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4년 가을 두명의 청년을 만났다. 화가 김원중과 다큐멘터리 감독 양수환이 그들이다. 당시 김원중은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에서 귀국한 직후였는데, 이들은 공동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대만·오키나와·한국을 기행하면서 각 지역의 주민운동과 사회운동을 취재하고, 이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장소성에 기반하고 있고, 거기에는 모순을 품고 있는 사회적 의제가 있으며, 그 장소와 의제 안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단순한 풍경이나 물리적 공간으로 존재했던 곳에 실존적·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고유한 장소의식을 만들어낸다. 이 실존적·역사적 장소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기억에 의해 구축되는데, 따라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내밀하게 투시하는가가 중요하다.
그해 여름에 나는 조사 연구차 방문한 오키나와의 한 식당에서 후지모토 유키히사 감독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가게야마 아사코 감독과 15년간 홋카이도 지역에서 ‘동아시아 워크숍’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조선인 노무자 유골 발굴 작업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다큐멘터리 영화 <조릿대 묘표>(笹の墓標)였고, 내가 만났을 당시에는 이 영화의 한국어 자막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이 작업에 대해서는 한국에 돌아와 민족문제연구소에 있는 김영환에게 자세한 내용을 듣고 자료 등을 검토해 뒤늦게 나의 무지를 교정할 수 있었다.
당시 후지모토와 가게야마 감독은 삿포로에 6개월, 오키나와에 6개월씩 체류하면서 삿포로에서는 <조릿대 묘표>를 편집하고, 오키나와에서는 다카에와 헤노코의 반기지 운동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영화 가운데 <러브 오키나와>는 2016년 제주도에서 열린 제1회 강정국제평화영화제에서 ‘강정평화영화상’을 수상했다.
다시 두 청년. 김원중과 양수환은 대만에서 탈핵 운동을 취재하고, 최서단 요나구니섬에서 오키나와 본도까지 자위대 기지 및 헤노코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있었다. 간간이 보내온 사진을 보면, 검게 그을린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오키나와에서 다시 한국의 제주로, 진도로, 밀양으로, 고리로, 안산으로 그들의 자전거 페달은 쉼 없이 회전했으며, 1년여가 지나 그 기록들은 <다른 세계>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탄생했다.
이 영화의 완성판을 나는 경희대에서 학생들과 함께 보고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일본에서 온 사학 전공의 유학생은 오키나와 역사에 대해 전혀 배운 바도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큰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올해 11월 말에는 후지모토·가게야마 감독이 한국을 방문해 헤노코와 다카에의 주민운동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했다. 한국의 관객들에게 오키나와의 현실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싶다고 그들은 말했다. 일본의 본토 미디어들은 전혀 보도하지 않는 장소들의 기록이라며.
다큐멘터리 영화란 무엇인가. 대형미디어들이 은폐하고 있는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이다. 그런데 이 통로를 대중적으로 확장하는 게 매우 어렵다. 공영방송이나 영화의 배급망이 이런 소수영화를 지지할 수 있다면, 익숙한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의 현격한 간극은 얼마간 좁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접속시키고 충돌시키는 계기가 있어야겠다. 증언과 기록의 카메라가 역사를 만들어왔다.
<2017-12-08> 한겨레
☞기사원문: [크리틱] ‘다른 세계’의 카메라 / 이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