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사진첩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금강산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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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금강산 수난사
친일귀족 민영휘 일가의 만폭동 바위글씨

여러 해 전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그의 전기에서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한 장의 사진을 마주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다소 거만한 포즈를 취한 총독과 총독 부인이 등의자(藤椅子)로 만든 순여(筍輿, 대나무가마)에 나눠 타고 금강산 탐방에 오른 모습이 나란히 포착되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의 비대한 몸집을 어깨와 팔뚝으로 지탱하며 서 있는 짚신 차림의 왜소한 조선인 가마꾼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애처로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권세를 지닌 누구에게는 신선놀음과 같은 별천지의 세상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험난한 계곡과 비탈면이 끝없이 이어진 고생길을 뜻하는 곳, 금강산(金剛山)은 바로 그러한 공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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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에 나선 사이토 총독과 총독 부인

예로부터 금강산은 무수한 금강예찬(金剛禮讚)을 쏟아내게 만들 정도로 계절마다 그 모습이 달라지는 절경으로 소문난 곳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관한 한 그 풍경에만 주목한다면 금강의 속살을 제대로 살펴보기가 그만큼 더 어렵게 되고 만다. 금강산을 세계적인 명산으로 떠들썩하게 부각시키고 이를 적극 홍보하려 했던 주체가 바로 조선총독부였다는 점은 새삼 강조하지 않더라도, 금강산의 수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 또한 식민통치기와 고스란히 겹치니까 말이다.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신작로와 철도가 개설되고 탐승회(探勝會)라는 이름의 여행단이나 아니면 개인단위의 탐방객들로 대규모 인파들이 골짜기마다 밀려들게 되자 이곳에 생업의 기반을 마련한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음식점, 숙박업, 찻집, 기념품점, 사진사들이었지만, 드물게는 석공(石工)이라는 직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강산을 탐방한 기념으로 바위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새겨놓고 오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지만, 새로이 일본인 관광객이 몰려오니 그 역할은 일본인 석공의 몫으로 귀착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금강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그저 구경만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고 가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일본황족 나카마쓰노미야(高松宮, 쇼와‘천황’의 동생)은 1926년 9월에 외금강 상팔담(上八潭)에 오른 뒤에 이곳을 등반한 기념으로 큰 문자를 암면에 새겨놓기도 했다. 『동아일보』 1934년 10월 3일자에 수록된 만평가 최영수(崔永秀)의 「금강산 만화행각」이라는 연재물에는 금강산 계곡마다 그득한 이름새기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 금강산 속엘 다녀나간, 말하자면 탐승객들 중에 ‘미친 놈’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볼품 있는 바위에 부질없이 성명 석자를 써놓고 간 자들을 하는 말이다. 그 좋은 경치, 그 아름다운 바위 위에 왜 그 더러운 이름들을 기록하였을까? 혹자는 금강산 족보(族譜)를 만들렴인지 삼대(三代)까지 이름을 써놓았고 혹자는 그것이 옥판선지(玉版宣紙)로 알았던지 휘호를 하고는 도장까지 찍어놓았고 혹자는 크게 혹자는 적게 또는 쓰기도 하고 새기기도 하고 — 그리하여 일견 그 속에도 빈부(貧富)의 계급적 의식이 표현되고 있다. 보라 — 이 부질없는 사람들이여! 그렇게도 그대들의 이름을 날리고 싶거든 명함(名啣)을 수억 장 백여 가지고 비행기를 세내 타고 상공에서 뿌리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것이 아니냐 말이다.

이러한 일본인 석공의 존재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흔적으로는 외금강 구룡폭포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 바위글씨가 있다. 이것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썼으며, 세 글자를 합쳐 그 길이가 무려 64척(尺, 약 19.4미터)에 달할 만큼 굉장한 규모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연구소가 소장한 <반도의 취록(半島の翠綠)>(조선산림회, 1926년 발행)에 실린사진을 보면, 이 글자 옆에는 ‘세존강생 이천구백사십육년(世尊降生 二千九百四十六年; 서기 1919년에 해당)’, ‘해강 김규진 서(海岡 金圭鎭 書)’라는 낙관(落款)과 더불어 시주(施主), 화주(化主), 감독(監督)의 이름들이 죽 나열되어 있고, 그 말미에는 석공(石工) 스즈키 긴지로(鈴木銀次郞)라는 구절도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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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의 글씨 ‘미륵불’ (『반도의 취록(半島の翠綠)』, 1926)

