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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넘게 일본정부와 싸운 92세 ‘BC급 전범’ 이학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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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학래 선생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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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인 김종익 씨의 번역 봉사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냈다.ⓒ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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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에게 교수형, 나머지 18명에게는 종신형과 유기금고형이 선고됐다. 이로써 ‘평화에 대한 죄’의 용의자인 A급 전범에 대한 단죄가 끝났지만 ‘전쟁 범죄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규정한 포츠담선언에 따른 이 재판은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았다(관련 글 : 1948년 오늘-도쿄재판, 일본 전범 7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다).

태평양전쟁의 최대 책임자였던 일왕 히로히토(裕仁)를 비롯해 적지 않은 전쟁범죄자들이 처벌을 비켜 갔기 때문이었다. 맥아더의 참모였던 연합군 최고사령부 찰스 윌로비(Charles A. Willoughby) 장군이 ‘역사상 최악의 위선’이라고 한 언급은 그런 상황을 에둘러 짚은 것이었다.

‘BC급 전범’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 129명

난징대학살(1937)의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를 비롯한 주요 일본 왕족들도 처벌을 면했다. 왕족으로선 유일하게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만이 전범 지명자 명단 안에 포함됐지만, 그 역시 불기소로 석방됐기 때문이다.

생체 실험 부대인 731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와 관계자들 역시 미국에 연구 자료를 넘겨주는 대가로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그 밖에 만주국의 실력자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아이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지만 석방됐다.

도쿄재판에서 불기소로 석방된 A급 전범 가운데 기시 노부스케가 뒷날 총리가 되고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전후 우익의 실세가 된 배경이다. 처벌받아야 할 전쟁범죄자들은 전후 일본의 주류로 복귀했다. 지금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B, C급 전범은 각각 ‘통례의 전쟁 범죄’ ‘인도(人道)에 대한 죄’의 용의자다. ABC의 구분은 죄의 경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A급 전범이 주로 일본군이나 정부의 고위 지도자였고, BC급에는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청년들이 수행했던 포로 감시원과 같은 하위 군인과 군무원이 포함돼 있었으니 그런 뉘앙스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B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은 연합국 피해 당사국에 의해 이뤄졌다. 주로 포로 학대 혐의로 기소된 BC급 전범 가운데에는 148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들 중 23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고, 125명이 유·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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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트럼 형무소에서 스가모 프리즌으로 이송되기 직전의 전범들.(1951년 8월)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저자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전범 재판을 담당하는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은 ‘모국어로 재판받을 권리와 변호권을 인정’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의 변호는 일본인 변호사가 맡았고 재판은 영어로 진행됐다.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변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중형을 선고받고 목숨을 잃거나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1925~ )가 2016년에 일본에서 펴낸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 청년>의 한국어판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온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이 책은 1956년 도쿄 스가모형무소에서 가석방된 뒤, 이학래가 청원과 진정, 소송 등으로 일본 정부와 싸워온 61년간의 집념 어린 교섭 투쟁의 기록이다.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삶'(옮긴이 김종익)의 자취다.

그가 조선인 전범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요청서를 제출한 상대는 1955년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총리) 이후 아베 신조까지 역대 총리 29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답변은 한결같이 ‘배상과 보상’은 “한일조약으로 이미 해결이 완료됐다”였다.

지난해 벽두, 이학래는 2017년도 새 수첩에 올해의 목표로 “법안 제출, 입법”을 써넣었다. 신년 수첩에 BC급 전범 모임인 ‘동진회'(東進會) 운동의 경과 등을 적어넣고, 따로 유골 송환의 경과와 자살자에 관한 내용과 그 해의 운동 방침을 기록하는 것은 그가 동진회 활동을 하면서 해마다 반복하는 일이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운동 방침과 목표를 기록했지만 그게 이뤄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 있는 한 그 실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죽어간 동료, 그중에서도 사형당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헛수고로 끝날 것 같은 일본 정부와의 교섭을 지치지 않고 이어온 힘은 ‘내일, 내일하며 사형 집행에 떨며 지낸 8개월, 그사이 떠나보낸 동료의 얼굴, 교수대 발판이 떨어지는 소리, 사형수 감방 벽에 새겨진 글자와 손톱자국'(우쓰미 아이코) 같은 동료의 유한(遺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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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저자는 부친의 환갑잔치를 위해 열일곱 살에 고향을 떠난 후 20년 만에 귀국했다. 뒷줄 가운데가 저자, 왼쪽과 오른쪽은 남동생과 여동생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전남 보성의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학래가 1942년 포로 감시원에 지원했을 때 그는 열일곱 살이었다. 시험을 보라는 면사무소의 권유를 거절하기 어려웠으니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었다. 부친도 썩 내켜 하지는 않았지만 “2년 계약이고, 병역도 면제된다면, 어차피 어딘가는 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마지못해 허락해줬다.

