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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이의 향기] 시인 박노정 선생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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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이자 언론인, 형평문학선양사업회 회장인 박노정 선생이 4일 별세했다. 지병을 앓아오던 중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선생은 석성우 스님 인도로 대구 팔공산과 사천 와룡산 등에서 15년을 참선 수도에 정진했다. 스스로 삶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생각할 즈음 지나가는 객승에게 광주 학살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들끓어 올라 속세로 나섰다.

문민정부 시절 지방자치제가 복원되면서 지역운동, 풀뿌리 언론의 필요성에 공감하던 진주지역 사람들이 모여 <진주신문>을 창간했다. 1990년 3월 3일 이 신문 창간 때부터 초대 대표이사·발행인·편집인을 겸했다. 2002년까지 역임했다.

‘진주정신’을 ‘신분해방운동인 형평, 임진왜란 때 2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에서 민관군이 일체가 돼 보여준 주체, 남명 선생의 호의’로 꼽는 선생은 <진주신문>을 통해 형평운동과 남명선생을 집중 조명해냈다.

지역 주간신문으로는 획기적인 상금 1000만 원을 내걸고 가을문예를 제창했으며 형평문학상 제정에도 큰 역할을 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 진주민예총 회장, 경남문학관장을 지냈고 진주지역 시민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 박노정 시인./경남도민일보DB

특히 진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로 있는 동안 진주성 내 의기사에 있던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 논개(일명 ‘논개영정’) 강제 철거와 그로 인한 교도소 노역장 유치 사건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미인도 논개는 친일화가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림 자체가 왜색풍이어서 철거하자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진주시가 꼼수로 존치 결정을 내리자 선생을 비롯한 4명이 2005년 5월 그림을 강제로 떼어냈다.

이 일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지만 부당하다며 4명이 모두 노역장 유치를 자원했다. 시민들이 성금으로 벌금을 대납하면서 1주일간 노역장 생활을 겪었다. 당시 4명의 벌금은 모두 2000만 원이었지만 성금이 이보다 더 걷힌 데다 1주일간 노역하면서 감액된 것까지 포함해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부 결성 자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이후 의기사에는 논개 표준영정이 봉안됐다. 하지만 선생은 5만 원권 신사임당 그림을 비롯해 전국에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가 많은데도 아직 그대로 있는 데 대한 아쉬움을 항상 표시해왔다.

선생은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 <늪이고 노래며 사랑이던>, <눈물공양>, <운주사>를 펴냈다. 함안 마애사에는 선생의 시비가 서 있다.

선생의 빈소는 진주 경상대병원 장례식장 102호실이다. 발인은 7일 오전 7시이고, 시신은 화장해 산청 차황면 철수리 가족납골묘에 안장한다.

<2018-07-05> 경남도민일보

☞기사원문: [떠난이의 향기]시인 박노정 선생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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