일찍이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같은 이는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를 통해 ‘미륵불’이라는 글자에 대해 “구역이 날 뿐더러 이토록 아까운 대자연의 경치가 파괴된 것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해강 김규진은 실로 금강산에 대하여 대죄(大罪)를 범한 자라 하겠다”고 혹평을 더한 바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글자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어쨌건 그 시절 신문지상에 수록된 금강산 탐방기에는 한결 같이 사람마다 손가락질하는 대단한 꼴불견의 하나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 글자를 새긴 당사자가 하필이면 일본인 석공이었다는 점은 상당한 거부감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나오는 스즈키 긴지로라는 인물은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가 경성에서 개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미나미총독(南總督)이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휘호를 인왕산 병풍바위에 큰 글씨로 새길 때에 그 작업을 직접 수행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글자 당 사방 12척(약 3.6미터) 크기에 달했던 바위글씨는 해방 이후 간신히 표면을 깎아내긴 하였으나, 지금도 여전히 인왕산의 이마라고 할 수 있는 곳에는 큰 상처처럼 일제 패망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그런데 해강 김규진이라고 하면 이 외금강 구룡연의 ‘미륵불’ 글씨만이 아니라 내금강 만폭동 쪽으로도 ‘법기보살(法起菩薩)’, ‘천하기절(天下奇絶)’,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 여러 점의 큰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법기보살이라는 글자는 모두 합쳐 72척(약 21.8미터)에 달하는 것이며, 원본글씨가 하도 이색적이라 서울 수송동 각황사 법당에서 임시전람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구경시킨 적도 있었다.

우리 연구소에 있는 <만이천봉 조선금강산>(1929) 사진첩에 이 ‘법기보살’ 바위글씨가 생생히 담긴 사진이 실려 있다. 여기에 ‘세존응화 이천구백사십칠년 사월(世尊應化 二千九百四十七年 四月)’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글자가 1920년에 새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아래쪽의 구절은 판독이 힘들 뿐더러 나머지 부분은 사진앵글에서 벗어나 있어 그 내역을 모두 확인할 수 없으나, 이 또한 일본인 석공 스즈키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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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보살’ 아래 민영휘 일가의 이름 (『만이천봉 조선금강산』, 1929)

한편, 이 사진자료에서 크게 눈길을 끄는 대상은 오른쪽 아래에 함께 포착된 민영휘(閔泳徽, 1852~1935) 일가의 이름이 새겨진 부분이다. 민영휘는 강원도 지역 백성들이 ‘민철구(閔鐵鉤, 쇠갈고리)’라고 불렀다는 탐관오리 민두호(閔斗鎬, 1850~1902)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잘 알려진 대로 조선 제1의 갑부(甲富)이자 조선귀족회의 부회장을 지낸 대표적인 친일귀족의 하나이다.
이 바위글씨를 보면 민영휘를 필두로 김기현(金箕賢, 측실, 1926년에 사망), 민대식(閔大植, 둘째 아들), 민평식(閔平植, 둘째딸, 1923년에 사망), 민천식(閔天植, 셋째 아들, 1915년에 사망)의 이름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민영휘의 본처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 1915년에 사망)는 물론이고 큰 아들이자 양자인 민형식(閔衡植), 맏딸 민윤식(閔潤植), 넷째 아들 민규식(閔奎植), 그리고 ‘해주마마’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던 또 다른 측실 안유풍(安遺豊)의 이름은 보이질 않는다.
<동아일보> 1924년 9월 20일자에 수록된 소일생(小日生)의 「금강유기(金剛遊記)」 연재물에는 “…… 그 외에도 염치 모르는 탐리배(貪吏輩)들이 첩(妾)의 이름이며 얼남녀(孼男女)의 이름을 마치 후인(後人)에게 자랑이나 할 듯이 새긴 것들이 무수하게 보였다”고 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글씨를 보고 일컫는 대목인 듯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민영휘 일가의 사람들이 직접 금강산을 탐방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름만 올려놓은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위의 연재물에 포함된 <동아일보> 1924년 9월 11일자 기사를 보면, ‘삼불암(三佛岩) 지척에 있는 수충영각(酬忠影閣)에 자작 민영휘(子爵 閔泳徽)의 대판사진(大版寫眞)이 역대 고승들의 화상(畵像) 가운데에 버젓이 함께 걸려 있음은 대망발(大妄發)’이라고 개탄하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이때 상당한 금액의 시주가 있었을 테고, 그러한 결과로 그들의 이름이 줄줄이 바위에 새겨지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만폭동 계곡에 각자된 민영휘 일가의 이름은 그 자체로 가문의 영광은커녕 그들의 추한 행적을 천년만년 상기시켜주는 훌륭한 매개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금강산에 남쪽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도 벌써 7년이 되어간다. 언젠가 다시 금강산관광이 재개된다면 꼭 가서 두 눈으로 그 글자들의 내역을 모두 확인해 보고 싶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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