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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교회, 정교분리인가 정교유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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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심포지엄 ‘일제강점기 파시즘과 한국교회’ – 1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이 ‘일제강점기 파시즘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정기 심포지엄을 열었다.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마련한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일제의 종교통제와 전쟁 동원”, “전시체제기 가톨릭교회의 부일협력”, “일제강점기 가톨릭교회의 제도성에 대한 반성” 등을 토론했다.

“교회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다”

먼저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연구실장은 ‘전시체제기 가톨릭교회의 부일협력’을 주제로 발표하고, 일제강점기,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가톨릭교회가 일제 지배정책에 예속됐고, 협조했으며, 이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가톨릭 인사들에 대해 교회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밝혔다.

박수현 연구실장은 일제강점기 한국 가톨릭교회와 당시 교회를 관할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입장에 대해, “일제강점 초기부터 가톨릭교회는 일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제의 지배를 환영하기까지 했다. 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선교권만 보장해 준다면 일제의 강점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고 밝혔다.

또 그는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자주독립의 능력이 떨어지므로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일제의 통치를 받는 것이 낫다고 인식했다며, “이와 함께 가톨릭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부정하며 내세운 논리는 ‘정교분리론’으로, 그러나 이 원칙은 일제의 강점을 인정하고 지배정책을 따르는 순간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말했다.

‘정교분리’를 내세웠지만, 일제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행위 자체도 ‘정치’였다는 것이다.

박 실장은 가톨릭교회에서 이러한 방침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이 없었고, 이는 교계제도라는 가톨릭교회의 조직구조의 영향이었다며, 나아가 교회는 불가 방침을 고수하던 신사참배까지 허용하면서 이념마저도 일제에 종속되어 갔다며, “이 시기 가톨릭교회의 친일은 일제의 압박을 탓하기에는 너무도 적극적이고 노골적이었으며, 정세의 변화와 상관없이 이전부터 계속되던 순응과 협력의 연장선상이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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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0일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이 ‘일제강점기 파시즘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정기 심포지엄을 열었다. ⓒ정현진 기자

<경향잡지> 일제 협력을 위한 선전, 선동에 이용

박 실장에 따르면, 특히 이러한 친일 행태는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부터 본격화됐다.

“천주 10계 중 제4계에는 다만 부모에 대한 의무뿐 아니라 제왕과 국가에 대한 의무도 포함되어 있음은 우리 교우들이 누구나 다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국가에 대한 이 의무는 평상시에도 잘 지켜야 함은 물론이나 현금과 같은 국가의 비상시를 당하여는 그 의무가 더 한층 중하여짐은 장황한 설명을 기다릴 것 없이 명백한 것이다.” (<경향잡지> 1937년 7월호에 실린 7월 25일자 7개 교구 주교 성명서 ‘비상시에 처한 우리의 의무’ 일부)

박수현 실장은 이 당시 가톨릭교회의 친일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당시 발행된 <경향잡지>에 실린 교회의 공식 입장을 통해 증명했다. 당시 <경향잡지>는 가톨릭교회의 공식 기관지이자 서울교구의 관보로 전시체제기에는 종교계의 대표적 친일잡지가 됐으며, 성명서와 사설 등을 통해 신자들에게 파시즘 체제를 미화하고 전쟁 협력을 촉구하는 선전, 선동지가 됐다.

그는 <경향잡지>를 통한 교회의 선전, 선동 대부분은 교회 상층부에서 신자들의 각성과 실천을 요구하는 강력한 메시지이며, 끊임없이 반복되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며, “수직적 관계의 교계제도에 익숙한 신자들은 성직자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경향잡지>를 접한 신자들은 전쟁의 참혹함과 고통보다는 승리의 기쁨과 새로운 희망, 황군으로서 죽는 것은 종교적 순교라는 믿음이라고 생각한 신자가 없다고 하기 어렵다”고 했다.

또한 당시 한국교회의 중추인 서울교구는 중일전쟁을 지지한 지 1년 뒤, 일제가 만든 관변단체에 예속돼, 일제의 정책과 방침을 따른다.

