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망국의 굴욕, ‘천황’에 바친 헌상품 – 성환참외와 충주담배에서 호피(虎皮)와 비원자기(秘苑磁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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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4]

이순우 책임연구원

 

<1> 1일 오전 10시부터 이왕 동비(李王 同妃) 양 전하는 대조전(大造殿)에서 왕족 및 어친척(御親戚) 등, 그 다음으로 선정전(宣政殿)에서 조선귀족 및 이왕직고등관 등의 축하를 받으시고 10시 30분부터 총독관저를 방문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山縣 政務總監)에 축하인사를 교환하며 천황, 황후, 황태후 3폐하 및 황태자전하께 축사(祝詞)의 집주방(執奏方)을 청하시고 다시 오후 1시로부터 덕수궁에 문안하시고 동(同) 2시에 환궁하실 예정이라더라.

<2> 창덕궁 이왕 전하께서 매년 1월 1일에는 총독관저를 방문하옵시고 천폐(天陛, 천황폐하)에 신년어례(新年御禮)의 전주(傳奏)를 총독에게 친히 의뢰하셨으나 금년에는 하세가와 총독(長谷川總督)이 영제(令弟)의 복중(服中)에 있으므로 총독관저 어방문은 권정(權停, 임시로 정지)하옵신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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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연도’ 병풍과 비원자기가 포함된 일본천황에 대한 헌상품 내역 (『매일신보』 1918년 1월 30일자)

 

이것은 <매일신보> 1914년 1월 1일자 및 1918년 1월 1일자 신년호에 각각 수록된 기사 한 토막이다. 이에 의하면 경술국치 이후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으로 신분이 격하된 것도 모자라, 새로 상전(上典)이 된 일본 ‘천황’에게 아뢰는 새해인사를 전보(電報)로 올려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 해마다 새해 첫날부터 몸소 총독관저에 행차를 해야 했던 ‘전직 황제’ 순종의 서글픈 처지가 그대로 투사되어 있다.
그런데 나라를 잃은 옛 통치자가 감내해야 했던 굴종과 수모의 실상은 때마다 철마다 일본 ‘천황’과 황실에 바친 헌상품(獻上品) 행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야말로 별의별 품목들이 ‘성의 표시’ 차원에서 바다. 건너 일본으로 건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1917년 6월 당시 이른바 ‘일한병합’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해졌던 순종의 동경행차에 관한 신문보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짐작컨대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을 직접 알현해야 했던 입장이다 보니 헌상품에 관한 준비를 게을리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한다.

 

8일 아침 경성 출발 동상(東上, 동경에 올라가는 것)하신 이왕 전하께서는 성상 황후 양폐하께 헌상하실 귀중품은 어승(御乘) 열차에 동재(同載)하였는데 천황폐하께는 홍옥문방구(紅玉文房具) 1식(式), 황후폐하께는 정교한 산호(珊瑚)의 세공품을 헌상하시기로 선택하신 바 이 물품은 구한황실(舊韓皇室)의 보고(寶庫)에 비장(秘藏)하셨던 구하기 어려운 진품이라 승문(承聞)하였더라.

 

이로써 대한제국 황실의 귀한 보물은 일본황실의 것으로 귀속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18년 1월에는 이왕세자(영친왕)가 서울에 왔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편에 ‘천황’에게 올리는 여러 헌상품들이 함께 꾸려졌는데, 그 목록에는 ‘요지연도(瑤池宴圖) 병풍’과 ‘비원근제(秘苑謹製) 양각청자화병’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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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원자기를 비롯하여 헌상품으로 사용될 각종 미술공예품의 제작처로 잘 알려진 태평로 소재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전경 (『경성과 인천』, 1929)

 

요지연도는 중국 곤륜산에 있는 전설의 연못 ‘요지’에서 서왕모(西王母)가 주나라 목왕(穆王)의 방문을 받고 여러 신선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던 것을 소재로 담은 병풍그림이다. 이 그림은 이왕가(李王家)에 비장되어 있던 것을 특별히 헌상하였다고 설명이 달려 있는 것을 보면 특별한 미술품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소중한 우리 그림 한 점은 그렇게 이 땅에서 사라졌다.

비원자기(秘苑磁器)는 고려청자의 옛 기법을 재현하여 창덕궁 후원에서 제조한 것으로 비록 골동품은 아니지만 품질만은 최상급으로 간주되어, 헌상품만이 아니라 일본 황족이나 여타 귀빈에 대한 선물용 또는 하사품으로도 곧잘 이용되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도자기는 서울 태평로의 대로변에 있던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에서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이왕가나 총독부에서 소요되는 ‘어용품(御用品)’, 특히 미술공예품 일체가 제작되었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기념품 판매도 곁들여 이뤄졌다.
1915년 11월에 거행된 대례식(大禮式, 천황즉위식) 때에는 ‘청동제 순금 상감 화병’이 봉축헌상품으로 마련되었는데, 이 또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들었다. ‘천황’과 황후에게 각각 한 쌍씩 건네진 이 화병은 청동 바탕에 정교한 기술로 순금과 보석을 박아 만들었으며, 이를 보고 ‘천황’이 매우 흡족해 했다고 전해지는 만큼 굉장한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이밖에도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그린 병풍과 서화첩 등이 몇 차례 창덕궁에서 올리는 헌상품으로 선택된 흔적도 눈에 띈다. 이보다 앞선 시기인 <매일신보> 1913년 12월 13일자의 보도에는 창덕궁 이왕비(순종비)가 친잠(親蠶)하여 뽑아낸 실로 비단 수건 여러 장을 만들었는데, 이것들을 일본 동경에 있는 황후(천황비)와 황태후에게 헌상하였다는 소식도 담겨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조선총독이 직접 일본 ‘천황’에게 바친 헌상품도 무수히 많았는데, 여기에는 주로 조선의 특산품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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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청동제 순금보석상감 화병(花甁)으로, 이와 동일한 것이 1915년 대정천황 즉위봉축 헌상품으로 사용되었다.

