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일제의 폭압정치를 상징하는 총독부 관리의 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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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44

일제의 폭압정치를 상징하는 총독부 관리의 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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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시절의 관리들이 제복과 함께 착용한 패검. 칼자루와 칼집에 ‘오동 문양’이 한 개씩 새겨진 것으로 보아 ‘주임관(奏任官)’이 사용한 패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전체 길이는 84cm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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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 복제’에 묘사된 패검의 손잡이 부분 세부 문양이다. 오동문양이 2개인 것은 친임관과 칙임관, 1개인 것은 주임관, 그리고 문양이 없는 것은 판임관 용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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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총독부 출범 당시 총독관저에서 촬영한 총독부 고위관료들의 기념촬영사진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들은 일제히 제복 차림에 칼 한 자루씩을 손에 쥐고 있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기를 언급하자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의 하나는 ‘칼 찬 제복 차림의 일본인 관리’ 모습이다. 이와 관련된 규정의 연원을 살펴보니, 통감부 출범 직후인 1906년 2월 2일에 제정된 ‘통감부 및 소속관서 직원 복제(服制)’에 이미 오동 문양이 새겨진 ‘패검(佩劍)’에 관한 규정이 포함된 사실이 눈에 띈다.
또 다른 일본의 식민지역에 해당하는 대만총독부와 관동도독부의 경우에는 각각 1899년 2월 17일과 1906년 8월 30일에 ‘문관복제’가 제정되는데, 여기에도 한결같이 관리의 제복에 패검을 함께 차는 규정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일본 본국에는 ‘문관대례복제(文官大禮服制)’에 의해 함께 칼을 차는 제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일상적인 근무복에 패검을 착용하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칼 찬 제복’은 그 자체가 매우 위압적이며 차별적인 규정이 아닐 수 없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복제에 따른 패검(佩劍, 장검) 관련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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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병합 이후에는 1911년 6월 1일에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직원 복제’가 다시 제정되었으나, 총독부 철도국과 세관 직원이 차는 용도로 단검(短劍) 관련 조항이 새로 도입된 것을 제외하고 그 뼈대는 통감부 시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시점에 데라우치 조선총독은 총독부 훈령 제52호(1911.6.6일자)를 통해 “직원 공무집행의 경우는 특히 소속장관의 허가를 받은 자를 제외하고 반드시 제복을 착용할 것”을 시달하였는데, 가히 무단통치의 장본인다운 지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여느 총독부 관리는 물론이고 관공립학교의 교원들도 일제히 ‘칼 찬 제복차림’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광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1913년에 이르러 학교 내에서 수업 또는 평상복무를 하는 경우에 별도로 제정된 ‘수업복(授業服)’을 입을 수 있도록 허용된 일이 있지만, 그렇다고 제복을 완전히 벗어던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총독부 관리의 제복 착용 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1919년 8월 19일의 일이다. 이것은 3.1만세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에 부딪혀 ‘무단통치’의 상징이었던 ‘칼 찬 관리의 모습’을 식민통치자들 스스로가 제거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비록 이런 모습은 사라졌을지언정 여전히 ‘칼 찬 일본 순사’가 거리를 횡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내세운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것의 본질 역시 폭압적인 식민통치의 범주에 속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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