일례로, 서울교구는 1938년 중일전쟁 1주년을 맞아 일제가 조직한 관변 전쟁협력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하 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했으며 그 대표는 라리보 주교, 실무 책임은 장면이었다. 서울교구는 이어 1939년 5월 종교단체로는 가장 처음으로 총동원조선연맹 산하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도 조직했다. 이 단체의 이사장은 라리보 주교, 이사는 노기남 주교 외 사제 4명, 평신도 7명이 맡았다.

“폐하와 제국의 현명한 통치가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천주교회 신자로서 교회의 모든 본분을 안온하게 지켜 가고 있었을지가 의문이다. ….대동아 건설의 대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억일심으로 만민익찬의 신체제를 강조하는 이 시기, 천주교 신자로서 국가정책에 적극 호응하기 위해” (1940년 매월 첫째 주일을 ‘교회 애국일’로 지정하며 이를 설명한 노기남 대주교 발언)

가톨릭교회는 1941년 비행기헌납운동과 노기남 대주교의 1만여 원 조선군사령부 헌납, 1942년 징병에 대비한 일본어 강습회 실시, 1943년 학도지원병 지원 독려 강연회 등을 이어 가며, 조직적으로 일제의 요구를 충실히 따른 것은 물론 자발적 충성을 과시한다. 그 중심에는 김명제, 김윤근, 노기남, 신인식, 오기선 등 신부와 남상철, 장면 등 평신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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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체제기 가톨릭교회의 부일협력에 대해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연구실장은 “사목이라는 이름으로 선량한 신자들을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내몬 죄는 적지 않다”고 일제시기 교회의 잘못을 비판했다. ⓒ정현진 기자

“가톨릭 인사 ‘친일명단’ 발표에 유감을 표한다” (2008년 가톨릭 성직자 등 친일인명사전 수록에 대한 서울대교구 입장)

문서상으로도 친일행적이 뚜렷이 드러나는 이들 7명(김명제, 김윤근, 남상철, 노기남, 신인식, 오기선, 장면)은 2008년 4월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 의해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오른다.

이에 따라 교계 언론은 사설과 기사를 통해 이에 반박했으며, 서울대교구는 대변인 허영엽 신부의 이름으로 “유감”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성명서에서 서울대교구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명단에 가톨릭 인사 7명이 포함된 것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당시 각계 단체의 책임자는 일제 총동원 단체의 장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친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판단이라고 반박했다.

또 “겉으로 드러나는 단편적인 면만을 보고 실제로 그분들이 일제 치하에서 어떤 희생과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과 판단, 올바른 조사가 결여된 것 같아 심히 유감”이라며, “친일 인사로 발표된 가톨릭 인사들이 우리 민족에 어떤 해를 끼쳤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서울대교구는 성명 발표와 함께 서면으로 이의신청을 제기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노기남 대주교는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반민족행위자로도 이름이 올랐으며, 서울대교구는 이에 대해서도 이의신청을 했지만 역시 기각됐다.

이에 대해 박수현 실장은 “가톨릭교회의 친일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며, 일부의 일탈이 아닌 조직적 친일이었다”며, “그럼에도 현재까지 교회는 반성은커녕 친일에 책임을 져야 할 인사들을 적극 옹호하고 구체적 증거를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해방 이후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거의 없으며, 친일 세력이 그랬듯이 일제가 패망한 뒤 공식적 반성과 참회 없이 새로운 정치권력과 타협하고 밀착했다며,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대응은, 나름 교회가 진일보한다는 기대를 갖게 했던 2000년의 반성과 참회조차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 12월 3일 가톨릭교회는 새천년을 맞아 ‘쇄신과 화해’라는 문건을 통해 과거의 잘못에 대해 참회와 쇄신, 민족과 화해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대열에 함께 하려한다며, 7개 항목에 대해 반성한 바 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내용이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것인데, 교회는 이에 대해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 실장은 “가톨릭교회는 호교라는 자신들만의 무기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파시즘 체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며, “이는 어떤 명분이든 죄악이며, 그리스도교 정신에도 크게 반하는 것이다. 더욱이 신자들을 침략전쟁으로 내몬 행위는 전쟁범죄이자 반교회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또 “그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이었다고 변명하거나 돌려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이었다”며, “1970-80년대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노력, 불의에 저항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기억이 온전히 전통으로 남기 위해서는 원죄인 과거 친일행적에 대한 진정한 참회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17-10-31> 가톨릭뉴스

