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농의 아들에서 일국의 지도자로
‘유신’의 명암을 극명히 보여줬던 공통점
시대를 초월해 여러모로 닮았던 두 정객
▲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소장(왼쪽) 모습(사진=아시아경제DB)
▲ 1963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 1000엔 화폐 모델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매해 10월26일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일과 1979년, 10.26 사태가 마주하는 날이다. 70년의 시간적 간극을 두고 이날 죽은 한국과 일본의 두 거물급 정객,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토 히로부미는 ‘유신’을 슬로건으로 했던 점과 함께 여러부분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는 역사 속 인물들이다. 그 공통분모의 기반에는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체제의 붕괴와 서구화의 과도기를 겪은 ‘근대화 1세대’들의 인생역정이 들어있다.
두 인물의 공통분모는 둘다 소작농의 아들에서 출발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본 야마구치의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리스케(利助)와 일제 치하 경상도 구미에서 역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마사오(正雄). 이 두 사람의 유년시절엔 장차 이 둘이 일국의 역사를 뒤바꿀 거물급 정치인이 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오늘날에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지식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건립한 교육기관이었던 송하촌숙(松下村塾)에 들어갔던 제자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제자라고 할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신분이 워낙 낮았던 탓에 그는 교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 서서 수업을 들었다고 전해지며 쇼인의 제자들의 하인 일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한 수준이었다. 요시다 쇼인조차 그에게 아무 능력이 없는 인물이라 평했을 정도였지만 그가 여기서 만든 인맥은 훗날 그가 출세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됐다. 상당한 굴욕을 당하면서도 굳이 송하촌숙에 기거했던 것은 그의 강한 출세욕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세욕에서는 박 전 대통령도 밀리지 않았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재직하던 도중, 군인이 되기위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또한 상위 성적자에게 주어지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절치부심하며 육사에 들어갔다. 당시 일본 본국의 육사는 조선인들 중에선 1년에 한두명이 들어갈 정도로 매우 들어가기 어려운 출세의 발판이었다. 나이제한으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자, 혈서까지 제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다만 권력을 잡은 방식만큼은 두 인물이 전혀 달랐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 전 대통령과 달리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 초기 정한론파와 내치파간의 갈등에서 주요 권력자들이 내전이나 암살로 사망해 공백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초대 총리가 됐다. 1885년, 이토 히로부미는 고작 만 44세의 나이로 초대 총리대신이 됐으며 이후 주요 공직을 두루 거쳐 조선 병탄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일본 왕실로부터 공작지위까지 받게 됐다.
집권 후 두 인물의 정치는 한일 양국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꿔놨다. 전형적인 19세기형 정치가였던 이토는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을 안착시킨 인물로 평가받지만, 일본을 제국주의의 길로 인도했다는 비판도 함께 듣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전후 국가재건과 근대화를 목표로 했고 경제발전이란 성과를 냈지만 군사독재를 시행하면서 민주화를 후퇴시켰고,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됐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이러한 두 사람의 공과는 ‘유신(維新)’이란 두 글자로 압축된다. 원래 유신이란 사서오경 중 하나인 시경(詩經)에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에서 발췌된 내용으로 ‘주수구방 기명유신(周雖舊邦 其命維新)’ 즉, “주나라가 비록 역사가 유구하나 그 명은 새롭다”는 말에서 따왔다. 메이지 시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이 말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근본적인 개혁을 상징하는 말처럼 쓰였다.
철저히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권위주의 정부가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명분으로 독재체제를 이어가면서 이에 반대하는 정적은 가차없이 숙청하며 무분별한 근대화를 이끈 점이 두 나라 유신의 공통점이다. 이 체제는 근대화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엄청난 부작용들도 함께 낳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전 근대시대의 관행, 국가주도 경제에 의한 정경유착, 각종 문화지체현상 등 오늘날 현대 한국과 일본의 후손들이 도저히 손대기 힘든 수준으로 커져버린 사회문제의 기초가 된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2017-10-26> 아시아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