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애국부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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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전시자료 16

애국부인회

김혜영 연구원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38년에 들어 ‘국가총동원’과 ‘육군특별지원병령’ 등을 공포해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일제의 수탈과 동원정책은 여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조선 민중의 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여러 여성단체들을 조직하였고, 조선여성들은 각종 관제 단체에 소속되어 ‘총후보국(銃後報國)’이란 명목으로 다양한 활동을 강요당했다.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는 1911년 2월 군사원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1906년 설립된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위원본부가 이 단체의 전신으로,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위원본부의 설립목적은 “황실을 중심으로 전 일본 부인의 결속된 힘으로 군사후원을 하는 것”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일제 뿐 아니라 구 한국황실이나 왕족들의 금전적 후원도 있었다. 1910년 9월에는 애국부인회 조선위원본부로 개칭되었다가 1911년 2월 다시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로 고쳤다. 처음에는 일본 여성이 중심이었으나 조선인 여성
들도 가입시켰다.
애국부인회의 활동은 군사후원활동(총후인식강화운동, 군인송영접대, 위문금품 갹출醵出 수집), 군인유가족 후원(애국료愛國寮 운영, 전병사자戰病死者 조위弔慰와 위문, 국경 경비 후원), 사회사업(유유아乳幼兒 보호, 임산부 보호, 영세민교화 보호), 사회교육산업(부인애국운동, 애국자녀단, 경신敬神시설 헌납), 수양시설 운영(애국부인회 조선본부회관 건축) 등으로 크게 구별되어 나뉜다. “미성년자녀에 대한 부인보국정신의 함양과 실천에 노력”하기 위해 애국자녀단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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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부인회 활동을 선전하는 봉함엽서. 방공연습, 전승기원, 병기헌납, 국기운동, 유가족위문, 농번기탁아소 등의 일을 독려하고 있다.

 

회원들은 지방행정단위인 부·읍에 설치된 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각 분회는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농산·축산·가공제조 판매, 노무수입, 연극·영화·강습회·매점 등의 공연 수입과 대여 등도 했다. 각 지부의 경우에는 애국기 헌납을 위해서 모금운동을 펼치거나 총회를 개최하고 특별사원 및 유공자 수여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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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애국부인회 입회안내서(1934.1). 앞면에는 애국부인회 입회 권유문과 애국부인회 조선본부 회원총회 준비사항이 적혀 있다.(사진1) 뒷면에는 회원의 종류(등급), 입회 수속, 회원과 찬조회원 휘장, 공로자에 대한 유공장 등의 규정이 나와 있다.(사진2)
3 애국부인회 위촉장(1937.9.7.). 애국부인회 조선본부장 오노 데루코(大野テル子)가 조명순(趙明順)을 애국부인회 충청남도지부 논산군분회 가야곡면(可也谷面) 분구부장으로 위촉한다는 내용이다. 4 애국부인회 발회식 기념엽서. 1907년 9월 12일 애국부인회 발회식 날짜에 맞춰 발행됐다. 애국부인회 휘장(徽章)과 인장을 인쇄하고 기념 마크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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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애국부인회 부여부 분회 제1회 총회기념사진(1940.12.11)

6~9 애국부인회 회원 문패들. 일제는 친일단체 회원에게는 문패와 메달 등을 수여해 ‘완장의식’을 부추겨 통치에 이용했다. 애국부인회 특별유지회원과 통상회원 사이에는 문패의 크기와 질이 달랐다. 이용숙(李容淑)의 경우 애국부인회 패유공장을 받았고 특별유지회원임을 문패에서 밝히고 있다(사진6). 철로 된 작은 문패 또한 패유공장을 받은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사진7). 통상회원인 고복금의 경우 나무로 된 작은 문패를 만들어 그 위에 도장을 찍어 내걸었다. 해방 후 애국부인회 전주지회가 새로 만들어지자 문패를 뒤집어 태극기를 그린 것이 이채롭다(사진8, 9).

10 애국부인회 3등유공장. 애국부인회 규정에 따르면 100원을 기부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3등유공장을 수여했다. 은색 바탕에 붉은 별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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