☞기사원문: 일제강점기 교회, 정교분리인가 정교유착인가

일제강점기, 교회의 선택은 과연 ‘생존’이었나?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심포지엄 ‘일제강점기 파시즘과 한국교회’ – 2 

10월 30일 ‘일제강점기 파시즘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열린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정기 심포지엄에서 한만삼 신부(수원교구)는 ‘일제강점기 가톨릭교회의 제도성에 대한 반성’과 관련해 발표하고, “교회는 과거의 역사적 불의에 대한 인정과 회개, 그리고 일회적 반성이 아닌 끊임없는 회개와 용서를 청하는 자기고백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한 신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교회를 관할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사상과 인식, 파시즘 시대의 교황청 상황,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제도성이 이들과 만나 빚어진 한국 가톨릭 교회의 한계와 오류를 짚었다.

제국주의와 국수주의, 성직자 중심주의, 정교분리 원칙의 결과

한만삼 신부는 먼저 한국 교회사 속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조선교회 교도권을 쥐고 모든 결정과 선택을 했던 이 시기를 세계사적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1784년 이승훈의 세례로 가톨릭공동체가 시작되고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뒤, 파리외방전교회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선교와 사목의 중심에서 1942년 노기남 주교가 경성교구장이 되기까지 100년을 이끌었다.

한 신부에 따르면 이들 프랑스 선교사들은 성직자 중심주의와 성사 중심주의, 직접적 선교 위주의 선교정책과 정교분리 원칙을 기반으로 했다. 이들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제국의 폭력적 군사독재 정치체제인 ‘보나파르티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이 사상은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나 갈등을 ‘국가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억압하고, 지배층의 집단 이익에 종속시키는 이데올로기로 ‘공동체가 곧 민족’임을 주입시켰다.

이는 국수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자연히 접목됐고, 이 영향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는 선교 역시 ‘프랑스의 영광’이었다.

또 하나 영향을 미친 것은 당시 프랑스에서 강했던 ‘얀세니즘’ 신학이다. 얀세니즘은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협력하는 방식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입장으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엄격한 윤리성을 요구하고 모든 행위에 죄스러움을 붙이게 된다.

한 신부는 이러한 제국주의와 국수주의, 성속 이원론, 정교분리라는 원칙 등은 프랑스의 영광이 교회의 영광이라는 국가주의 사상과 모국의 우월한 문화와 근대화된 문명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다시 선교사들로 하여금 교회의 선교를 제국주의 진출과 동일시하는 ‘문명화 사명’ 의식에 빠지게 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식민지 국가를 열등한 민족으로 일반화해 선교지에서 ‘차별’을 당연시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됐으며, 종교의 자유를 열망하는 애국적 선교사들은 프랑스제국의 식민지 개척 열망과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다툼에도 휘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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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만삼 신부는 “국가가 있어야 종교도 있다”는 논리에 반박하며, 국가는 국민을 위해 교회는 신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 선교를 위해서라면 제국주의도 상관없다

조불조약(1886) 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자유롭게 살게 됐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은 불평등 조약의 특혜로 선교활동 보호와 지원을 받아 교세 확장에 나섰다. 프랑스의 입지 확장을 위해 프랑스 정부의 지원과 도움도 받았다.

한편으로 1890년에 새로 조선교구장이 된 뮈텔 주교는 민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 등 조선의 주요한 사건, 러시아와 프랑스의 외교적 관계 고려, 선교사와 교회의 권익 보호와 지원 등 여러 상황과 조건 속에서 주요한 외교적 중재자이자 권력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곧, 프랑스 선교사들이 불평등 조약의 특권을 치외법권적 힘과 권력으로 사용하면서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은 백성들에게 적대적 세력이 됐다. 이는 부정부패 관리와 봉건왕조, 외세가 어울리는 상황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이 무너진 뒤, 1905년에 정교분리법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는 등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공식화됐다.

이에 따라 선교사들은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됐고, 모국의 외교 노선을 따른다. 이 상황에서 뮈텔 주교의 책임 아래 있는 한국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정부의 요구로 대한제국 정부와의 관계를 철저히 단절했고, 뮈텔과 선교사들은 조선을 개화하지 못하고 자치와 자립 능력이 없다고 보고 “조선이 러시아보다는 서구화되고 강력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이 교회와 프랑스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판단했다.

