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깜짝 놀랄 식목일의 기원-‘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리고자’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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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 8]

시민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 연구소는 3만여 점에 이르는 근현대사 실물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식민지시기 문헌과 유물 보유에 있어 국내외를 통틀어 시민역사관으로서는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단속적으로 게재되던 소장자료 소개를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 엮은이

깜짝 놀랄 식목일의 기원-‘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리고자’ 제정
<애뉴얼 리포트>에 수록된 ‘기념식수일’ 홍보사진

우리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면서도 한편 자랑스럽게 다가오는 이미지도 함께 지니다. 해마다 4월이라고 하면 소소하게는 만우절(萬愚節)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4월혁명, 제주 4.3항쟁, 상해임시정부수립은 물론 이제는 세월호 참사까지 포함하여 이를 기억하고 크게 기념해야 하는 날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공휴일로 지정된 날이 전혀 없는 달이 4월이다. 한때는 식목일(植木日)이 그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마저도 2006년 이래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버렸다. 그런데 ‘4월의 공휴일’ 식목일의 기원이 뜻밖이다.

일제강점기에 4월은 각급 학교의 신학기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지금처럼 3월에 학기가 시작되는 식으로 제도가 바뀐 것은 1962년이다. 그에 앞서 미군정기에 9월 신학기제도가 잠깐 채택된 때를 제외하고는 대한제국 시절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까지 줄곧 4월 1일이 1학기의 출발점이었다.

일제시기에는 개학과 더불어 이틀이 지나면 이른바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 4월 3일)’라는 이름의 휴일이 이어졌다. 이날은 이를테면 일본 초대 천황의 제삿날로, 그의 즉위일은 기원절(紀元節, 2월 11일)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지금도 경축일로 기리고 있다. 일제패망기 얘기이지만, 1938년 2월 22일에 조선총독부가 육군특별지원병령(陸軍特別志願兵令)을 공포할 때 부칙규정을 두어 구태여 시행일을 그해 4월 3일로 못 박은 일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지원병제 실시조차도 그들의 건국시조라고 일컫는 신무천황과 관련된 날로 억지스럽게 연관지으려는 속내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신무천황의 제일(祭日)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행사 중 하나가 바로 기념식수(紀念植樹)이다. 이는 식민통치의 개시와 더불어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행사로, 지금의 식목일의 기원이나 다름없다. 언뜻 보면 ‘기념식수일’을 새로 설정하여 이를 공휴일로 삼은 듯 하지만, 실상은 원래 휴일이던 날에 나무 심는 행사를 겹쳐 실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날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산으로 들로 나무심기 행사에 대거 동원되는 대상은 주로 학생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날은 왜 그냥 식목일도 아니고 그 앞에 ‘기념’이란 수식어를 꼭 덧붙여 부르는 것이며, 또한 도대체 무엇을 기념한다는 것일까?

조선산림회가 펴낸 <조선임업일지(朝鮮林業逸誌)>(1933)에 수록된 ‘기념식수의 창설 유래’에 관한 내용을 통해 그 내막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을 쓴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 1866~1936)는 조선총독부 출범 당시부터 1915년 영림창장(營林廠長)으로 영전할 때까지 식산국 산림과장(山林課長)을 지내면서 식림정책을 주관하고 기념식수일을 제정한 당사자였다.

한국 민중이 식수(植樹)를 천하게 여기고 꺼려 치산(治山)의 실행을 진척시키는 데에 큰 장애를 경험했으나, 한국 황제의 친수식(親樹式) 거행은 이러한 나쁜 풍습을 타파하 기위해 유력한 제일석(第一石)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일석으로써 전국 민중의 미몽(迷夢)을 깨고 곧장 식수식림에 힘을 쓰도록 만드는 것은 바라기 어려운 일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나는 제1석의 투하가 뜻밖의 성공을 거두고 이와 더불어 영구히 지속될 국민적 투석(投石)의 미풍을 일으키도록 고심하던 차였는데, 명치 43년(1910년) 8월 29일로써 일한병합의 대업이 이뤄짐을 호기회로 여겨 키우치(木內)농상공부장관, 야마가 타(山縣)정무총감 및 테라우치(寺內) 총독, 기타에게 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념할 방법으로서 매년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의 날에 전도(全道)의 관민이 모두 기념식수를 행할 것을 진언하였고, 이것 또한 다행스럽게 채택 실행하게 된다면 곧장 미국의 수재일(樹栽日), 기타 각국의 실례 등을 조사함과 더불어 다수 민중의 습속, 심리상태 등을 고찰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실행계획을 정하도록 했다. …… (하략)

위에 나오는 ‘친수식 운운’ 하는 구절은 1910년 5월 5일 동대문 밖 동적전(東籍田, 선농단옆)에서 친경식(親耕式)을 거행할 때 농상공부 기사(技師)였던 사이토의 주청으로 순종황제가 나무를 심었던 일을 말한다. 이때 선택된 나무는 지금도 종종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 고유 수종인 금송(金松, 코우야마키)이었다고 한다. 사이토의 글에는 기념식수일의 본 뜻이 ‘한국강제병합’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제1회 기념식수일 행사는 총독부 주관으로 1911년 4월 3일 남산 왜성대에 있는 총독관저(總督官邸) 뒤뜰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자기 딸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자리를 비운 데라우치 총독을 대신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이 전나무 묘목 한 그루를 심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 329그루의 나무가 참석자들의 손에 의해 식재되었다.

