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100년 전, 경복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 식민통치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벌인 난장판, ‘조선물산공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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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

이순우 책임연구원

2015년은 무엇보다 광복 70주년을 기리는 뜻이 가장 클 것이고, 여기에 한일수교 50주년과 을미사변 120년을 되새기는 의미도 적지 않다. 그외에 이목을 크게 끌지는 못했지만, 올해가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린 지 100년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행사의 정식명칭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이다. 총독정치가 시작된 지 다섯 번째가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의 온갖 물산을 진열 전시하는 행사인 셈이었다. 이 대규모 행사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간이나 벌어졌다. 조선총독부 출범 기념일이 10월 1일이었으므로, 이를 전후한 때에 맞춰 행사 일정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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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공진회장 전경도에는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 몇 군데만을 남겨놓고 온통 박람회 전시공간으로 돌변한 경복궁 일대의 훼손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매일신보』 1915.9.3.)

 

그런데 식민통치 5년간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열린 박람회 공간은 하필이면 경복궁이었다. 총독부는 행사를 빌미로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 몇 군데만 겨우 남기고 무수한 건물들을 헐어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에는 공진회가 벌어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을 위한 지진제(地鎭祭)를 거행하였다. 경복궁을 공진회장으로 선정한 저의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박람회라는 널리 알려진 표현을 제쳐두고, 공진회라는 조금은 생소한 이름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공진회는 ‘경진대회(競進大會)’의 성격을 띠는 전시행사이다. 이렇게 행사명을 부친 데는 그냥 흘려듣기 곤란한 뜻이 담겨 있었다.

 

…… 그런데 그 후에 박람회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의가 제기되었소이다. 나는 이것에는 절대로 반대를 했던 바이외다. 박람회라는 것은 반드시 진열해놓은 물품의 품질까지도 심사 연구하여 장래의 발달을 촉진하는 것을 취지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거외다. 이러한 것을 하는 것은 공진회올시다. 따라서 박람회라는 명칭은 감히 당치도 않소이다. 제군들은 박람회라고 생각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공진회라고 하는 생각으로 해주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에는 더욱 부대의 의미가 있는 것이올시다. 즉 그것은 조선의 일은 내지(內地)의 상류인도 하층인도 아주 모른다는 말이외다. 어렴풋이 조선은 일본의 판도에 들어가 점점 진보하고 있다고 말하는 정도는 알고 있으나, 장래에 어떻게 발달해 가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소이다. 따라서 내년의 공진회에 있어서는 내지의 관리는 물론이고 실업에 관계하는 자, 학자, 기타 상당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와주어서 조선의 연구를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시정오년을 기념하여 공진회를 개설하는 취지의 하나인 것이올시다.

 

이것은 1914년 8월 3일 데라우치 총독이 공진회 위원들에게 한 훈시내용이다. 이를테면 박람회는 사치경박(奢侈輕薄)의 악풍(惡風)을 조장하는 것인 반면, 공진회는 근면역행(勤勉力行)의 미풍(美風)을 양성한다는 취지였다. 공진회를 그저 큰 구경거리가 생겼다고만 여기지 말고 고분고분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데라우치 총독의 의지가 담겼다. 박람회라는 말을 버리고 구태여 공진회라는 명칭을 고집한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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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육조 앞길이 온통 공진회의 장식탑으로 치장된 모습이다.(연구소 소장자료)

 

어쨌거나 조산물산공진회는 그네들 덕분에 이만큼 조선이 발전하게 되었다고 자랑하기 위해 벌인 난장판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경복궁 안에는 제1호관, 제2호관, 기계관, 영림창특설관, 심세관, 철도국특설관, 동양척식특설관, 미술관 등의 전시공간이 배치되었고, 여흥과 휴식을 위한 연예관, 양어장, 분수대, 음악당 시설도 군데군데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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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흥례문을 철거한 자리에 들어선 공진회 1호관의 모습이다. 이곳은 공진회 종료 직후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건립현장으로 돌변하게 된다.

