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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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18

사진첩으로 보는 간도와 만주국 실경(2)

박광종 선임연구원

 

1932년 3월 만주국 괴뢰정부가 성립되자, 중화민국의 정부기관인 중화우정中華郵政이 운영하던 동삼성東三省의 우편사업을 만주국이 인수하였다. 만주국은 교통부 산하에 우무사郵務司를 두고 만주국 우편사업을 총괄하였고 신경新京, 봉천奉天, 하얼빈 등 세 곳에 우정관리국을 두어 해당 지역의 우편사업을 관리토록 했다. 1938년 행정기구 개편에 의해 우무사 대신에 우정총국郵政總局이 들어서서 패망에 이르기까지 우정업무를 맡았다. 우무사와 우정총국의 수장과 고위직에는 대체로 일본인이 임명되었고 만주족이나 한족은 하위직에 머물렀다. 만주국 우표에는 국화인 난 꽃 문양과 ‘만주국 우정’(1934년 3월 제정帝政 수립 이후에는 만주제국 우정)이란 글자를 새겨 국적을 표시했다. 1932년 만주국 성립 후 패망 때까지 만주국 우정당국은 14년간 159종이 넘는 우표를 발행했고 그 중 기념우표가 44종이었다.
이번 호에서는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만주국 발행 우표와 일본측이 제작한 만주 관련 사진엽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체로 기념우표와 기념엽서들인데, 양국의 ‘우의’를 다지고 만주국의 발전상을 널리 선전하고자 하는 만주국과 일제의 제작 의도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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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소개할 것은 1934년 3월 1일 만주국이 만주제국으로 바뀌고 집정執政 부의溥儀가 황제로 즉위한 것을 기념해서 만든 ‘등극기념登極紀念’ 우표 2장이다. 전자에는 부의가 거처하는 집희루緝熙樓가 새겨져 있고, 후자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봉황 두 마리가 도안되었다. 두 마리의 봉황은곧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만주국 황제 부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양국의 돈독한 우의를 형상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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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4월 부의는 히로히토의 초청으로 일만 우호 증진과 만주국 위신 선양을 위해 도쿄를 국빈 방문하였다. 히로히토는 도쿄역까지 나가 부의를 마중하였고 방일 기간 내내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일본의 모든 신문 방송은 부의의 일거수일투족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때 만주국에서 방일기념우표가 제작된 것은 물론 일본에서도 4종의 기념우표와 여기서 소개하는 일본내방기념엽서가 만들어졌다.
1942년은 일본과 만주국 모두에게 있어 의미 있는 해였다. 바로 전해인 19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함으로써 전 국가, 온 국민의 총력전 태세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한편 만주국은 건국 10주년이 되는 해로 자국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관동군의 지시하에 만주국은 자국의 건국일인 3월 1일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9월 15일에 건국 10주년 기념식을 신경 교외에 있는 종합경기장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하였으며 일본도 같은 날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동일한 기념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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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10주년 기념우표는 일본과 만주국 양국에서 3월 1일과 9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여러 종류가 발행되었다. <사진4>와 <사진5>는 3월 1일 제작된 것으로 각각 만주국 국기와 만주국 건국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충령묘忠靈廟를 새겨넣었다. <사진6>과 <사진7>은 9월 15일에 발행된 것이다. 특히 민족 고유 의상을 입은 다섯 민족의 처녀들이 서로 손잡고 있는 그림이 이채로운데, 이는 일본인, 만주인, 한인漢人, 조선인, 몽고인 5민족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다.(五族協和) 한편 총 10장으로 구성된 ‘만주국건국10주년기념엽서’ 세트가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일본인에게 만주국 수도 신경의 발전상을 소개하고 일본에서 신경까지 교통편과 거리 등을 알려주어 만주에 더욱 친숙하게 다가가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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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소개할 것은 ‘백두산부시(白頭山節.節은 민요)’라 일컫는, 제작처가 명확하지 않은 두 종류의 그림엽서 세트다. 전자는 4장으로 이루어진 선만민요(鮮滿民謠) 백두산부시의 첫 장이고 후자는 총 3장으로 구성된 애국가요 백두산부시의 첫 장이다. 백두산부시는 유명한 일본 민요로 우에다 곳쿄코가 작사 작곡하였다. 1930년대 중반 조선과 만주 국경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일본 민요 가락에 실어 노래한 것으로 일본인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여러 레코드사에서 이 노래를 취입하였다.

