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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담화문으로 돌아본 ‘친일파 청산 좌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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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1949년 1월 10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반민특위 무력화 시도 담화문 발표
친일파 청산에 대한 노골적인 훼방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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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공간의 반민특위는 법 제정 1년여 만에 활동을 마감했다. 반민특위 전남 조사부가 광주에 설치한 투서함에 자료를 넣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우리가 건국 초창 ( 初創 ) 에 앉아서 앞으로 세울 사업에 더욱 노력하여야 할 것이요 ,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애되는 것보다 과거의 결절 ( 缺節 ) 을 청사함으로써 국민의 정신을 쇄신하고 … ”
-1949 년 1 월 10 일 이승만 대국민 담화

요약하자면,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69년 전인, 1949년 1월 10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즈음의 담화였다.

오랜 망명생활로 인해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은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친일파 청산에 앞장섰던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하려 애썼다. 결국 반민특위는 친일파들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산되었고, 대한민국의 친일파 청산은 실패했다.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청산에 대한 노골적인 훼방은 이승만이 발표한 다섯 차례의 대국민담화와 조작된 사건의 기록에 빼곡히 남아 있다. 그 논리들은 현재의 ‘적폐청산’을 반대하는 논리와 비슷하다. 다만 더 노골적이었다.

친일파 청산 움직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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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정국은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여러 담론의 격전장이었다.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우익과 김일성, 박헌영 등의 좌익이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그 중간 지대에는 좌우를 아우르며 상식을 추구했던 중도파들도 분명 존재했다. 사진은 해방 무렵 맥아더와 포옹하는 우익의 거두 이승만. <한겨레> 자료사진.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국민들을 중심으로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해방 초기에는 미 군정이 친일파 청산을 반대했다. 이 때문에 1948년 대한민국 독립 정부가 성립된 뒤에야 재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청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양곡 매입 법안 처리를 위해서는 국회 협조가 필요했다. 당시 정부가 제출한 양곡 매입 법안에 대해 국회에서는 강제 매입 조항을 자유 매입으로 하는 등의 수정안을 마련한 상태였다. 이승만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거부할 경우 양곡 매입 법안 통과가 어렵다고 판단해 1948년 9월 22일 반민법에 서명하고 법률 제3호로 공포했다.

법 공포로 9월 29일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반민특위는 11월 26일 법안 내용을 일부 개정해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기관조직법’을 추가했다. 법에 따라 특별 재판관과 특별 검찰관이 선임돼 체포에서부터 조사까지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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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한겨레> 자료사진.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 사무실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국민들은 제보함을 통해 반민특위의 활동에 적극 동참했다.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한 지 사흘 만인 8일 제1호 검거자 박흥식이 체포됐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 비행기 공업과 화신백화점 총수를 지낸 인물로 일제 말 국가총동원 체제에 충성을 맹세한 대표적 친일 반민족행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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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 매국노들. 민족문제연구소제공

박흥식이 체포된 이틀 뒤인 1949년 1월 10일 다급해진 이승만은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담화 당일에도 일제 밀정이었던 대통신문 사장 이종형이 체포됐다. 뒤이어 민족대표 33인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13일), 만주국 명예총영사와 조선 임전보국단의 이사로 활동했던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21일), 친일 문학의 거두 최남선과 이광수(2월 7일) 등이 줄지어 체포됐다.

5번의 담화에 담은 노골적인 견제

“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 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
-1948 년 9 월 3 일 < 친일파 처단에 대하여 >

“ 법으로써 죄를 벌함은 범죄자에게 보복을 가하는 것보다는 범죄자를 선도하여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려는데 목적이 있다 ”
-1948 년 9 월 24 일 < 반민족행위자 처단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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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의 친일파 재산몰수. <한겨레> 자료사진.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승만은 외부적으로는 반민법 반대 국민대회 등을 묵인 조장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반민법 개정안을 준비했다. 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국민담화를 이용해 여론전을 펼쳤다. 특히, 이승만은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통과된 이틀 뒤인 1948년 9월 24일 ‘반민족행위자 처단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법 운용은 보복보다 개과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가 발표한 담화에는 친일파들을 위한 변명과 강변이 고스란히 담겼다.