이 목록에는 단풍나무, 은행나무, 밤나무가 포함되었고, 여기에 벚나무 곧 ‘사쿠라’ 또한 빠질 수 없다. 이와는 별도로 경기도청에서 주관하는 식목행사는 인왕산(仁王山) 자락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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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뉴얼 리포트>(1911~12년도판)에 수록된 제1회 기념식수일 광경 (총독부 주관, 총독관저 후정(後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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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4월 3일에 벌어진 제1회 기념식수일 광경(경기도 주관, 인왕산)을 담은 사진엽서

이런 방식으로 일제 지배가 지속되는 동안 해마다 4월 3일이면 서울시내 또는 근교 어느 곳을 정하여 총독 또는 조선군사령관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왁자지껄하게 식목행사가 벌어지고, 그 다음날 신문에는 어김없이 이들이 나무를 심는 장면이 보도사진으로 등장하곤 했다. 이러한 식목행사장으로는 남산자락(장충단, 노인정, 약초관음당(若草觀音堂), 조선신궁, 경성호국신사 구역)이 선호되었고, 이밖에도 효창원(청파동), 의령원(북아현동), 원빈묘(元嬪墓, 안암동), 임업시험장(청량리), 사방공사지(우이동, 정릉리, 도봉리) 등지가 두루 포함되었다. 1928년에는 총독부신청사가 준공되면서 경복궁 경회루 옆에서 식목행사가 거행되기도 했다.

이처럼 역대 총독을 거치는 동안 기념식수일은 중요한 연례행사로 간주되었다. 이는 산림녹화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식민통치의 치적을 가시적으로 자랑하기 좋은 구실을 마련해주고 있었던 탓이다. 가령, <반도이면사(半島裏面史)>(1940)에는총독관저의원정(園丁,정원사)으로근무했던카와치슌이치(河內春一)가 남긴 목격담 한 토막이 들어 있는데, 조선의 산야를 대하는 식민통치자들의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데라우치 총독은 무변(武辨) 일변도인 것 같이 얘기되고 있지만, 변변히 나무도 없는 산을 보고는 “조선을 잘 살게 하는 것은 내 머리와 같이 민둥민둥한 곳에다 식림(植林)을 하는 것이야. 민둥민둥한 것은 정말 싫다네.” 라고 하여 나무 심는 것을 권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왜성대가 녹림울창(綠林鬱蒼)하게 된 것도 데라우치 총독의 치적이지요.

아닌 게 아니라 조선은 전 국토의 70퍼센트 이상이 산악지역이지만, 식민통치 이전부터 이미 온돌에 사용할 땔감을 베어내기만 하고 잘못된 미신으로 나무심기를 게을리한 탓에 사방이 온통 민둥산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사실을 유달리 강조한 것이 그들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황무지 같은 조선을 푸른 숲으로 가꾼 것은 오로지 총독정치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영문판 홍보책자(연속간행물)인 <애뉴얼 리포트>에도 사방조림지(砂防造林地)의 나무 성장 과정을 비교하는 사진이 곧잘 등장한다. 속성수(速成樹) 위주로 심어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뚜렷한 곳을 골라 조선총독이 선정(善政)을 편 결과라고 생색을 내는 전형적인 홍보수단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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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뉴얼 리포트>(1910~11년도판)에 수록된 서울 백운동 시범조림지(창의문 구역) 홍보사진

이러한 내력을 지닌 기념식수일은 일제가 패망을 눈앞에 둔 1945년 4월 3일에도 진행되었는데, 그 장소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점격인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경내였다. <매일신보> 1945년 4월 4일자에는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최후의 기념식수일이었던 이날의 풍경을 전하는 아래 기사와 더불어 당시 아베 총독의 식수 모습을 담은 보도사진이 실렸다.

삼림자원의 확보가 절실히 요망되는 결전하(決戰下)에 또 다시 4월 3일 신무천황제를 맞이하여 제35회 뜻 깊은 조림행사가 전선적(全鮮的)으로 거행되었는데 이날 경성에서는 관민 3천여 명이 경성호국신사 경내에 모여 기념식수와 민간조림 공로자의 표창식을 거행하였다. ……곧 기념식수에 들어가 아베 총독은 손수 삽과 괭이를 들고 다섯 주의 나무를 심었으며 일동도 각각 나무를 심어 이 나무가 하루바삐 자라서 서기(瑞氣)어린 신역(神域)을 더욱 성스럽게 하는 한편 미영격멸(米英擊滅)의 조선자재(造船資材)가 될 것을 마음으로부터 기원하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정오 지나 해산하였다.

해방 이후 첫 봄을 맞이한 1946년 4월 1일, ‘해방기념’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식수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그 이듬해인 1947년부터는 4월 5일을 식목일로 정한 데에 이어 1948년에는 미군정 법령을 통해 식목일이 공휴일로 부활되었다. 이로써 일제가 이 땅에 남겨놓은 기념식수일이라는 전통 아닌 전통은 우리들의 손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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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취록> (1926)에 수록된 제16회 기념식수일 광경(효창원 묘역이 조림지로 변하고 있는 장면)

하지만 이 대목에서 헐벗은 조선의 산야를 푸르게 한다는 것을 으뜸가는 식민통치의 치적으로 자랑하지만 정작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서는 마구잡이 벌채로 삼림자원을 초토화했던 사실, 그것이 바로 조선총독부가 지향했던 식림정책의 실체였다는 점도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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