070더구나 가사와 함께 백두산 자락 마을 주민의 생활상을 화폭에 담은 다양한 그림엽서들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후 태평양전쟁기에 들어서자 이 곡조에다 전쟁 독려의 내용을 담은 ‘진주만부시眞珠灣節’(일명 ‘특공대부시 特攻隊節’)가 만들어져 널리 불렸고 그림엽서로도 발매되었다. 오타카 히사오(大高 ひさお)가 1942년 5월에 작시作詩한 애국가요 백두산부시가 바로 ‘진주만부시’이다. 선만민요 백두산부시와 애국가요 백두산부시의 가사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선만민요) 백두산 천지에 쌓인 눈은 / 녹아서 흘러 압록강의 사랑스런 처녀의 / 화장수化粧水
(애국가요) 울지마 슬퍼하지마 반드시 돌아와 / 작은 오동나무 상자에 비단옷 입고 /
만나러 와다오 구단자카九段坂(야스쿠니신사 앞 길)로

* 전사한 후 유골이 되어 야스쿠니신사로 돌아올테니 그곳으로 찾아와 달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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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3년 3월 1일 건국 1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우표. 만주국 국기와 지도가 도안되어 있고 초창기라 도안과 재질이 조악하고 불량하다.

2 1937년 12월 1일 일본의 치외법권 철폐를 기념하는 우표.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중국 동북지역에서 누려온 여러 가지 특권 즉 경찰서 설치, 조차租借 범위 내의 과세권, 영사재판권 등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전부 폐지하고 만철滿鐵 부속지의 행정권도 만주국에 넘긴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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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주국 철도 부설 15만 킬로미터 달성 기념 우표

4 1940년 9월 실시된 임시국세기념조사 기념 우표

5 1941년 6월 만주국 징병법인 국병법(國兵法) 실시 기념우표. 20~23세의 모든 남성에게 3년간 병역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 먼저 군사훈련을 시킨 후 공병으로서 각종 군사시설 건설에 동원하였다.

6 싱가포르 함락 기념우표. 일본군이 영국군과 3개월 간의 격전 끝에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를 함락했다. 만주국 우정총국은 이튿날인 2월 16일 일반 우표에 “紀念新加玻復歸我東亞 康德九年”이라고 붉은 스탬프를 찍어 일본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우표를 내놓았다.

7 8 ‘만주사변의 진상’ 사진엽서 봉투 표지와 유조호철도 폭파 현장과 그 잔해. 1931년 9월 만주사변 직후 동북군(동북군벌 장학량張學良이 지휘하던 중국군대)이 유조호철도를 폭파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관동군사령부에서 제작한 사진엽서. 유조호철도 폭파현장에 남겨진 동북군 군모와 소총, 동북군의 무기창고, 일간지에 게재된 반일 시사만화 등 그들에게 유리한 증거사진 15장을 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관동군이 침략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동북군의 소행이라고 조작 발표한 것이다.

9 10 만몽자원관滿蒙資源館 개관 기념엽서. 만몽자원관은 만주국 수립을 계기로 1932년 11월 도쿄 히비야 시정회관에서 개관되었다. 만주인의 풍요한 삶을 부각하기 위해 만주국 중류가정 모형을 전시하였고 만주 각지의 농산물 생산고 및 지하자원 분포 등을 도표로 그려 설명했다. 이 전시의 목적은 일본기업의 만주 투자와 일본인의 만주 이민을 촉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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