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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2주년 기념 심포지엄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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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 개관 2주년 기념 심포지엄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박혜영)와 함께 5월 31일 오후 1시 30분부터 덕성여대 대강의동 104호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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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사기념관 전경 ⓒ민족문제연구소

 

이번 심포지엄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하는 한편, 민족문제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관장 한상권) 개관 2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상임대표 윤경로)를 발족한 이래 ‘3·1운동’의 역사상을 바로 잡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2014년 〈제국에서 민국으로〉, 2016년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 2017년 〈기록으로 보는 3·1혁명〉과 올해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학술행사는 ‘3·1운동’이 단순한 대일항쟁이 아니라 민족민주혁명으로서 대한민국의 이념적 연원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올해 심포지엄은 왜 ‘3·1운동’이 혁명으로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 노동자 등 새로이 조직화한 ‘3·1운동’ 참여 계층의 성격과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3·1혁명’의 이념적 지평〉이란 기조발제에서 3·1혁명의 성격을 민족혁명, 민주혁명, 국제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였다. 곧 3·1혁명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으며 3·1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근대적 주체-청년, 여성, 노동자-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3·1혁명은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한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1910년 7월 6일자 『신한민보』 논설에서 1919년 4월 제정된 「대한민국임시헌장」까지 각종 선언서의 분석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사상적 흐름을 짚었다. 끝으로 3·1혁명은 좁은 민족주의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국제주의를 추구했다고 주장하였다. 국제주의는 이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내건 강령과 정강에서 표방되었을 뿐 아니라 이범석, 권기옥, 김산, 김훈 등의 활동에서 보듯이 중국혁명에의 참여로도 나타났다는 것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3·1운동과 여성의 현실 참여〉 발표에서 여성사에 있어서 3·1운동이 갖는 의의로서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에서 남녀평등을 천명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1920년 이후 전개된 여성의 현실 참여에 대해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 ‘독립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으로 장을 나누어 설명한다. 3·1운동 직후 차미리사의 조선여자교육회를 통해 여성계몽운동이 본격화하였고, 신여성의 등장으로 여권신장과 여성해방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으며, 1920년대 중반부터 여성해방을 사회혁명운동과 동일시하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주도권을 잡았고 1927년 근우회의 설립을 통해서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 여성운동의 연대가 모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사 100년의 관점에서는 “일제 시기 여성운동은 성평등운동이자 페미니스트운동으로 독자성을 뿌리내리는 데 실패했다”라며 당시 여성운동이 갖은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기훈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청년〉 발표에서 조덕진, 박헌영, 장병준, 강석봉 등 개별 사례 분석을 통해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의 경험과 기억이 이후의 활동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실장으로 활동하고 상해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한 조덕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 박헌영, 고향인 전남 무안군 장산도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지명수배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장병준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필자는 1920년대를 청년의 시대로 만들고 조선사회를 실질적인 정치·문화적 공간으로 변모시킨 바탕이 3·1운동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신주백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사회변동〉 발표에서 3·1운동이 “주체가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선택한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평가하고, 3·1운동 이후 조선인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과 지배자의 변화 모습을 고찰한다. 먼저 3·1운동 즈음에 발표된 선언서들이 문명주의에 입각하여 자유평등과 정의인도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추구했으며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이어받아 한중일 3국의 독립과 수평적인 국제관계를 전제로 한 지역평화론을 주창했음을 밝혔다. 3·1운동 이후 청년지식인들이 사상의 변화를 체득하고 전국 조직의 청년연합회를 만들어 청년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농민, 노동자, 여성층에서도 동일한 움직임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 민중에게서 민족독립과 일상의 간극이 좁혀지고, 조선인사회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서 집단적 주체로서 민족 주체성을 명확히 했다고 강조한다. 끝으로 하라 일본 수상은 3·1운동 직후 기존의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꾸어 조선민족을 회유·동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조선통치사견」에서 피력하고 사이토 총독으로 하여금 문화통치를 실시케 했는데, 3·1운동이 이러한 정책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종합토론은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주재하며, 약정토론자로는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 이태훈 연세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등이 참여한다.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이자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 서거 63주기 추도식도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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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초청장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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