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때 헌법소원 청구
소극적 심리에 국회서도 질타
정권교체로 고시 개정되자 각하
“효력 상실해 헌소청구 목적 달성”
청구인 “학생 피해·갈등 큰 사안
헌법판단 없이 무성의한 결정” 비판
헌법재판소가 정권 입맛에 맞춘 획일적인 역사관 주입이 우려됐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헌법소원 심리를 2년4개월 끌다 각하했다. 국정화 고시가 폐지됐고 반복될 위험이 없다는 이유인데, 박근혜 정부 때 심리에 소극적이었던 헌재가 최고심판기관으로서 책무를 저버렸다는 비판이 나온다.
헌재는 29일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근혜 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근거가 된 초·중등교육법 조항과 교육부의 ‘중·고등학교 교과용 도서 국·검·인정 구분’ 고시(국정화 고시) 등에 대한 헌법소원을 각하했다. 헌재는 “국정화 고시는 완전히 폐지되어 효력을 상실했다. 청구인들이 헌법소원심판 청구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달성돼 위헌 여부를 가릴 권리보호 이익은 소멸하였다”고 각하 이유를 밝혔다. 초·중등교육법 조항 등에 대해서도 헌재는 ‘국정교과서 의무 사용은 초·중등교육법 등이 아니라 국정화 고시 때문’이라는 취지로 헌재의 판단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앞서 2015년 11월3일 당시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했다. 이에 초중고 학생, 학부모, 교사 등은 2015년 11월11일과 12월22일 “국정화 고시와 근거법령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하지만 헌재는 “판단 지연은 국정교과서를 용인해주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신속하게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국회 지적에도, 교육부 답변을 받는 데만 245일을 쓰는 등 심리에 소극적이었다. 그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 교육부는 2017년 5월31일 국정교과서의 근거가 된 고시를 개정하는 방식으로 폐지했다. 헌재는 첫 헌법소원이 청구된 지 2년4개월이 지나 슬그머니 ‘각하’를 결정한 것이다. 헌재는 2016년에도 패킷 감청을 허가하는 통신비밀보호법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 판단을 5년간 미루다가 당사자가 숨지자 심판절차를 종료한 바 있다.
더구나 헌재는 지금껏 실제 권리구제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헌법질서 수호·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면 심판 대상으로 삼아 합헌·위헌 여부를 가려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국정화 고시 이후 우리 사회는 교육의 자주성·정치적 중립성과 관련하여 큰 논란에 휩싸였고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관련 고시가 현재와 같이 개정됐다”며 “이러한 사정을 종합해보면 향후 우리 사회에 이 사건과 같은 유형의 침해행위가 재현될 위험이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정교과서가 재현될 우려가 없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위헌 여부조차 따져보지 않았는다. 그러나 헌재는 2014년 6월 경찰의 물대포 직사살수에 대한 헌법소원을 “근거리에서 물포 직사살수라는 기본권 침해가 계속 반복될 위험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각하했는데, 불과 1년 뒤인 2015년 11월 직사살수된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백남기 농민이 세상을 떠났다.
이번 헌법소원 청구를 대리한 이영기 변호사는 “헌재가 그동안 결정을 미루다가 무책임하게 각하했다”면서 “전 정권의 반헌법적인 국정교과서 강행으로 사회적 혼란, 학생들의 피해가 컸고,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언제든 다시 시도될 수 있기 때문에 갈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헌재가 헌법적 판단을 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2018-03-29>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