한편,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 혁명, 조선에서의 박해 경험과 트라우마로 정치와 종교영역의 분리를 전제하는 정교분리를 내세움으로써 새로운 국가권력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한 신부는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천주교 지도부의 결정은 한국교회의 결정이 되었고, 이들은 한민족의 비참한 현실보다는 선교의 가능성에 더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며, “선교의 자유만 보장된다면 그것이 제국주의 침탈로 이뤄진 정치적 권위라도 합법적 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교분리 원칙의 의미는 중세교회처럼 권위적 교회가 정치를 지배하려 하거나 국가가 종교단체의 활동 및 개인의 신앙행위에 부당하게 간섭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인데, “이 원칙을 교회와 국가간 ‘상호불간섭주의’로 이해하면 국가의 지배자들이 종교를 자신의 정의롭지 못한 정치체제를 존립시키는 도구와 이데올로기로 이용할 위험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뮈텔 주교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같은 입장에 따라 을사보호조약(1905), 한일강제병탄(1910)의 상황에서도 “상호불간섭의 정교분리 원칙”으로 자신들의 선택과 판단을 합리화하며, 한민족의 식민 지배에 대해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모국 프랑스에 대해서는 충성스런 애국심을 보이며, 한민족을 위한 애국적, 정치적 민족운동에는 극렬히 반대하는 이중적 자세를 취한다.

한만삼 신부는 “결국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은 일제의 파시즘 도구가 되어 종교지도자 스스로 정치적 무능함과 무관심을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역설적으로 일제에 정치적으로 협력하게 됐”고, “또 일제의 정교분리 정책에 협력한 결과로 특권과 우대를 받았던 교회가 종교규제라는 일제의 행정적 압박을 받게 되자 교회를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사실상 정교유착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국 일제 강점 이후 선교사들은 교도권으로 한국인 신자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금했고, 주권이 상실되는 강탈의 상황에서도 초월적이며 내세적인 신앙만을 고취시킴으로써 교회가 사회무관심주의에 빠져 민족사에 동참하지 않는 탈민족화의 길로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시기, 교황청은 이른바 ‘좌익’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결합하자 일제는 반공을 국시로 표방했고, 교황청은 이러한 일제의 입장을 지지했다. 1930년 무렵 교황청이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의 독재국가를 인정하고 협약을 맺으며 반공의 가치를 적극 추구하자, 조선교회 또한 공동선 구현과는 상관없이 반공의 가치를 추구했다.

한 신부는 “결국 친일과 반공은 민족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제국주의 파시즘의 역사적 열매가 됐고, 이들과 협력의 길을 걸어간 프랑스인 교회지도자들은 조선교회를 강력한 교계제도의 질서로 이끌며 순종과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반공적이며 반민족적 행위를 부끄러움 없이 강행했다”고 말했다.

한만삼 신부는 “시대의 불의는 한순간에 나타나 뜻밖의 열매를 맺지 않았다”며,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역사 속에 한 인간인 프랑스인 뮈텔, 그를 기르고 이끈 프랑스 제국과 전근대적 가톨릭 교회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일제강점기의 천주교 지도자들은 성속이원론을 뿌리로 정교분리 정책을 교회를 위한 생존의 길로 택했고, 종교의 자유와 포교권을 지키기 위한 이유로 뚜렷한 친일 행적의 열매를 맺었다”며, “교회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변명 뒤에는 악을 처단하여 민족을 살리고 지키기를 바랐던 수많은 혁명적 운동가들의 희생과 죽음과 고난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 신부는, “현재까지 이어오는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있다’는 사상은 국가주의 파시즘에 협력한 교황청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끈 교회의 과오에서 시작됐다”며, “국가주의 파시즘이라는 불의에 침묵하며 반민족, 반독립, 반공주의에 공조하고 협력했던 치명적 아픔을 벗어날 길은 과거의 역사적 불의에 대한 인정과 회개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regina@catholicnews.co.kr)

<2017-10-31> 가톨릭뉴스

☞기사원문: 일제강점기, 교회의 선택은 과연 ‘생존’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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