“ 반민 법안을 단속한 시일 내에 끝마치도록 할 것이다 . ( 중략 )…. 왕에 범죄가 있는 것을 들춰내서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 확보상 온당치 못한 일이다 .
-1949 년 2 월 2 일 < 반민법 실시에 대하여 >

“ 지금 진행하는 바와 같이 며칠에 몇 사람씩을 잡아 가두어 1,2 년을 두고 끌어 나간다면 이는 치안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지금 진행하는 방법을 모두 정지하고 ”
-1949 년 2 월 16 일 -< ‘특별경찰대 폐지 ’ 및 ‘반민법 개정 ’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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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반민특위의 활동은 우익의 방해공작으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친일파를 심리 중인 반민특위 법정. <한겨레> 자료사진.

1949년 2월 2일 이승만이 발표한 담화 내용을 보면, 법 제정 절차를 걸쳐 발족된 반민특위의 활동을 ‘위헌’으로 규정해 친일파들에 대한 검거활동 제한을 주장한다. 급기야 2주 뒤인 1949년 2월 16일 담화에서는 ‘특별 경찰대 폐지’ 및 ‘반민법 개정’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의 행동이 지나쳐 국가 치안에 방해가 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하여 대통령으로서 조사원의 행동을 금지하고 반민법의 일부를 개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을 이용한 이승만의 이 같은 반민법 무력화 시도로 인해 공소시효가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말일로 단축되기도 했다.

친일 경찰의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 음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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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라고 지시한 국무회의록 사본.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반민법 개정을 통해 반민특위의 활동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와 함께 반민특위 관계자의 암살 음모도 꾸몄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1948년 10월 친일 경찰인 노덕술과 최난수 등은 백민태를 통해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와 정부 요인 등 15명의 암살을 계획한다. 그러나 사주를 받은 백민태가 암살 명단을 본 뒤 두려움을 느끼고 폭로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국회 프락치 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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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11월8일 이승만 대통령 정부와 자유당이 신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개정안의 기습통과를 막기 위해 조병옥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전 의원들이 12월20일부터 본회의장에서 철야 농성을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1949년 5월에는 이승만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소장파 의원 이문원 등 10여 명이 체포됐다. 이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남조선 노동당의 국회 프락치부에 의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체포된 의원들의 혐의를 입증할 물적 증거가 없었지만 재판부는 13명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국회 개원 직후부터 체포되기 전까지 이승만의 전횡을 견제하는 주요 세력으로 활동해 왔다.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 활동은 위축되고 이승만이 국회를 장악하게 됐다. 또, 국가보안법이 헌법을 능가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6.6 반민특위 습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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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 김상돈 부위원장과 서상렬 조사위원(왼쪽부터). <한겨레> 자료사진.

이승만의 지시로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사무실도 습격한다. 내무부 차관 장경근과 치안국장 이호, 서울시경 국장 김태선 등이 기획해 차출된 경찰관 80여 명이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 반민특위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특위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친일파 관련 조사 서류를 빼앗았다. 경찰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현직 경찰의 75%가 넘는 인원이 친일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각 분야의 친일파가 체포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친일 경찰이 가장 많이 체포됐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 경찰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최운하가 특위에 체포되자,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반민특위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약 8개월 만인 1949년 8월 31일을 끝으로 해산되고 만다. 그리고 6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친일파 척결은 미완으로 남게 됐다.

참고문헌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 허종
<반민특위 방해공작과 ‘증인 ’ 및 ‘탄원서 ’ 분석 > 이강수
<인물현대사 -미완의 역사 , 친일청산 반민특위 김상덕 편 > KBS1-TV 2004년 11월 12일 자 방송
<자료대한민국사 > 제 12권
<국사관논총 > 제 84집
<현대일보 > 1948년 9월 4일 치
<서울신문 > 1949년 1월 11일 치
<한성일보 > 1949년 2월 3일 치
<조선일보 > 1949년 2월 16일 치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2018-1-11> 한겨레

☞기사원문: 이승만 담화문으로 돌아본 ‘친일파 청산 좌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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