 왜 하냐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친일은 현재와 미래다. 미당문학상도 없애야 한다. 대부분 미당 서정주의 친일 행적과 전두환 정권 찬양 행적을 비판하지만 옹호하는 사람은 ‘작품은 좋다’는 논리를 편다. 우린 미당의 작품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의 친일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을 두고 논란이 뜨거웠는데?

<친일인명사전>은 광복 이후 학술 연구사 최고 업적 중 하나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기 전에 보수 언론이 거세게 비판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주가 친일파였다는 것은 이미 공개 검증된 사안이다. 책이 나오기 전에 사설로 비판했지만 나오고 나서는 아무 말도 못하더라. 박정희의 만주군 중위 경력이 친일이 아니라며 박지만씨가 배포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다. 재판까지 갔지만 우리가 다 이겼다. <친일인명사전>은 그만큼 정확하게 집필되었다. 내가 편찬위원회에 당부한 게 있다. 되도록이면 친일파로 판정 내려야 할 사람만 기록하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친북 인사는 뺐다고 비판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친북 인사도 다 들어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많이 보급됐나?

원칙대로라면 모든 관공서, 국가 공공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노골적으로 막았다. 공공도서관 실무자들이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하자고 예산을 올리면 위에서 못 사게 막아 아직도 보급률이 낮다. 다만 민주적인 시도 교육감들이 적극 호응해서 중고등학교 도서관에는 많이 보급됐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7-10-18> 시사인

☞기사원문: “[친일인명사전] 공공도서관에 비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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