 

가령, 1917년 6월에 하세가와 총독(長谷川總督)이 일본 황실에 바친 헌상품 목록을 보면 호피(虎皮) 1장, 녹각(鹿角) 1개, 한산 모시 10필, 지권연초(紙卷煙草, 담배) 2종, 자기(磁器, 총독부중앙시험소 제작품) 2개가 천황에게 진상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담배는 1915년에 처음 영월지역에서 나온 재래종 엽연초와 충주지방에서 재배한 황색종 엽연초 등으로 만든 특제품이 헌상된 이래로 조선총독이나 정무총감이 정기적으로 일본을 왕래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상납하던 주요한 헌상품목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의 경우에도 이러한 헌상품 대열에서 비껴서질 못하였다. 데라우치(寺內) 총독 시절이던 1915년에는 죽은 ‘천황’ 메이지의 업적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뜻에서 그의 주도로 대장경판이 인출(印出)되었는데, 이 때 인쇄된 3부 가운데 하나는 실제로 일본 황실에 헌납되어 교토 센뉴지(京都 泉涌寺)에 봉헌되었다.
여타의 특산물로는 천하진미로 알려진 금강의 종어(宗魚)라는 물고기가 1923년에 충남 부여에서 포획되어 사이토 총독의 손을 거쳐 일본황실에 헌상된 사례가 있다. 평양의 밤(栗), 나주 배(梨), 대구의 능금(林檎, 사과), 천안의 호두, 주안염전의 천일염, 나전칠기제품도 대표적인 품목들이었다.
1928년 이후에는 여름더위를 잊게 하는 별미로 성환진과(成歡眞瓜, 참외)가 크게 주목받아 ‘천황’에게 진상된 것을 계기로 해마다 일정한 수량이 선별되어 일본으로 발송되었다. ‘성환’이라고 하면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전승지였으므로, 이곳에서 생산된 특산품에 대해 그들이 남다른 감회를 더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러한 ‘로얄 마케팅’ 덕분에 성환참외는 1930년대 이후 전국에 걸쳐 대단한 유명세를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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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이 직접 일본천황에게 바친 조선특산품의 목록에는 함경북도에서 획득한 호피(虎皮) 한 장과 충주산 담배 등이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매일신보』 1917년 6월 16일자)

 

간혹 조금은 별스러운 헌상품도 있었다. <매일신보> 1935년 10월 27일자에는 「금섬(金蟾, 금두꺼비)을 헌상」 제하의 기사가 한 장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경북에 사는 문명기(文明琦) 씨는 지난 5일 토쿠다이지(德大寺) 시종이 대구(大邱)를 가셨을 때 자기의 소유광산 영덕금광에서 발견한 두꺼비 형상의 금덩어리를 보여드렸는데 이것은 즉 성대서조(聖代瑞兆)라 하여 우가키 총독을 통하여 천황폐하께 헌상하기로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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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이래 황실 헌상품에 포함되면서 크게 유명세를 떨친 성환참외(일명 개구리참외)

 

여기에 등장하는 문명기는 국방헌금과 애국기(愛國機) 헌납에 앞장 선 것으로 오명을 남긴 바로 그 친일 재산가이다. 어쩌다가 그의 광산에서 두꺼비를 꼭 닮은 금괴가 발견된 모양인데, 이에 옳다구나 하고 ‘천황’이 누릴 상서로운 조짐이니 뭐니 하는 언어의 치장을 곁들여 기어코 이를 헌상하겠다고 했으니 참으로 일제로부터 ‘애국옹(愛國翁)’이라는 칭호를 얻은 친일파다운 행적이다. 이것 말고도 1924년 6월에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주재소 순사가 호랑이 새끼 두 마리를 잡은 것을 사이토 총독을 통해 섭정궁(攝政宮, 당시의 황태자)에게 헌상하기로 하여 대구역으로 이를 실어나갔다는 기록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특제품이나 특산물 이외에 조선산 쌀(米), 조(粟) 등도 신상제(新嘗祭)에 사용될 헌상곡(獻上穀)이라는 명목을 달고 일본 ‘천황’과 황실에 바쳐진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식민통치에 따른 폭압과 수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때로 지배종속관계에서 비롯된 굴종의 장면들을 기억해내는 것도 광복 70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또다른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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