조선 전역에서 모집된 3224명과 함께 부산에서 훈련을 받고 배로 베트남으로 이동한 뒤 그는 타이 포로수용소에 배치됐다. 일본은 타이, 자바, 말레이 포로수용소의 포로 감시원은 조선인 군무원을, 필리핀과 보르네오 포로수용소의 포로 감시원은 대만인을 배치했던 것이다.

아무런 권한 없는 포로감시원 23명이 처형됐다

이학래는 후일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해지는 ‘죽음의 철로’, 415km의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에 투입된 연합군 포로감시 업무를 맡았다. 식량과 물자의 보급이 수시로 끊긴 현장에서 포로들은 콜레라 등 전염병과 각종 열대성 질환으로 고통받았고, 그들을 감시하는 조선인 군무원들은 포로들의 원성을 살 수밖에 없었다.

건설 현장에 동원된 포로 5만5000명 중에서 1만3000명이 사망할 정도였으니 타이·미얀마 철도는 ‘강제노동’과 ‘기아’ ‘구타’ 등의 ‘학대’가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패전 후 포로의 원한이 폭발하면서 포로 감시원은 전범 재판에서 추궁의 표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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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의 항일 비밀결사인 고려독립청년당 사건을 다룬 <적도에 묻히다>(역사비평사, 2012)를 쓴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는 동진회 활동을 일관해 지지하고 도와주었다.(2012. 11. 6.)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감시원의 얼굴은 물론 이름과 별명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포로들의 증언에 따라 조선인 포로 감시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전범으로 기소됐다. 연합군 포로에 대한 일본군의 관리는 포로 대우를 정한 제네바 조약을 위반하고 있었고 포로 감시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가 제네바 조약에 위배된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부산의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포로 감시원들은 민간인 군무원 신분임에도 철저한 군대식 교육을 받았다. 일제는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주입했고, 포로를 인도적으로 처우해야 한다는 사실은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군 포로를 강제노동에 동원했던 수용소 책임자이며 이학래의 상관이었던 분견소장 우스키 중위와 철도대 소대장 히로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변호인은 이학래가 말단의 군무원일 뿐, 포로와 관련해 아무것도 결정할 지위에 있지 않았다고 변호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학래는 결국 1947년 첫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7개월간 사형수로 살았고 20년으로 감형돼 복역하다가 1956년에 가석방됐다. 전범으로 낙인찍힌 그는 열일곱에 떠나온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 동료 넷은 처형됐고 셋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유기형으로 감형됐다.

이학래는 자신이 왜 전범이 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갓 스무 살이었고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는 뒷날, 태평양전쟁의 역사를 스스로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고 술회한다.

조선인 전범 148명 가운데 129명이 포로 감시원이었다. 부산 노구치 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현장에 배치된 포로 감시원 3016명 가운데 전범이 129명이나 나왔다. 일본군 가운데서도 이 정도 비율의 전범을 낸 부대는 없었다. 그것은 전범 재판에서 연합국이 조선인과 타이완인을 ‘일본인’으로 재판하는 데 합의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들은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다’

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이 져야 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범이 돼야 했을까. 이학래는 이 물음을 화두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평생을 싸워왔다. 그것은 ‘조선인 BC급 전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스러져간 동료와 그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참으로 길고 긴 싸움이었다.

그가 1955년 동료 70명과 함께 ‘한국 출신 전범 동진회’를 설립한 뒤 당시 수상 하토야마 이치로에게 조기 석방과 생활 보장, 유골 송환 등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다. 일본이 자신들에게 포로관리를 시키고 책임을 떠안기고 자신들을 방치한 데 대해 자신들이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97년부터 전 연합국 포로 초빙사업을 벌여 2015년까지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네덜란드 등의 전 포로와 가족 백 몇십 명을 초대했다. 외무장관이 이들을 면담하고 과거를 사죄하고 있으면서 정작 일본은 한국 전범들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2005년 공개한 한일회담 관련 외교 문서로 ‘일본 전범으로 형을 받은 한국인의 문제는 애당초 한일회담 의제에 올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었다. 이는 한국인 전범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일본 정부의 답변이 전적으로 궤변이라는 증거였음을 이학래는 지적한다(관련 글 : 1965년, 한일기본조약 조인, 그래도 문제는 남았다).

