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일제에 의해 ‘중류사회의 표준’이 된 삼베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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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13

요즘 우리네 일상에서 접하는 수의(壽衣)는 삼베[麻布]를 소재로 한 ‘삼베수의’다. 그런데 본래 삼베라는 소재는 돌아가신 분께 입혀드리는 수의에 쓰는 것이 아니라, 망자(亡者)의 가족과 친척들이 입는 상복(喪服) 소재로 쓰는 것이다. 돌아가신 분과의 혈연적인 친소(親疏) 관계를 따져서 아들이나 딸처럼 가까운 사람은 슬픔[哀]이 크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꾸밀 겨를이 없다는 것을 형상화하기 위해 가장 거칠고 성글게 짠 삼베옷을 입고, 관계가 먼 사람일수록 슬픔이 작기 때문에 조금씩 고운 삼베옷을 입고 바느질도 제대로 한 옷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런데 상주 등이 입어야 하는 거칠기 짝이 없는 삼베옷을 지금 우리는 돌아가신 분께 입히고 있다.

우리네 상장례문화에서 삼베수의가 본격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다. 현재까지 문헌에서 확인된 것은 1925년 김숙당(金淑堂)이 지은 <조선재봉전서>에서 ‘가는베(細布)’로지으라고 한 것이 처음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베’는 기본적으로 삼베[痲]를 의미한다. 이어 1934년에 조선총독부가 반포한 <의례준칙(儀禮準則)>에서 ‘포목(布木)’으로 수의를 마련하도록 규정하는데, 여기서 ‘포(布)’는 삼베이고 ‘목(木)’은 무명(면)이다. 즉 일제강점기에 삼베수의가 등장하고 총독부에서 이를 백성들이 지켜야 할 준칙으로 규정한 것이다. 준칙을 제정, 공포한 이후 총독부는 각 지방별로 지방의 실정을 반영한 준칙시행서를 발행하게 했고, 수년 간 온갖 조직을 동원해 폭압적인 방식으로 준칙을 실행해나가면서 기존의 풍습 중 준칙과 맞지 않는 것은 ‘단연코 배제하는데 힘쓰고’, ‘확고한 신념과 부단의 노력을 통한 철저한 보급’을 강조한다. 이렇게 삼베수의는 우리네 일상으로 들어와 어느새 “삼베수의가 본래의 우리 전통”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게까지 되었다.

그동안 한국 전통복식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숙제가 있었다. 우리 전통수의는 삼베로 쓰지 않고 색과 무늬가 화려한 최고급 직물을 쓸 뿐만 아니라 고인의 신분 내에서 허락된 최고 등급의 옷을 입는 것이 예법이라는 사실을 복식사 연구자들은 잘 알고 있다. 또 현재 일반화된 삼베수의는 일제가 규정한 『의례준칙』에서본격등장하고김숙당의저서에서그 문을 열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김숙당이 왜 일제의 식민정책에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는지 그 배경에 관해 명확히 설명할 만한 자료가 없었다.

필자는 최근 연구자료를 분석하던 중 이 해답을 찾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총독부 본부 및 소속 관서의 직원과 봉급 등을 기록한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에서 김숙당이 1916년부터 1921년까지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원촉탁(敎員囑託)으로 근무하면서 총독부에 소속된 신분으로 봉급을 받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후 그는 숙명여고보로 자리를 옮겼고, 이 학교에서 재직하던 중 <조선재봉전서>를 출판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기록된 김숙당의 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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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의 교원촉탁으로 급여까지 받았던 김숙당이 식민정책 시행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식민지 조선에 대해 무력 대신 교육과 교화를 통한 지배방식인 ‘문화통치’를 시행하던 총독부는 ‘교육’ 방법으로 삼베수의를 제시할 수 있는 배경을 갖고 있었던 김숙당의 신분을 십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숙당이 책을 출판한 1925년 즈음의 조선인들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마지막 갈 때 “보드라운 명주”를 한 조각이라도 대서 만든 수의를 입혀 가족을 보내고 싶어 했고 그래야 효(孝)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사실은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숙당은 ‘수의’ 항목의 앞머리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각각 처지를 따라서 다르게 할 것이나 중류사회에서 보통으로 하는 것을 표준삼아 설명한다.

당시의 일반적인 민속현상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류사회의 표준”이라 하면서 삼베수의를 입어야 중류사회인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등장한 삼베수의가 <의례준칙>에서 명문화되고 강행된 1930년대는 일제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일제가 모든 노력을 총동원하여 식민지 조선의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해 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준칙을 강행한 목적도 결국 저축을 통한 국방금 및 군수품 헌납이었다. 1938년 11월 <동아일보>는 경북김천의 상가에서 준칙에 따라 상례를 치른 후 절약한 현금을 대구 신사(神社)에 헌납한 인물에 대해 칭찬하는 기사를 실었고, 이를 통해 일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적을 파악할 수 있다. 준칙에 규정된 삼베수의 역시 고급직물의 사용을 억제하고 값싼 직물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잉여 자원을 수탈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통시대에 삼베옷은 ‘가난’의 상징이었고, 삼베수의는 그 가난의 극치를 보여주는 옷이었다.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는 망자에게 삼베수의를 입히면 주위 사람들이 “오죽하면 삼베수의랴”라고 했다고 한다.

1925년 김숙당에 의해 ‘교육’의 방식으로 제안되고 1934년 총독부에 의해 ‘준칙’으로 규정된 삼베수의는 한국민의 자발적 의지가 아닌 일제의 ‘강압’을 통해 한국문화 속에 단단히 뿌리를 뻗었고 현재 우리 일상에 자리 잡았다. 그냥 옷감으로는 누구도 쓰지 않을 누렇고 조악(粗惡)한 직물을 내 가족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영원히 그 어딘가에 머물면서 입을 옷으로 쓰고 있다. 그 후 남은 가족들은 마지막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오래도록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한다. 일제가 강압적으로 만들어낸 “중류사회의 표준”에 우리는 아직도 살고 있다.

[참고문헌]
최연우,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 <韓服文化>20-2,2017,4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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