 

유일하게 영국식 건물로 신축된 공진회미술관(나중에 ‘총독부박물관’으로 전환) 앞쪽에는 야외전시구역이 마련되었는데, 이곳을 치장하기 위해 경기도 개성, 이천, 강원도 원주, 충북 충주를 비롯하여 저 멀리 경북 경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무더기로 옮겨온 철불상과 석조 유물들이 나란히 진열되었다. 조선물산공진회장이 바로 문화재수난사의 현장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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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바로 안쪽에 설치된 철도국특설관의 모습으로 전시관 위쪽에는 오벨리스크의 모형이 설치되었다.

 

50일간에 걸친 행사기간중 입장객은 무려 110만 명을 넘어설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조선총독부가 직접 주최한 행사인데다 대대적인 홍보에 곁들여 교통편의 제공과 입장객 관제동원 등 행정 지원도 두루 이뤄진 결과로 이해된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조선총독부가 직접 박람회를 주최한 경우는 딱 두 번뿐인데 조선물산공진회가 첫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1929년에 다시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였다. 이때에도 입장인원은 100만 명을 넘어 섰다. 조선총독의 위세가 그만큼 컸던 탓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서 개최된 공진회와 박람회05

 

아무튼 대규모 인파가 경복궁을 마음대로 드나들게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경외(敬畏)와 금기(禁忌)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서울지역에 벌어진 주요 박람회 연혁을 보면 경복궁에서 개최된 사례는 조선물산공진회 말고도 다섯 차례나 더 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다보니 궁궐은 그저 관람 대상이자 행사와 연회, 행락이 마구 뒤섞인 공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에 의한 궁궐수난사를 통틀어 가장 상징적인 사건의 장면은 조선물산공진회였고, 그것이 딱 100년 전 가을 경복궁에서 벌어진 일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조선물산공진회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니, 한 가지 꼭 덧붙이고 싶은 사실 하나가 떠오른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 일장기가 교차로 걸려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는데, 흔히 경술국치 당시의 장면으로 여러 매체 또는 전시회를 통해 잘못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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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회 경성협찬회에서 발행한 기념엽서에 보이는 데라우치 총독, 야마가타 정무총감, 요시와라 공진회협찬회장(동양척식회사 총재)의 모습이다. 데라우치 총독의 뜻에 따라 이 행사에는 박람회가 아닌 ‘공진회’라는 명칭으로 거행되었다.

 

그해 10월 1일 일본 ‘천황’ 대신 파견된 한원궁 재인친왕(閑院宮 載仁親王)이 참석해 경복궁 근정전 용상에서 공진회 개회식이 거행되었는다. 이때 행사장면을 찍은 것이 바로 문제의 사진이다. 원래 사진에는 근정전 상공에 비행기 한 대가 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비행기가 처음 목격되는 것은 1913년의 일이었으므로, 이 사진이 1910년 경술국치 당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저절로 드러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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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당시의 것으로 잘못 소개되는 바람에 곧잘 혼동을 일으켰던 근정전 일장기 사진과 비슷한 앵글의 사진자료이다. 이것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회식 때의 모습으로, 당시 근정전의 상공에는 ‘삼중호’라는 비행기의 축하비행이 이뤄지고 있었다.

 

당시 근정전 상공을 날던 비행기는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가 일본 제국비행협회를 교섭하여 조선물산공진회를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삼중호(三重號, 미에호)’였다. 용산연병장에서 이륙하여 수십 분간 또는 한 시간 가량 하늘에 떠올라 공진회장 상공을 날아다니는 것이 비행목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비행기는 70마력짜리 모리스 파만(Morris Farman)형 비행기로 조종사는 일본 사법대신의 아들인 오자키 유키데루(尾崎行輝, 1888~1964)였다. 그는 그달 17일까지 모두 9회에 걸쳐 공진회장 상공을 선회하는 비행을 선보인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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