한국인 전범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다는 자책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전범의 멍에를 뒤집어썼고, 거기에다 조국의 전후 부흥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이들이 한국정부에 문제 해결을 요청하는 일을 전혀 꿈꾸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학래는 한국인 전범 피해 문제가 한일 교섭 초기부터 청구권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에 분노와 비애를 금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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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8월, 오스트레일리아의 캠벨에서 만난 옛 포로 던롭 씨(가운데)와 함께 하며 과거를 사죄하고 용서받는 화해가 이루어졌다.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2006년 한국정부는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한국인 BC급 전범자를 ‘강제동원 피해자’라고 인정했고, 보상책에 따라 사망자와 행방불명자에 대한 위로금과 생존자 의료비를 지원했다. 비록 일본 거주 전범들에게는 지원과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사망한 동진회원까지 이 신청에 응해 강제동원 피해를 인정받은 사실을 그는 조국이 인정하는 명예회복으로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1991년, 이학래는 7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 국가 보상 등 청구사건을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이 해에 그와 동료들은 군무원으로 3년, 전범으로 6년, 정신병원에서 무려 40년을 보낸 이영길을 보냈다. 여름의 불꽃놀이를 함포 사격으로 착각해 겁에 질렸던 그를 보내며 그들은 망가진 그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책임을 추궁해 가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이 소송은 1996년 도쿄지방법원이, 1998년에는 도쿄고등법원이 각각 청구를 기각했다. 1999년에는 최고재판소가 피해를 인정하고 입법부에 입법 조치를 촉구하는 판시를 했지만 역시 청구를 기각했다. 이후 동진회원들은 ‘한국·조선인 BC급 전범자 보상 입법’ 운동을 이어왔지만, 여전히 입법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2017년 현재, 이학래는 포로 감시원으로 3년, 전범으로 교도소에서 11년,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며 61년을 보내고 올해 92세가 됐다. 1991년 제기했던 소송의 원고 7명 가운데, 전범 출신으로 살아남은 이는 그뿐이다.

일본과의 싸움 61년, 아흔둘의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1961년 서른여섯 살 때 동포인 강복순과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그해, 모친이 사망했고 이듬해 부친의 환갑을 위해 20년 만에 귀향했다. 그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것은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부친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다녀갔다. 아예 일본서 모시겠다고 했지만 부친은 마음을 바꿔 귀국했는데 친구들에게 “내 아들은 훌륭한 집을 짓고 사는 대단한 녀석”이라고 했다고 한다. 부친은 17살에 떠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홀로 선 맏이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회고록이지만 책 <전범이 된 조선 청년>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하다. 일본 문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지은이는 놀라운 자제력으로 자신의 파란 많은 삶을, 거듭되는 좌절과 절망을 과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펼쳐놓는다. 61년 동안의 싸움에도 지치지 않는 것은 ‘삶과 존재가 일치'(김종익)하는 그의 의지와 신념의 힘이다.

그는 분노도 절망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기쁨과 기대도 함부로 표현하지 아니한다. 밋밋한 서술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서술인데도 글쓴이의 절제가 빚어내는 것은 옹근 감동의 울림이 아닌가 싶다. 그가 담담하게 서술한 끝에 “신혼여행은 아타미(熱海)로 갔다”는 대목과 결혼식 사진, 부친과의 단란한 한때를 읽으면서 내가 나지막하게 흐느꼈던 이유다.

식민지 조선의 열일곱 소년이 역사적 격랑을 헤쳐나오면서 보여주는 인식과 투쟁은 그가 역사의 희생양이면서도 오히려 역사 앞에서 자신의 책무를 찾아내 거기 헌신하는 놀라운 반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희생을 요구했던 한국 사회의 방관과 무책임을 환기해 준다. 이 아흔 노인의 맑고 그윽한 눈빛 앞에서 우리가 옷깃을 여며야 하는 이유다.

92세 고령에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BC급 전범 이학래 앞에 남은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올 2018년의 수첩에 적은 목표는 무엇이었고, 그 목표는 실현될 수 있을까. 이 자서전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일본과 일본인에게 묻는다.

“… 전범이 되어 일본의 책임을 떠안고 죽어 간 동료들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 주는 것이 살아남은 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는 자신의 부조리를 시정하고, 입법을 촉구하는 사법부의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입법 조치를 조속히 강구해야 합니다.

제가 불합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라면 저는 납득하고 요구를 취하할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합리한 요구일까요?

이것은 조선인 BC급 전범자인 제가 일본의 여러분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일본인 여러분의 정의와 도덕심에 다시 한번 강하게 호소합니다.”

이 질문은 그가 지난 60년 넘게 모색했던,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동시에 이에 답하는 것은 그 진실의 확인이며 도덕과 정의의 추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일본은, 일본인은 알고 있을까.

글: 장호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편집: 김지현

<2018-01-27>오마이뉴스
☞기사원문: 60년 넘게 일본정부와 싸운 92세 ‘BC급 전범’ 이학래

※관련기사

☞연합뉴스: “전범 돼 죽어간 동료들 원한 푸는 것이 제 책무”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인 BC급 전범 이학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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